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사단법인 문화사회연구소사단법인 문화사회연구소

대중문화

"해고든 사망이든 그게 뭐가 달라요" -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가 보여주는 노동의 모든 문제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잡지 〈일터〉 4월호 [문화로 읽는 노동] 코너에 연재한 글입니다.
**오마이뉴스 http://omn.kr/1ssbi
***잡지에 실린 원고의 교정 이전 버전을 공개합니다.
by 김상민 posted Apr 14, 2021 Views 759 Likes 0 Replies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Extra Form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829fbdf354d2f889c547498c90b6fa59324a3058.jpeg

 

누군가 늦은 밤 지방 소도시로 장시간 자동차를 운전해간다. 새벽녘 임시 숙소에서 전형적인 사무직 노동자의 복장을 한 여성이 빨대 꽂은 팩소주를 마시면서 절망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는 어떤 감정에 가득 차있다. 주인공인 그녀는 무슨 이유인지 지방 하청업체에서의 1년간의 시한부 파견 근무를 명령받았다. 이 장면에서 나는 언젠가 사무직 여성 노동자가 오지에 있는 현장으로 파견 발령이 났으나 개의치 않고 그 상황을 극복해 최고의 현장 노동자가 되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의 이태겸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 것도 바로 그 뉴스 때문이라고 한다.

 

“당신 자리 여기 없습니다”

 

동기들 중에서도 제일 잘나가고 사내 모든 일에 일등이던 박정은 대리는 무슨 일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권고사직을 종용받다가 타협으로 1년만 하청업체에서 일하고 돌아오라는 파견 명령을 받는다. 하지만 막상 모든 걸 포기하듯 내려온 낙후된 지방 소도시의 송전탑 관리하청업체는 소장 포함 직원이 고작 네 명뿐이고, 그녀는 무엇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원청에서 좌천되어 내려온 사무직 직원을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무직이던 정은은 작업관리대장을 만드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려고 하지만 돌아오는 동료들의 말과 시선은 차갑다.

 

게다가 하청에서는 파견 노동자의 인건비까지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 닥친다. 원청의 인원감축 방침은 원래 일하던 직원들의 일자리까지 위협한다. 파견 내려온 정은을 잘라내려는 목적이지만 근무평가 결과에 따라 누가 해고될지 모를 일이다. 급기야 원청은 평가관을 내려 보내 하청업체 평가를 실시한다. 원청의 갑질과도 같은 평가 과정은 공공기관의 민영화와 효율을 앞세운 노동 관리가 피라미드식으로 구조화된 노동 환경 아래에서 어떤 식으로 노동을 쥐어짜고 책임을 분산시키며 회피하는지 보여준다.

 

정은은 꿋꿋하게 자신도 현장일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밤늦게까지 작업장에서 무거운 전기 작업 도구들과 혼자 씨름해가며 스스로 일을 배운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작업을 나가려고 하는 순간 자신이 입을만한 작업복도 없으며 심지어 현장 노동자들에게 특수 방전 작업복이 지급되기는커녕 그것을 자비로 구입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민영화와 하청의 하청과 같은 구조는 효율을 앞세우지만, 이처럼 모든 책임을 노동자 각자에게 돌리고 하청과 외주로 분산시켜 노동의 가치, 아니 인간의 가치를 훼손하고 불안정하게 만든다.

 

“여자가 일을 잘하고 못하고가 중요한 게 아냐, 아직도 모르겠어?”

 

정은이 자신의 일을 혹은 ‘자리’를 찾지 못하던 처음 며칠, 남성 동료들은 작업장 구석 칸막이 옆에 조그만 책상을 배치해둔다. 이미 원청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뺏기고 사무실 바깥 복도 어딘가에 놓인 좁은 책상에 앉아서 일하던 그녀에게는 파견 명령을 받던 그 시간이 소환된다. 사무직 여성에게 현장직 남성들의 일이 주어질 리는 만무하고, 남성 동료는 자신들이 식사하고 난 자리를 치우는 것이 그녀의 일이라고 여긴다. 정은은 더욱 오기가 난다. 일을 주지 않는다고 지방노동위에 신고할 생각까지 한다.

