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주체로서의 국가와 국가폭력에 대한 이론적 고찰

1. 문제제기

“도청에 끝까지 남아 있던 사람들을 잘 기억해 둬. 어떤 사람들이 이 항쟁에 가담했고 투쟁했고 죽었는가를 꼭 기억해야 돼. 그러면 너희들은 알게 될 거야. 어떤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어 가는가를.”5ㆍ18 광주민중항쟁에 대해 무엇을 기억하고 어떤 일을 할지를 이보다 명확하게 제시한 문구가 또 있을까! 부당한 국가의 폭력에 죽음으로 맞선 이름 없는 자들의 마지막 절규와 그들의 죽음을 소리 없이 지켜보았던 광주시민들의 두려움과 안타까움이 선명하게 메아리친다.

1980년대는 5ㆍ18 광주민중항쟁을 ‘기억’해야만 하는 시대였다. 즉, 당시의 광폭한 국가폭력으로부터 온전히 역사적 사실들을 보존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인내와 고통이 동반되었다. 1987년의 6월 항쟁은 권위주의적 정치구조에 파열구를 내었고, 그 틈새는 민주화의 열망을 통해 더욱 벌어졌다. 6월 항쟁을 통해 군사독재권력이 감추어 왔던 판도라의 상자는 여지없이 개봉되었는데, 그 안에서 나온 것들은 국가폭력에 맞서 민주주의를 열망하며 투쟁했던 민중들의 외침과 희망이었다.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기만적이긴 했지만) 국가의 ‘역사바로세우기’를 통해 광주는 ‘기억하기’의 차원을 넘어 역사적 평가라는 지평 위에서 새롭게 조명되었다.

5ㆍ18 광주민중항쟁은 1997년에 불어 닥친 IMF 한파가 야기한 한국사회의 재구조화, 즉 직장, 가정, 학교를 비롯한 모든 사회영역이 시장논리 속에서 황폐화되어 가는 상황과 견주어 볼 때 어떻게 재조명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의 전횡이라는 현재적 국면 속에서 5ㆍ18 광주민중항쟁을 기념의 차원을 넘어 새롭게 평가할 현재성을 띤 사건으로 규정할 근거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본 글은 ‘폭력 주체로서의 국가’라는 문제설정을 통해 그 해답을 찾고자 한다. 물론, 국가폭력이라는 주제는 그동안 인문ㆍ사회과학 영역에서 이론적 혹은 실천적으로 다양하게 다루어져 왔다. 또한 5ㆍ18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분석틀로서 국가폭력의 문제가 주요하게 연구되기도 했다.

하지만 본 글이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국가폭력이 행사되는 기초와 그 형태 그리고 신자유주의라는 국면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이다. 그것은 대중의 삶을 불안의 영속화로 구조화시키고 안전에 대한 열망을 정치적으로 조작해 국가에 대한 무한 의존을 가능케 하는 통치형태와 관련된다. 이 속에서 국가폭력은 대중의 안전에 대한 열망에 기초해 행사되는 정당한 주권의 실천이 된다. 이제 국가는 삶의 안전을 지키는 최고의 흑기사가 되고, 안전 수호를 위해 행사되는 모든 행위는 그것이 폭력에 기초하더라도 정당성이 사전에 부여된다. 사유 재산의 보호로서 행사되는 치안활동이 국가의 주요 목표가 되면서, 사회적 안전(사회정의 구현, 부패 척결, 범죄와의 전쟁)에 저해되는 개인이나 집단은 즉각적으로 격리되고 배제된다.

문제는 국가의 치안활동이 대중의 삶을 불안하게 만드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은폐하고 하나의 사회적 상식으로 된다는 점이다. 즉, 많은 사유 재산을 소유해 이를 보호해 주길 바라는 소수의 유산계급과 그로부터 벗어난 다수의 무산계급에 대해 국가의 치안활동은 노골적으로 계급차별을 가시화 한다. 유한계급에게 국가는 믿음직스런 민중의 지팡이지만, 무산계급에게 국가는 주변화 되는 삶의 위기와 불안을 호소하는 어떤 행동도 허용치 않는 엄정한 공권력의 집행자인 것이다. 이로부터 국민과 비국민(내부 난민)의 구별과 차별이 가속화되며, 비국민에 대한 국가의 폭력은 노골적으로 행사된다. 얼마 전, 전국의 대학교수와 예술인들이 시국선언문에서 밝힌 ‘민주주의의 후퇴’는 바로 위의 상황을 반영한다.

