윤삼 ‘따라잡고 따돌리는’ 짝퉁 권하는 사회
2009.11.30 23:42
위험한 짝퉁?
세상은 참 재밌다. 돌아가는 꼴도 우습거니와, 세상을 즐겁게 보려면 얼마든지 즐겁고 괴롭게 보려면 얼마든지 괴로우니, 그 이치가 재밌다는 이야기다. 짝퉁문화가 딱 그렇다. 즐겁게 보는 법은 이렇다. 짝퉁문화는 문화적 민주화를 반영한다. 가상성이 지배하는 시대에 원본을 비트는 것이야말로 가장 미덕 아니던가. 진정성을 위시로 발산되는 모든 권위를 조롱하라. 희화화하고 웃으라. 그것이 가장 민주적이다. 주지하다시피 상당수 비평가들은 그런 식으로 짝퉁문화를 의미화했다.
게다가 즐겁기까지 한 이 연행(performance)에 대다수 대중들 역시 삶의 위안을 얻었다. 실제 삶이야 불안정하고 불평등하기 짝이 없지만, 상징체계를 조롱하는 짝퉁의 세계에선 모든 것이 평등하고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이 상상적 쾌락을 맛보기 위해 나이키가 나이스로, 푸마가 파마로, 또 카파가 갑빠로 변용된다. 게다가 소형 아파트에마저 yo-편한세상, 푸르지요 같은 이름이 등장한다.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심지어는 원본을 만들었던 사람마저도 즐거워한다. 개그맨이 성대모사를 하면 원본 목소리의 유명인이 오히려 고마워하는 모습과도 비슷하다. 한마디로 짝퉁 권하는 사회다.
그런데 다소 역설적이지 않은가. 권위를 철폐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짝퉁이 원본의 권위를 소멸시키기는커녕, 외려 원본 자체의 희소가치를 돋보이게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짝퉁을 통한 문화민주화의 효과란 이런 것이었단 말인가. 물론 모든 짝퉁이 환영 받는 건 아니다. 브랜드 이름을 변조한 짝퉁이야 해프닝 내지는 건전한 키치문화 정도로 받아들일 법하지만, 정말로 진짜 같은 짝퉁은 원본의 시장 가치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지적재산권이라는 신개념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에 이런 류의 짝퉁은 권장 사항에 포함되지 않는다. 오히려 공공의 적으로 취급 받기 일쑤다. 이 짝퉁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시장을 교란하는 행위라는 이유 때문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짝퉁문화라고는 하지만, 다 같은 짝퉁은 아닌 것이다. 위험한 짝퉁은 철저하게 억제되고 위험하지 않은 짝퉁은 장려 받는다. 이게 현재 짝퉁을 둘러싼 문화 정치의 현주소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동일한 효과로 단락(短絡)지어질 텐데, 그건 무엇일까. 여기에 바로 진정한 역설이 있다. 짝퉁의 위험성에 따라 시장체계에 포섭하든 배제하든간에 그 효과는 원본의 우월적 지위를 보전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힌다는 점이다. 재밌지 않은가. 세상은 괴롭게 보려면 얼마든지 괴로운 법이다.
흉내내기와 따라잡기: 지배계급보다 더 독실한 명품족 되기
아쉽게도 2000년대 초반이 지나면서 문화의 상징적 전략을 통한 정치적 실천은 (적어도 알려진 바에 의하면) 소실된 것 같다. 그때만 하더라도 강남의 힙합문화와 강북의 복고문화라는 것은 적어도 문화적으로는 대등한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10대 하위문화는 각각 자기 부모문화에 대한 스타일적 대항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적어도 10대 내에서는 상호대립적인 관계에 있었다. 강남의 10대는 교복을 몸에 딱 달라붙게 입고 깻잎머리로 치장한 강북의 정장 스타일을 혐오했고, 강북의 10대는 펑퍼짐한 교복과 말 잘 듣는 청소년 같이 온순해 보이는 강남의 힙합 스타일을 혐오했다. 예컨대 강북의 복고풍 스타일은 ‘철지난’ 니뽄삘(일본 feel)에 불과했고, 강남의 힙합 스타일은 ‘철없이’ 부모에 기생하거나 연예인을 따라하는 모습으로 비춰졌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되어 자신이 우월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 이러한 문화적 대립은 사라졌다. 그러면서 짝퉁문화라는 것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서로 문화적으로 대립하던, 적어도 10대에게만은 그 대립이 유효했던 시절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이제 더 이상 강남 힙합과 강북 복고라는 식으로 어떤 전선을 상상하는 건 불가능하게 됐다. 강북의 철지난 ‘곤조’(근성)가 강남의 철없는 ‘엣지’에 기가 눌린 형국이다. 더 이상 피지배계급이 자신들 고유의 문화적 스타일을 가지고 계급적 표현을 하는 일은 없게 됐다.