 

성별에 따라 해야 할 일의 종류를 구분하려던 남성 동료들의 잘못된 인식만큼이나 견고하게 여성을 노동 현장에서 차별하는 것은 바로 노동의 환경 자체다. 여성 노동자의 신체 사이즈에 적합하지 않게 만들어진 작업복, 작업 도구, 그리고 송전탑에 오르는 발판 사이의 폭조차도 남성 노동자의 신체에 맞추어져 있다. 모든 것이 여성 노동자를 작업의 환경으로부터 배제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래도 여성이 한 걸음도 그 안으로 들어설 수 없도록 만들어진 강고한 남성 중심의 노동 환경은 정은의 끈질긴 노력과 동료들의 수긍으로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다.

 

“사는 게 그냥 알바에요”

 

동료 중 ‘막내’씨는 낮 시간에는 송전탑 관리 일을 하고 저녁에는 편의점에서 알바를 한다. 편의점이 끝나면 밤늦게 또 대리운전까지 한다. 아내 없이 딸 셋을 키우는 그는 적어도 쓰리잡 이상을 뛰고, 그러다보니 직장에 출근해서도 늘 피곤해 시간이 날 때마다 쪽잠을 잔다. 그런 것이 또 그의 근무평점을 낮추는 요인이 된다. 잠이 부족할 정도로 닥치는 대로 일을 하는데도 그의 삶은 풍요해지지 않는다. 아니, 이미 불안정한 삶 자체는 끊임없이 알바와 부수입을 강제한다. 사는 게 알바와 다름없다.

 

그런 막내씨가 두려운 것은 일하다가 죽는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이들이 무서운 것은 그나마 지금 있는 일자리를 잃는 것이다. “우리가 무서운 거는 해고예요. 해고되면 알바만 해야 되니까.”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끝나는 것보다도 견고한 직장 없이 불안하고 고통스런 삶이 지속하는 것이 더 공포스럽다는 것은 그것을 겪어 본 이들, 그것을 겪고 있는 이들, 혹은 그것을 곧 겪게 될 이들이기에 알 수 있는 것이다. 해고는 죽음이라는 것을, 죽음보다 더한 고통과 두려움이 따르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해고든 사망이든 그게 뭐가 달라요.”정은에게는 이미 해고된 동료를 잃은 경험이 있다.

de668331465c2d96afe580175c50735cd3c3e290.jpeg

 

“송전탑 위에서는 동료밖에 없어요, 동료를 믿어야지”

 

퇴근 후 편의점에서 늘 정은과 마주치던 막내씨는 원청의 실태 점검 평가 기간에 정은이 겪는 어려움을 알고 알바로 그녀에게 일을 가르친다. 평가에서 자신이 낮은 점수를 받고 해고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동료를 위해 시간을 내고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고소공포증을 약까지 먹어가며 극복해보려는 정은은 처음엔 송전탑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 숨이 막힌다. 처음엔 동료의 작업이 다 끝날 때까지 1미터도 올라가지 못했지만, 막내씨 덕분에 고소공포증도 극복하고 일도 배우면서 삶의 활기를 조금씩 찾아간다.

 

파견을 내려온 지 90일째 되는 날, 전기 작업을 하기 좋지 않은 흐린 날씨지만 응급상황이라 작업팀은 송전탑 작업에 나선다. 하지만 송전탑에 오른 막내씨는 그만 사고를 당해 사망하고 만다. 장례식장으로 걸려온 원청 동료의 전화는 근무평가가 낮은 막내씨만 제치면 정은이 계속 직장에 남아있을 수 있다고 전한다. 하지만 정은에게 그의 죽음은 경쟁자가 아니라 동료의 죽음이다. 동료의 죽음이자 나의 죽음이다. “우리가 제발 살 수 있게만 해달라”고 원청 관리자들에게 외치는 정은에게 파견이든 하청이든 구분은 의미가 없다. 오직 동료밖에 없다.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정전 때문에 장례식장에서 부패해가는 동료의 시신, 섬마을이라 가볍게 무시되는 전기의 혜택, 이런 문제들을 정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다. 그녀가 이미 해고되었다는 원청 관리자의 말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해고 통보, 만류하는 소장, 흐린 날씨, 바람에 흔들리는 송전선, 이 모든 악조건을 뚫고 혼자의 힘으로 송전탑에 올라 기어코 전선을 연결해낸다. 비록 그들이 나를 해고하더라도, 자신은 결코 스스로를 해고하지 않을 것이라는 저 굳은 결심.

 

통쾌한 복수나 반전을 보여주는 결말은 없다.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이 영화에는 정말 노동의 현장에서 발생 가능한 다양한 종류의 문제들이 말 그대로 종합선물세트처럼 들어있다. 민영화, 권고사직, 하도급 파견노동의 차별, 노동자와 노동자 사이의 무한 경쟁, 관리감독이라는 명분으로 이루어지는 본사의 갑질, 여성 노동(자)에 대한 왜곡된 인식, 불안정 노동으로 인한 불안정한 삶.