따라서 본 글은 폭력의 기원과 유형, 폭력주체로서 국가를 규명하면서 신자유주의 속에서 행사되는 국가폭력의 특이성을 분석하고자 한다. 1980년대와 신자유주의가 노골화되는 2000년대의 한국사회에서 국가폭력은 동일선상에서 비교될 수 없는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본 글은 양 시기 국가폭력을 비교하면서 그 변화과정을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현 시기 신자유주의 속에서 전개되는 국가폭력의 논리와 근거를 이론적으로 규명하는 데 있다. 이때 5ㆍ18 광주민중항쟁은 국가폭력이라는 문제를 제기한 모티브로 한정된다.

2. 폭력의 기원과 유형

그동안 폭력은 적극적인 인식대상이 되지 못했다. 즉, 폭력은 전근대적 혹은 예외적 현상으로 규정되었다. 이 속에서 폭력의 내적 구조와 동학, 폭력적 제도와 조직, 폭력의 유형, 폭력주체와 대상 등은 충분히 분석되지 못했다. 하지만 맑스주의는 폭력을 하나의 사회적 사실 혹은 과정으로 인식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했다. 즉, 경제적 잉여가치의 착취로 요약되는 계급지배의 폭력성을 규명함으로써 폭력과 자본주의라는 사회체제와의 관계를 인식하게 만들었다. 가령, 소유의 폭력과 정치적 폭력을 구분한 맑스는 양자의 관계를 자본주의 발전 정도와 계급의 역학관계에 따라 분석함으로써 폭력의 사회 구성적 성격을 규명했다.

폭력에 대한 보다 적극적 논의는 1ㆍ2차 세계대전과 소련의 국가사회주의체제가 야기한 홀로코스트에 대한 반성과 문제제기로부터 나왔다. 이러한 대량학살을 자행한 국가폭력의 만행은 “ 폭력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봐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함께 보다 세분화되고 유형화된 폭력론의 구성을 추동했다. 폭력의 성격 구분과 관련해, 소렐과 벤야민 그리고 마르쿠제는 해방적 폭력과 억압적 폭력을 구분하면서 대중의 내재적 힘에 의한 구성적 해방에 도움이 되는 폭력을 긍정했지만, 포퍼와 아렌트는 해방을 위한 폭력도 종국에는 지배와 억압을 위한 폭력으로 변질되어 대중의 역능을 억압한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들 폭력론들은 폭력조직, 제도, 자본주의, 국민국가, 대중, 가부장제와 맺는 역동적인 관계를 해명하지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하였다.

이로부터 폭력을 근대성과 관련시켜 논의하면서 폭력이 근대사회의 문화적, 제도적 복합체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규명하는 주장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즉, 폭력의 문제가 근대성의 다른 요인들과 맺는 복합적 결합관계 및 역동적 변화과정을 포착하는 접근들이 시도되었다. 먼저 바우만은 폭력을 근대사회의 고도화된 분업체계 및 기능적 의존체계와 연계시켜 논의를 전개했다. 즉, 근대성의 특징인 광대하면서도 촘촘한 수평적, 기능적 분업체계는 익명적 관계를 급속도로 증가시켰는데, 이는 타인이 더 이상 도덕적으로 책임져야 할 대상이 아닌 물신화된 대상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바우만은 이러한 기능적이고 소원한 관계와 그로부터 야기된 도덕적 판단능력의 쇠퇴가 생면부지의 사람을 눈 깜짝 하지 않고 학살할 수 있는 동인이 되었다고 보았다.

기든스는 근대사회의 역사적 형성과 체제 내에서 폭력이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을 규명했다. 즉, 전쟁이 가능할 수 있도록 국가는 조세장치와 행정체계를 통해 총동원이 가능한 단일한 운명공동체로 대중을 호명하고 관리한다는 것이다. 이 속에서 국민국가와 국민군대는 영토적으로 경계 지어진 정치적 공동체 내에서의 시민권의 두 측면인 시민 권리와 병역의 의무로서 함께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기든스는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과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 사이에 긴밀한 상관관계가 존재함을 분석했다. 즉, 자본주의적 생산과 상품화 과정은 경제 내적 과정임과 동시에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으로 가능해진 포괄적 규제 및 자원동원과 긴밀히 연결된다는 것이다.