대항문화가 부재하다는 것, 바로 이것이 짝퉁문화의 정치 지형을 요약한다. 짝퉁문화는 철저하게 원본의 가치를 고양시켜주지 않는가. 진짜 같은 짝퉁으로 시장질서를 교란시키지 않는 이상, 상징정치를 실현하는 어떤 짝퉁 행위도 원본이 가지는 지배적 위치를 위협하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짝퉁문화는 너무 덜 위험하다. 대항하지 않는다. 싸우지도 않는다. 쉽게 굴복한다. “좀 더 엣지 있게 살 수 없어?” 이 한 마디가 모두에게 강박이 되어 삶의 리듬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한 마디로, 부르디외식의 구별짓기(distinction)는 끝났다. 누군가는 구별짓기가 없다는 말에 그렇지 않다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사실 구별짓기는 끝났다. 부르디외가 구별짓기를 말했을 때는 지배계급의 문화적 동학에 대해 피지배계급 또한 자기 고유의 문화를 형성하고 의미화하는 맥락이 성문화된 것이었다. 그런데 대다수 사람들이 이해하는 구별짓기란 지배계급의 문화적 행위에 한정되어 있다. 그럼, 오늘날 현실에서 피지배계급은 무얼 하고 있단 말인가. 그들은 구별짓지 않고 단지 흉내내고 있을 따름 아닌가.
우리가 선대의 어떤 전통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영향 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흉내내기(mimicry)의 동학은 필연적인 것이다. 일찍이 포스트주의의 반짝거림에 매료된 사람들은 바로 이 흉내내기의 전략에서 의미를 찾으려 한 바 있다. 그러나 이것이 가지는 정치적 효과에 대해서는 재고해볼 여지가 있다. 지배집단의 언어를 전유한다고 해서 그게 다 같은 전유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이스, 파마, 갑빠, yo-편한세상, 푸르지요 등이 재치 있고 해학적인 건 사실이지만, 이런 표현들이 얼마나 위협적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잔존한다. 이 시점에 누군가가 풍자냐 자살이냐고 묻는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풍자가 아니라 자살을 감수할 수 있을 정도의 파괴적 충동일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지금 같이 흉내내기에 기반한 짝퉁문화는 제국과 체계와 지배문화에 의한 식민화 현상을 드러내주는 지표가 될 수 있을지언정 그 자체가 정치를 담보하지는 못한다. 나이스, 파마, 갑빠를 통해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들은 아직도 살아 있음을 입증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물적으로 생명이 붙어 있는 것일 뿐 정치의 한계를 넘나드는 건 절대 아니다. 달리 말해 나이키와 푸마와 카파 등이 가지는 교환가치의 문제, 그리고 그것을 향한 물신숭배 등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걸고넘어지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yo-편한세상과 푸르지요 역시 멋들어진 아파트에서 살고 싶다는 현대인의 욕망 체계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지 못한다. 정치의 한계는 견고하고, 따라서 정치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정말로 불행한 것은 정치의 퇴행이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흉내내기는 식민화된 현실과 더불어 근본적으로 원본과 동일화될 수 없다는 일종의 자기 인식 속에서 나타나는 행위다. 그러나 오늘날 짝퉁 문화의 퇴행은 ‘정말로 진짜 같은 짝퉁’을 통해 한걸음 더 나아간다. 대량생산 체제에 잇따른 대량소비의 사회는 더욱 퇴행적인 방식으로 종언을 고하고 있다. 이제는 과잉소비의 사회다. 빚을 내어 소비하는 사회. 빚이 있는 게 오히려 정상인 사회. 빚이 자산으로 둔갑하는 사회 말이다.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지갑이 두둑해진 개인은 노동계급으로서의 중심적 동일성을 분리해내는 한편, 마케팅 시스템이 호명하는 소비자로서 스스로를 주체화하고 새로운 문화적 행위를 꿈꾸기 시작한다.
이즈음부터 짝퉁문화는 흉내내기가 아니라 따라잡기(catch-up)를 지배원리로 삼는다. 돈이 있는데 뭐 하러 엣지 없게 흉내내는 데 만족한단 말인가. 그래서 명품을 직접 구입한다. 루이비통, 에르메스, 샤넬, 버버리 등은 그들뿐만 아니라 나도 가질 수 있는 어떤 것이 되었다. 게다가 얼마 전 빈티지 열풍이 불면서부터는 압구정동 (명품 진열장) 갤러리아 백화점 주변으로 중고명품 가게들이 늘어서는 진풍경마저 연출되고 있다. 이제는 지배계급보다 더 독실한 명품족이 되는 일만 남은 것이다. 구별의 전선은 더 이상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에서가 아니라, 합리적 소비자와 신용불량자 사이에서만 획정될 뿐이다.