 

정말 당장 포기하고 싶을 만큼 노동을 둘러싼 모든 문제들이 나를 둘러싸고 옥죌 때에도 나는 나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정은에게서 강철처럼 단련되는 삶의 의지, 노동의 의지를 읽는다. 그리고 매일 아침 그들이 외치던 “우리는 생명, 우리는 빛”이라는 현장 구호는 노동과 삶의 가치를 스스로 드높이고 긍지를 갖게 만드는 주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동과 삶의 가치를 무너뜨리고 손쉬운 해고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들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는 동료들과의 뜨거운 연대처럼 송전탑을 통해 저 멀리까지 이어진다.

 

bccf2ef92d6ed6689507c5d3d5aff771399eea68.jpeg

 

 

Who's 김상민

profile
문화연구(조지메이슨대학교) 박사로 뉴미디어, 기술문화, 시각/영상문화를 주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디지털 자기기록의 문화와 기술』, 『전환기의 한국사회: 성장과 정체성의 정치를 넘어』(공저), 『데이터 시대의 언론학연구』(공저), 『불순한 테크놀로지』(공저), 『속물과 잉여』(공저) 등이 있고, 역서로 『하이테크네』(공역) 등이 있다.
Atachment
첨부파일

팀 블로그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들의 연합 블로그입니다

  1. profile

    지금은 없는 시민 (강남규)

    우리 연구소 강남규 연구원이 그동안 <경향신문>과 <미디어스> 등에서 연재한 칼럼에 기반해 단행본 책을 냈습니다. '끝내 냉소하지 않고, 마침내 변화를 만들 사람들에게'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지금은 없...
    Date2021.05.03 Category By문사연
    Read More
  2. 정치사회
    profile

    정치에 '쉬운 말'이 필요한 이유

    요즘 잊지 않고 챙겨보는 뉴스레터가 딱 하나 있다면 ‘뉴웨이즈’에서 보내는 뉴스레터다. 젊은 정치인을 발굴하고 키워내서 내년 지방선거에 대거 당선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비영리단체다. 이 단체는 뉴스레터 구...
    Date2021.04.29 Category정치사회 By강남규
    Read More
  3. 정치사회
    profile

    숫자 뒤에 사람 있어요

    백악관을 배경으로 하는 정치 미드 <웨스트 윙>에는 미국과 인도가 무역협정을 체결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미국은 이 협정에서 3만개의 고임금 일자리를 얻을 수 있지만, 그 대가는 1만7000개에 달하는 미국 내 개발...
    Date2021.04.29 Category정치사회 By강남규
    Read More
  4. 대중문화
    profile

    "해고든 사망이든 그게 뭐가 달라요" -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가 보여주는 노동의 모든 문제들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군가 늦은 밤 지방 소도시로 장시간 자동차를 운전해간다. 새벽녘 임시 숙소에서 전형적인 사무직 노동자의 복장을 한 여성이 빨대 꽂은 팩소주를 마시면서 절망인지 ...
    Date2021.04.14 Category대중문화 By김상민
    Read More
  5. 산업/정책/운동
    profile

    청계천·을지로라는 거대한 공장이자 시장: 서일엔지니어링과 만물제작소로 보는 생산 네트워크

    그림 산림동에 위치한 서일엔지니어링 입문 ⓒ최혁규 최근 방영을 개시한 드라마 <스위트홈>(2020)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어느 골방 기술자가 위기에 처한 아이들을 구하고 싶지만 별다른 무기가 없는 주인공에게 이...
    Date2021.04.04 Category산업/정책/운동 By최혁규
    Read More
  6. 정치사회
    profile

    국회의원들은 기록 없이 떠난다

    도널드 트럼프는 백악관을 떠났지만, 그의 이름은 후대 대통령들에게 반면교사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그의 퇴임을 사흘 앞두고 영국 언론 가디언이 보도한 내용도 좋은 사례다. 보존되어야 할 대통령기록물들을 트럼...
    Date2021.03.31 Category정치사회 By강남규
    Read More
Prev 1 2 3 4 5 6 7 8 9 10 ... 66 Next
/ 66

Recent Comment

@ 각 저작물에 대한 권리 또는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Developed and Published by APORIA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