한편, 폭력의 유형 구분은 갈퉁과 부르디외의 논의를 통해 정식화되었다. 먼저 갈퉁은 직접적 폭력(가시적으로 행사되는 육체적, 언어적 폭력)과 구조적ㆍ문화적 폭력(비가시적 폭력)을 구분했다. 갈퉁에게 중요한 것은 구조적 폭력인데, ‘구조적 폭력’이란 인간 잠재성의 완전한 실현을 억압하는 모든 구조와 직접적, 구조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문화적 폭력을 의미한다. 그는 가시적 폭력에 대한 대중의 무감각을 대중문화로 대표되는 물질주의 문화에서 찾았다. 갈퉁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 평화적인 비폭력 전략을 제안하는데, 이를 위해 공감, 비폭력, 창조성으로 갈등을 해결할 능력의 배양을 주장했다.

부르디외는 권력 재생산에 있어 상징자본과 상징폭력이 수행하는 역할에 주목하면서 문화체계의 생성과 재생산이 필연적으로 권력관계 속에서 정치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규명했다. ‘상징자본’이란 오인과 승인의 구조 속에서 자명하지 않는 세계를 현실의 직접적 반영인 양 표상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자명한 것으로 믿게 만드는 상징적 위계, 질서, 서열을 의미한다. 이때 상징권력을 보유한 지배집단은 정당성을 부여받는 상징폭력의 다양한 장치를 독점하면서 동의와 상식의 힘에 기초하여 지배관계를 재생산한다. ‘상징폭력’이란 상징자본의 한 구성요소로서 세계를 의미화하고 자신의 힘의 기반이 되는 권력관계의 은폐를 통해 그 의미체계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권력을 말한다.

한편,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탈근대 속에서 출현한 전지구화 된 주권형태인 제국(Empire)의 폭력을 분석한 이론이 나왔다. 네그리와 하트는 그들의 저서『제국』에서 제국의 지배전략과 그 속에서 행사되는 폭력을 분석했다. 이들에 따르면, 제국은 세계를 관장하는 유일한 권력 형태이자 주권형식임을 세계에 끊임없이 주입시켜 이들의 이탈을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제국이 갖고 있는 권력의 힘을 사용하는 효과에 직접 기초한다. 이를 위해 제국은 제국에 저항하는 세력에 대해 ‘세계 평화를 위해’ 혹은 ‘세계의 균형적 발전을 위해’ 그리고 ‘세계시민의 안전을 위해’ 폭력의 사용이 필요하다고 선전한다. 이 속에서 제국의 적은 ‘마피아’, ‘악마’, ‘조폭’과 같이 사회적 일탈자 및 범죄자의 이미지로 규정된다. 과거 부시정권이 북한과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발언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제국은 사회적 바이러스를 박멸해야 할 주체로서 자신을 세계시민의 치안을 담당할 경찰로서 설정하고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한다.

3. 폭력의 의미 변화

영화 <증오>와 <공공의 적>은 인간과 폭력의 관계 혹은 사회제도와 폭력의 관계를 유려한 영상으로 그려냈다. 이들 영화는 기존의 폭력영화(서부영화, 전쟁영화, 느와르영화)와는 다르게 폭력의 문제를 제기한다. 즉, 기존 폭력영화에서 폭력은 ‘정의’, ‘평화’, ‘자유’라는 공적 명분을 통해 정당화되었고, 폭력을 행사하는 주인공과 악당 역시 ‘공적 가치의 수호’라는 잣대를 통해 감정적 동일시와 적대감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주인공과 악당이 행사하는 폭력의 양상과 잔혹함은 대동소이하다. 그런데 <증오>와 <공공의 적>은 위의 전형적 문법을 깨고, 폭력의 문제를 공적 대상이 아닌 사적 대상으로, 주인공 역시 ‘슈퍼맨’과 같은 초인적 영웅이 아닌 모순투성이의 평범한 인물을 관련시킨다.

먼저 <증오>는 주인공이 속해 있는 빈민계층이나 게토주민에게로 내향하는 폭력을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이민자의 증가, 국민전선 같은 극우세력이 주축이 된 인종주의, 이들을 대하는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이 발생한 1990년대의 프랑스를 사회적 배경으로 한다. 이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주인공의 손에 우연치 않게 들어온 총을 통해 주인공의 욕망 대상이 어떻게 바뀌고 그것들이 어떻게 파괴되는가이다. 이를 통해 이 영화는 인간의 내적 폭력성이 갖는 잔혹함뿐만 아니라 명분과 의미를 상실한 폭력을 고발한다.