따라잡기의 문화 풍경은 실로 기묘하다. 현재의 짝퉁문화에선 명품과 이미테이션을 구분하는 방법이 가장 필수적인 지식이다. 양질의 소가죽인지 합성피혁인지 원단을 확인하라. 봉제에 핸드메이드의 정성이 들어갔는지 단순히 기계와 본드로 처리된 것인지 봉제라인을 확인하라. L과 V가 겹친 모양을 정확하게 보고 과연 V인지 X인지 로고를 확인하라. 물론 중요한 것은 지식 자체가 아니라, 이 지식을 실천함으로써 몸에 배는 효과일 것이다. 따라서 그 결과는 자명하다. 명품이야말로 진정 가치 있다. 적어도 이 사실은 한없이 존중 받는다.
물론 이러한 지식은 정반대로 적용될 수 있다. 어느 누구나 지갑이 두둑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지식이 진짜 명품 같은 짝퉁을 구입하는 데도 중요한 기준이 된다. 짝퉁을 고르면서 원단과 안감과 봉제라인과 로고를 확인하는 것은 짝퉁을 배제하기 위한 행위이면서 동시에 손색없는 짝퉁을 구입하는 행위다. 진짜 같은 짝퉁 백을 걸치고 다니기. 다시 강조하지만 세일과 아웃소싱 등을 하지 않는 원본은 절대로 위협받지 않는다. 오히려 가치가 더욱 높아질 뿐이다.
짝퉁문화는 이제 명품문화와 도저히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포섭됐다. 명품을 따라잡으려는 문화적 경쟁 풍토가 짝퉁문화라면, 이것이야말로 명품문화의 이면 아니겠는가. 지배계급과 자신을 구별지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따라잡으려는 상호작용적 경쟁체제가 도래한 것이다. 따라서 관건은 단 하나일 뿐이다. 포섭되든가 아니면 배제되든가. 도대체 이 ‘합리적’ 소비의 끝은 어디란 말인가.
따돌리기: ‘어서오세요. 한정판입니다’
결론을 대신해 괴롭고 우울한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겠다. 피지배계급이 흉내내기를 넘어 따라잡기의 동학으로 지배계급을 추종하는 사이에, 지배계급이라 해서 가만히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배계급에 속한 개인들은 뭇사람들이 소비문화에서 자신을 따라잡으려 한다는 사실이 짐짓 불쾌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나. 당연히 따돌리면(catch-down) 된다. 그리하여 명품문화에 ‘한정판’이라는 표식이 등장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애초에 명품 자체가 한정판이었을 텐데, 그 표식이 공론화됐다는 것은 따라잡기와 따돌리기의 동학이 그만큼 공식화됐다는 징표일 테니 말이다.
이제는 브랜드 자체가 희소한 것이 아니라, 상품의 개별 모델 자체가 희소가치를 가진다. 상품물신의 극치다. 국내에 20개밖에 없는 핸드백, 국내에 15개밖에 없는 구두, 국내에 n개밖에 없는 ○○○……. 따라서 소비문화에서 계급적 서열화는 더욱 공고해질 수밖에 없다. 물론 피지배계급이라고 해서 가만히 있는 바보는 아니다. 열심히 따라잡는다. 그러면 아예 국내에서는 팔지 않는 핸드백, 구두, 자동차 등등이 등장하기까지 한다. 또 따돌리고 따라잡고, 계속 따돌리고 따라잡고.
지배계급 ‘일반’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런 체제는 아주 반길 만한 것이다. 그들이 문화적 경쟁(전쟁이 아니라!)에 동참해줌으로써 계급구조 자체는 더욱 안정화되기 때문이다. 작금의 짝퉁문화는 우선적으로는 계급문화라는 것 자체에 저항을 스스로 거세하고 결과적으로는 지배행위가 존속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준다. 그런 식으로 짝퉁에 대한 불관용은 짝퉁에 대한 관용과 공존하며 현대의 소비문화와 계급동학을 유지시켜준다. 이것이 현대의 과잉소비문화가 함의하는 정치의 파멸적 효과다.
오늘날 명품문화를 지지해주는 짝퉁문화란 얼마나 안전한 것인가. 그렇게 보면 위험한 짝퉁이란 처음부터 불가능한 전략이었는지 모른다. 시장질서의 교란이란 것이 사실은 시장 자체가 감수해야 하는 지극히 시장적인 현상이니 말이다. 이상주의자가 아닌 이상, 완전태로서의 시장이 현실에서 실현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흉내내고 따라잡는 짝퉁은 필요불가결한 외부자이자 보조자이고, 지속적으로 관리 받아야 하는 리스크이며, 명품문화에 진정으로 의미 있는 타자인 셈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질문일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진정으로 위험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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