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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하라, 노동이 아닌 것처럼 - 웹툰 정년이가 보여주는 예술노동의 명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잡지 <일터> 12월호에 연재 예정인 글입니다.
먼저 <오마이뉴스>에 실렸습니다. http://omn.kr/1q6iz
by 박범기 posted Nov 02, 2020 Views 87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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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게 또 있을까? 하지만 그렇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노동이란, 자신을 상품으로 환원하면서 자신을 파는 일에 다름 아니다. 예술은 자신을 표현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지만, 이러한 예술 행위 역시 스스로의 생계를 위해서 돈을 번다는 점에서 노동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동시에 예술은 자기표현이라는 점에서 노동으로서 쉽게 인정되지 않는다.

웹툰 <정년이>는 주인공 정년이가 국극배우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국극은 1950년대 크게 인기를 끌었던 대중문화 장르이다. 모든 배우가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는 국극은, 국악을 바탕으로 한 국악 뮤지컬로서 당대에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웹툰 <정년이>는 가상의 국극단인 매란국극단을 배경으로, 매란국극단에 소속되어 있는 배우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웹툰이 다루고 있는 이야기는 많지만, 이 글에서 초점을 맞추고 싶은 것은 웹툰 <정년이>가 그리고 있는 국극단의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예술노동의 형태에 대한 것이다.
 
임금으로 환산되지 않는 예술노동
 
정년이에게 있어 노래를 부르는 것은 무엇보다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다. 국극단에 들어가기 전, 정년이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면서 물건을 팔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정년이에게 있어 노래를 부르는 행위는 자기표현의 수단이기에 앞서,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정년이가 서울의 국극단으로 가게 된 이유 역시, 국극단에 들어가면 "돈을 가마니로 번당께"(3화)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주연배우가 되고, 인기를 모으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점에서 정년이는 국극단에 매력을 느낀다.

돈을 벌기 위해 국극단에 들어왔다는 점에서, 국극단 단원들은 정년이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그들에게 있어 국극은 예술 장르이고, 정년이는 그런 국극을 단순히 돈을 많이 벌기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단장은 정년이에게 "예술이 무언지 소리가 무언지 고민해본 적도 없는 놈이 돈을 벌겠다고 감히 매란국극단에 달려들어?"(3화)라고 면박을 주기도 한다. 모두가 자신에게 부정적이고, 배역을 받기 어려운 상황인데도 정년이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국극단에 남는다. 정년이는 국극단 단원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 노력하면서 조금씩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웹툰 <정년이>의 한 장면. 처음 국극단에 입단하는 정년의 마음을 보여주는 대목.
▲  웹툰 <정년이>의 한 장면. 처음 국극단에 입단하는 정년의 마음을 보여주는 대목.
ⓒ 웹툰 정년이

 

  
하지만 국극배우 지망생인 정년이가 당장에 부자가 될 수는 없었다.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도리어 돈을 써야 하는 상황에 닥치기도 한다. 연습복은 물론이고, 공연에서 쓰는 분장용 화장품, 붓 등도 개인의 돈으로 구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연구생들에게 '야참비'가 지급되긴 하지만, 그 돈으로는 화장붓 하나도 사지 못했다.

정년이는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다시 노래를 불렀다. 다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다방 아르바이트는 오래 가지 못했다. 다방에서 아르바이트 한다는 사실이 단장에게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단장은 "극단의 예인"이 다방에서 노래를 한다는 것에 반발한다. 단장은 예인이 되기 위해 국극단에 온 지망생들이 현재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고 강요하지만, 실상은 이들 대부분은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다른 노동을 병행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예술노동은 일정한 수준 이상의 성취가 담보되기 이전에는 노동에 대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 지망생들은 자신의 꿈을 위해 보상이 없음을 감내해야만 한다. 단원들에게 야참비 외에 다른 보상이 더 필요하다는 말에 단장은 "극단이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가르치는데 무엇이 아쉬워! 출연료라도 줘라, 그 말이냐?"(34화)라고 되묻는다. 주연 배우가 되어 무대에서 빛나고 싶다는 꿈을 위해, 대부분의 지망생들은 현재의 보상 없음을 감내하면서, 자신의 생계유지를 위해 다른 노동을 병행할 수밖에 없다.
 
예술노동은 재능 있는 이들에게만 허락된 것인가?
 
창작극 <자명고> 에피소드는 이 웹툰의 주된 축 중에 하나이다. 이 극을 쓴 극작가는 극의 배우들을 오디션을 통해서 뽑았다. 오디션은 누구에게나 기회가 균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기회는 균등하지 않다. 다만, 균등하게 보일 뿐이다. 매란국극단의 오디션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디션을 통해 실제로 뽑힌 배역들은 기존의 매란 국극단 주연의 라인업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 점에서 정년이의 짝선배이자, 정년이에게 조언을 해주며 정년이의 성장을 돕는 인물인 백도앵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도앵은 국극단의 주연이 고정되는 문제에 대해서 "재능은 본래 불평등한 법이야. 주연은 재능 있는 사람의 것이고."(31화)라고 말하면서, 주연이 고정되는 문제가 정당하다고 말한다.

사실 이 웹툰의 주인공인 정년이 역시 애초에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국극단의 일원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정년이의 어머니는 '하늘이 울린 소리꾼'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채공선이고, 정년이는 어머니의 재능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이 재능 때문에 정년이는 국극단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정년이는 애초부터 재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국극단 안에서도 나름 입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매란국극단 안에는 애초부터 재능이 있는 이보다, 재능이 없지만, 자신의 꿈을 위해 국극단에 들어온 이들이 더 많다.
 

 웹툰 <정년이>의 한 장면. 매란국극단 안에는 애초부터 재능이 있는 이보다, 재능이 없지만, 자신의 꿈을 위해 국극단에 들어온 이들이 더 많다. 촛불이 밝게 불탈 수 있게 해주는 수많은 예술노동자들을 응원한다.
▲  웹툰 <정년이>의 한 장면. 매란국극단 안에는 애초부터 재능이 있는 이보다, 재능이 없지만, 자신의 꿈을 위해 국극단에 들어온 이들이 더 많다. 촛불이 밝게 불탈 수 있게 해주는 수많은 예술노동자들을 응원한다.
ⓒ 웹툰 정년이

 

  
재능 있는 개인을 떠받치고 있는 수많은 촛대들
 
국극단의 세계는 수많은 지망생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촛대'라고 불린다. 재능 있는 개인이 자신의 재능을 드러낼 수 있는 것 역시, 재능 있는 이들을 떠받쳐주는 이들의 기반 아래에서만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이 웹툰에서는 무엇보다 엑스트라 혹은 조연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촛대들의 떠받침 아래에서 주연들의 재능이 부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촛불이 빛나기 위해서는 촛대가 필요하다. 이는 웹툰 <정년이>가 그리고 있는 국극단의 세계 뿐 아니라, 오늘날의 세계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빛나는 소수의 아래에는 빛나지 않는 수많은 촛대들이 있다. 촛대는 쉽게 눈에 띄지 않지만,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킨다. 수많은 예술 노동자들, 예술노동 지망생들의 노동은, 몇 몇 빛나는 스타들의 뒤에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의 노동은 대부분 노동으로서 셈해지지도 못하고, 보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빛나지 않는 오늘날의 촛대들의 예술노동을 응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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