<공공의 적> 역시 폭력주체와 양식의 새로운 설정을 통해 명분 없는 폭력을 비판한다. 경찰로 나오는 주인공은 국가 혹은 공권력을 표상하며, 악당으로 나온 주인공은 잔혹한 살인을 일삼는 사이코패스로 상징된다. 문제는 경찰과 악당의 서로에 대한 폭력이 완전히 명분을 상실한 사적 주체를 통해 행사된다는 점이다. 즉, 치안이라고 하는 공적 명분보다 ‘맞짱’으로 표현되는 자존심 대결 양상은 명분 없는 폭력의 공허함과 공권력의 과잉 행사가 야기할 위험성 그리고 폭력의 사유화가 갖는 무모함을 일깨운다.

폭력의 의미가 변화된 상황은 단지 두 영화의 감독이 연출한 독창적 상상력에 국한되지 않는다. 즉,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현 상황에서 명분 없는 폭력은 더욱 가시화되고 있으며 제도화되고 있다. 그것은 폭력이 행사되는 대상의 변화를 원인으로 하고 있는데, 사카이 다카시는 그의 저서『폭력의 철학』에서 신자유주의 속에서 대중의 삶의 변화로 인해 폭력의 의미가 변했다고 분석한다. 즉, 포디즘 시기에 싸구려 노동력을 제공했던 대중과 그들의 삶의 공간인 게토가 포스트포디즘 속에서 직업 없는 곳으로 변하고 커뮤니티 기능까지 공동화되면서 착취조차 당하지 못하는 쓸모없는 집단 거주지가 되었다. 그는 거리의 아이들, 약물중독자, 매춘부를 겨냥한 準경찰조직의 폭력(폭력의 사유화)이 야기한 심각성을 논의한다.

문제는 명분 없는 폭력으로 대변되는 폭력의 변화이고, 그것이 갖는 적극적인 ‘정치성'이 쇠퇴했다는 점이다. 이때 정치성이란 폭력을 통해 달성하려는 공적 명분을 말한다. 정치성의 쇠퇴와 관련하여, 예전에는 분명한 공적 명분을 통해 폭력행사의 정당성이 확보되었다면, 신자유주의 국면에서의 폭력은 도처의 무방비 사람들을 대상으로 행사된다. 이는 부시정권이 일으킨 이라크전쟁과 같이 폭력의 세계화, 민영화, 사유화로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경제활동을 지원하는 신자유주의와 깊은 연관이 있다. 이로부터 폭력주체는 공적, 사적 영역을 넘나들 뿐 아니라 폭력의 타깃도 포괄적으로 설정되며 폭력행사의 명분은 매우 자의적으로 변한다.

4. 폭력주체로서의 국가

폭력은 무조건 나쁜 것인가? 폭력 사용을 절대 불허한다고 하면서 노동자들의 파업과 철거민의 망루에 전경으로도 부족해 용역깡패와 경찰특공대까지 투입해 무력 진압하는 공권력은 정당한가? 역사적으로 볼 때,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 체제나 제국주의 침략의 폭력성은 폭력이 어떠한 형태로든지 정당화될 수 없음을 일깨워 주었다. 하지만 사회운동이나 인권의 역사, 즉 민주주의의 발전에서 보면, 폭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증오는 반드시 옳지 않음을 시사한다. 민주주의의 역사는 그 기원부터 억압적인 지배체제에 맞선 민중들의 폭력적 저항과 그 궤적을 함께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폭력은 인류의 삶과 보편적 가치를 증진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폭력은 역사적 맥락에 따라 달리 평가되며, 이는 곧 폭력이 그 자체가 아닌 그것을 바라보는 특정한 세계관의 투사를 통해 일정한 의미가 부여됨을 의미한다.

폭력에 대한 의미나 평가가 다양하게 나올진대, 국가폭력이 절대적으로 용인되는 혹은 용인되도록 강요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문제의 핵심은 폭력주체로서 국가를 설정하게 만든 근대의 자유주의 정치사상과 사회이론에 있다. 이는 독일에서 체계화된 국가이론의 전통과 사회계약설로 대표되는 홉스의 정치사상에 근거한다. 먼저 독일에서 발전한 국가이론의 대표라 할 베버의 권력론은 근대국가의 형성과 그 개념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베버에게 있어 ‘권력’이란 자신의 의지를 타인의 의지에 반해서까지 관철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또한 ‘지배’란 권력의 특수한 사례로서 특정한 명령에 대해 타인의 복종을 얻어낼 가능성을 말한다.

이때 ‘국가’란 권력과 지배가 행사되는 특수한 정치조직체로서, 정당한 물리적 강제를 행사할 권리와 권력을 독점하는 데 성공한 공적 지배기관으로 정의된다. 이 속에서 베버는 정치공동체를 한 영토와 그 위에 살고 있는 인간들에 대해 질서 잡힌 지배를 폭력적으로 관철시킬 수 있는 권리와 권력을 가진 집단으로 정의했다. 이러한 베버의 정의는 특정한 영토 내에서 폭력행사의 권력과 정당성이 국가로 독점화되어온 과정과 독점적 폭력이 모든 사회세력들을 지배하고 복종시킬 수 있는 권력적 기반임을 인식하게 만든다. 따라서 영토, 지배, 강제, 폭력은 베버의 권력론의 핵심을 이루며, 특정한 배치 속에서 폭력과 국가의 관계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국가가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의 유일한 원천이 된다.

한편, 홉스의 근대국가론 역시 폭력주체로서 국가를 설정하고 그 지위의 절대성을 부여하게 만든다. 홉스에게 개인은 자연권이라 할 자기보존의 욕구를 지닌 존재가 되는데,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개인의 자기보존은 위기에 처한다. 이때 자기보존을 위한 이성의 계율이라 할 자연법이 조정역할을 수행하게 되는데, 개인의 권리 일부는 모두 자진해서 포기하고 양도하는 사회계약이 체결되고 마침내 리바이어던이라는 근대국가가 탄생하게 된다. 홉스에게 있어 국가는 개인이 자발적으로 양도한 권리의 총체인 일반의지를 담지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절대 복종의 대상이 된다.

근대국가가 형성된 근대라는 시대는 대중의 힘이 기존의 억압체제(봉건체제)에 균열을 내면서 도래한 새로운 역사적 단계이다. 이때 탄생한 근대국가는 대중의 힘에 대응하는 반작용으로 볼 수 있다. 즉, 대중의 구성 권력에 대항하여 대중의 외부에서 초월적으로 위치한 국가는 대중의 힘을 주권권력에 이전하는 계약을 통해 지배체제를 구축함과 동시에 대의제 등의 국가장치를 통해 대중의 힘을 순화시켰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국가는 폭력주체로서 설정됨과 동시에, 독점적이면서도 절대적인 폭력의 행사를 주권의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이와 관련하여 주권을 예외상태에 대한 결정권으로 정의하고, 주권자를 합법적으로 법을 중지시킬 권리를 가진 주체로 설정한 칼 슈미트의 논의는 경청할 만하다. 칼 슈미트에게 국가는 전쟁과 파국과 같은 예외상태에서 비상사태를 선포해 기존의 헌정질서를 중단시킬 수 있고 합법과 불법을 나누는 기준을 정할 유일한 합법적 주체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는 법 안에 있으면서 법질서의 수호자를 자처하다가도, 예외상태에서는 그 중단을 선언하는 법 바깥의 존재가 된다. 이 속에서 주권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어떤 형태의 끔찍한 폭력도 적법하게 행사되며 그에 대한 이의는 법질서의 파괴자로서 단죄된다.

5. 국가폭력의 기반

영화 <볼링 포 콜럼바인>은 감독의 재치 있는 해학의 영상미학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며 마냥 즐거워 할 수 없는 것은 미국을 폭력국가 혹은 폭력사회로 몰고 간 권력의 은폐된 작동 메커니즘이 적나라하게 폭로되기 때문이다. 은폐된 권력 메커니즘이란 불안과 공포의 조장과 보이지 않는 적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사적 무장화 그리고 보다 강력한 국가의 치안활동에 대한 대중적 승인이다. 실로 깡패국가로서 미국이 걸었던 일방주의 노선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지지되고 용인되었던 것이다.

바로 공포와 불안이 국가폭력의 기반이요 원천이 된다. 이때 공포와 불안은 개인의 인성체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형성되고 공유되는 집단감정이자 무의식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공포의 대상으로 지목되는 외국인, 테러, 절도, 북한, 광우병, 사스, 조류 독감 등은 모두 사회적 현상이자 사건들이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공포 목록에 올라와 있는 대상들이 반드시 현실의 위험과 일정한 상관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실질적인 위험요소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와 담론을 통한 의미 구성물인 것이다. 가령, <볼링 포 콜럼바인>은 실질 범죄율이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 뉴스의 보도는 600%나 증가했음을 폭로하고 있다. 또한 범죄에 대한 과잉 담론의 생산 속에서 그 해결책은 사회 불안을 초래한 구조가 아니라 치안 악화에 따른 공안정국의 형성으로 한정된다.

이와 관련하여 사회가 위협을 느끼는 것은 현실의 높은 범죄율이라기보다 ‘안전’이라는 개념이 널리 유통된 결과로 분석한 사카이 다카시의 논의는 전적으로 옳다. ‘불안과 안전’, 바로 이것이 국가폭력의 기초이면서 정당성이 확보되는 지점인 것이다. 불안은 하이데거가 정의한 바와 같이 인간 존재의 무근거성, 방향 상실을 폭로하는 감정이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불안은 불안의 대상이 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세계의 어떤 존재로부터 위험이 가해질 수 있는 상태로서, 위험의 편재성과 같은 쌍인 위태롭게 만드는 것이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은 도리어 불안을 가중시킨다. 곧 불안이라는 정동은 어떤 대상을 통해 공포라고 하는 정동의 모습으로 바뀌고 그 공포는 계속해서 무제한으로 대상을 찾아낸다.

절대적 불안정성과 위험의 편재성을 통해 국가는 안전이라는 명목으로 그 어느 때보다 폭력을 광범위하게 행사하고 있다. 예전에는 안전보장이 구체적 대상의 확실한 위협에 대응하여 구축되었다면, 현재의 그것은 대상 없는 위협, 위협의 대상이 애매하다는 사실로부터 형성된다. 하지만 안전보장을 위한 현란한 미사어구와 감시 장치들은 더욱 공포와 불안을 조장한다. 가령, 범죄예방이라는 명목으로 생활의 내밀한 곳까지 설치된 CCTV는 안전의 보장이 아니라 그 한계를 보여준다. 특히 제국의 출현이라는 정세 속에서 냉전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공포와 불안의 증폭 현상은 더욱 더 국가폭력을 조장한다. ‘테러와의 전쟁’, ‘범죄와의 전쟁’을 공공연하게 선언하는 국가의 규정되지 않은 적에 대한 선제공격의 폭력성은 그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위와 같이 규정되지 않은 불안 속에서 국가는 구성원을 방어하는 실질적 커뮤니티에 대한 갈망을 해결하는 절대적 대상이 된다.

한편, 국가폭력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다수파의 공격과 결부된다. 즉, 국가폭력은 주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인종적, 성적 소수자를 겨냥해 행사된다. 이는 공포에 대한 다수파의 상상적 전도를 통해 전개된다. ‘다수파’란 사회의 중심부를 구성하는 다양한 지배분파를 지칭하는데, 이들은 마치 소수자에 의해 압도적인 힘으로 포위당한 듯 두려워하고 공포를 느끼는 심리적으로 전도된 의식을 갖는다. 가령, 흑인, 이주노동자, 노숙자, 동성애자 등은 권력의 차원 뿐 아니라 규모에 있어서도 소수에 불과하지만, 다수파의 이해를 대변하는 각종 매스미디어들은 마치 이들이 안전을 위협하는 사회적 바이러스인 양 비난하고 격리시키려 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예방을 위한 대항폭력으로 국가의 치안활동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요청이 되며 그 폭력성은 정당화된다.

마지막으로 국가폭력은 전체주의의 형태로서 전개되지만, 개인주의와 교묘히 결탁한다. 즉, 전체주의와 개인주의는 상호 대립된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필요로 하는 긴밀한 공모관계를 구축한다. 위험의 대상이 불분명하고 불안이 상시적으로 변하는 상황에서, 나 자신 뿐 아니라 주변의 이웃 모두 신용할 수 없는 잠재적 위협인물이 된다. 왜냐하면 나 역시 타자의 시선에서 보면 신뢰할 수 없는 이웃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각 개인들은 강력한 힘의 보호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안전 희구의 열망을 증폭시키는데, 국가는 이에 부응하는 ‘정의의 사자’로서 부상한다. 타자가 갖는 힘을 관리하고 통제하여 위험 요소를 제거할 수 있도록 국가의 강력한 치안활동을 요청한다는 것은 결국 타자의 시선에서는 또 다른 타자로서 존재하는 자신의 힘 역시 국가를 통해 관리되고 통제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모든 사회구성원들의 원초적 힘, 즉 구성 권력의 잠재력 역능은 국가로 수렴되고 양도된다.

6. 국가폭력의 작동

한국사회에서 신자유주의적 재구조화가 본격화된 것은 1997년 IMF 구제금융체제 이후부터이다. 물론, 1990년대 초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를 국정운영의 핵심 기조로 설정하여 소리 높여 외쳤다. 하지만 그것은 정책 이데올로기로서만 기능했고, 1996년 정리해고를 법제화 하려던 정부 시도가 대규모 총파업으로 좌절된 바와 같이 실질적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1997년에 불어 닥친 IMF 한파는 신자유주의가 위기에 처한 한국경제를 회생시킬 유일한 대안으로 채택되었다. 당시 치러졌던 대선에서 모든 후보들은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그 후 2009년 현재까지 지속되어 온 신자유주의 정책은 한국사회에 무엇을 남겼는가? ‘한강의 기적’이라 할 제2의 경제부흥은커녕, 마이너스 성장과 그로 인한 대중의 삶은 더욱 파탄에 빠지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명박 정부가 외치던 ‘잃어버린 10년’에서 잃은 것은 무엇이었나? 현 시점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이 가져온 손익계산서를 작성해 본다면, 사회양극화로 인한 부의 편중과 빈곤의 가속화라는 범주에 수많은 목록들이 계상되어질 수 있다. 금융자본주의라는 축적체제 속에서 거대 자본은 그 자체로서 더 큰 수익을 올렸지만, 나머지는 수익은커녕 판돈까지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명박 정부의 주요 내각 인사들에 대한 청문회에서 밝혀졌듯이, 상위 2%의 사람들이게 IMF는 더욱 자신의 자산을 불리는 호기였다. 그들이 지난 10년간 잃은 것이라고는 대선에서의 패배라는 것 하나 말고는 오히려 얻은 것이 더 많은 시간이었던 것이다. 반면, 중산층의 몰락으로 더욱 가속화된 무산계급의 확대는 정말로 잃은 것들이 많은 10년이었다. 문제는 이들이 겪었던 삶의 위기가 다시 회복될 수 없다는 점이다. 즉, 신자유주의 국면 속에서 삶의 위기는 ‘역전’이라는 극적 반전의 기회를 불가능하게 한다. 이들 무산자들이 접근할 기회와 자원의 획득은 원천적으로 차단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고병권은 그의 저서『추방과 탈주』에서 ‘추방된 대중’이라 불렀다. 그는 대중의 추방현상과 주변화를 현 시기 한국사회의 대중들이 겪는 삶의 위기를 사고하는 적절한 개념으로 인식하고 주변화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주변이란 뜻으로 권력과 부의 영역에서 부차화 된 대중의 지위를 의미한다. 둘째, 한계라는 뜻으로 대중들의 삶이 처한 상황이 삶의 한계지대로 추방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셋째, 이익이라는 뜻으로 주변화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독점하는 소수와 그를 통해 관리되고 활용되는 주변을 의미한다. 넷째, 공백이라는 뜻으로 정치의 핵심인 주변이 정치권에서 사고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위와 같이 추방된 대중은 고병권의 말대로 치외법권 지대에 존재하게 된다. 주권자가 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치외법권 지대에 있다면, 추방된 대중은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그 곳에 존재하게 된다. 그는 이러한 상황, 즉 치외법권 지대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를 두고 합법과 불법을 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한쪽은 법을 넘어설 수 있는 존재(폭력이 합법)이고, 다른 한쪽은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존재(법 자체가 폭력)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국가의 규제담론으로부터 촉발된 ‘합법ㆍ불법 논쟁’의 본질은 여지없이 폭로된다. 합법ㆍ불법 논쟁은 처음부터 폭력이 합법인 국가로부터 설정된 구도인 것이다.

추방된 대중이 치외법권 지대에 있음으로 인해 이들에 대한 국가폭력은 더욱 집중되고 노골적으로 전개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법이 적용될 수 없는 지역에 있음으로 해서 애초에 불법적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가령, 용산 참사를 야기한 공권력의 가공할 폭력성에 대해 국가가 어떠한 해결 의지를 보이지 않는 것은 이를 반영한다. 따라서 이들은 국민 전체 혹은 공익을 위한다는 국가의 위선적 언설 속에서 희생을 강요당하는 첫 번째 대상이 된다. 즉, 이들은 기업의 구조조정, 공권력의 위신, 범죄와의 전쟁, 도시의 청결을 위해 희생되는 첫 번째 대상인 것이다. 추방된 대중을 비국민 혹은 내부 난민이라 부르고, 이들에 대한 국가의 노골적 폭력행사가 역설적으로 이들에 대한 공포(대중에 대한 공포)로 분석한 고병권의 논의는 주목할 만하다.

주의할 점은 대중이 사회의 중심 혹은 내부로부터 추방되고 주변화 된다고 해서 완전히 버려지는 상황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즉 배제의 정치는 무조건적인 배제가 아니라 선택적 선별기준의 설정과 그로부터 배제되는 과정인 것이다. 삶의 영속적 위기는 무산자들의 불안과 공포를 구조화한다.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안전 희구 본능은 그들을 더욱 체제 속으로 편입하도록 강제한다. 강제는 외면상 부드러운 유혹으로 보이지만, 관철 방식은 매우 폭력적이다. 즉, 체제 속으로의 편입은 자신의 자유 선택과 능력에 따라 가능하다(능력주의)고 내세우지만, 그 과정에서의 경쟁체제는 가히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이에 대해 푸코는 복종이 자발적이라는 점에서 마치 자유가 그곳에 존재하는 것처럼 위장하는 지배전략을 분석한다. 이때 권력은 주체 내부에 공포와 희망을 적절히 촉발, 즉 복종의 과정인 공포와 희망의 감정적 배치를 교묘히 재구성하여 지배 상태를 지속시킨다.

7. 결론에 대신하여

예전에 고려대학교에서 사회헌납의 명목으로 삼성이 100주년 기념관을 지어준 일이 있었다. 이에 학교는 이건희 회장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려 했다. 당시 삼성은 아들 이재용에 대한 불법 양도세 증여 문제로 사회적 비판을 받던 터였고, 이에 총학생회에서는 이건희 회장에 대한 학위수여를 저지하기 위한 몸싸움을 벌였다. 다음날 일간지 사회면을 장식한 이 사건에 대해 한 학생이 총학생회장 탄핵운동을 온라인에서 벌였다. 이로 인해 탄핵을 둘러싼 찬반 논쟁이 학내에서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필자는 이 사건을 보면서 탄핵운동을 벌인 학생이 정말로 폭력을 모른다는, 한 마디로 “제대로 맞아본 적이 없는” 사람일거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국내 굴지의 대기업 CEO에 대한 버릇없는 행동(실력 저지)이 탄핵의 이유였기 때문이다.

또한 주변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나 시민들의 촛불시위를 보면 입에 거품을 물고 핏대를 올리며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입장은 “폭력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살펴보면, 구조적 폭력이라 할 비가시적 폭력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침묵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즉, 여성에 대한 남성의, 유색인종에 대한 백인의,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의, 지역 에 대한 서울의, 3류 대학에 대한 1류 대학의,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가시적ㆍ비가시적 폭력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필자 역시 폭력이 나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조건적으로 폭력을 비판하고 증오하는 것은 사실상 국가의 폭력 독점권에 대한 암묵적 동의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즉, 폭력 사용의 주체를 단일화하고 그의 압도적인 물리력을 통해 안전과 평화를 수호하겠다는 논리는 국가주의의 일방성을 승인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폭력은 안 된다”라는 말 앞에 보이지 않게 괄호 쳐져 있는 낱말들을 찾아 볼 수 있어야 한다. 즉, “(나만 빼고 너희들의) 폭력은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비폭력 담론을 무조건 수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비폭력 담론을 국가의 폭력독점과 분리하여 사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폭력 담론은 형태를 달리한 폭력이다. 일방적인 국가주의에의 승인은 결국 자기 가치의 자율적 실현을 가능케 할 대중의 역능을 국가의 제도장치 속으로 수렴시켜 순화시키려는 지배 권력의 음모에 놀아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합법적 폭력과 불법적 폭력의 대당 설정은 무의미하다. 논의의 출발은 대중의 역능, 즉 새로운 주체성의 형성과 그를 통해 자유의 공간이 확장되는 사회구성의 변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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