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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

“우리 탓이야 우리가 만든 세상이야”

<미디어스>에 2020년 9월 17일 기고된 글입니다.
http://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3491
by 강남규 posted Sep 29, 2020 Views 241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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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드라마 <이어즈 앤 이어즈(Years and Years)>는 포퓰리스트 정치인에게 아무런 의심 없이 권력을 쥐어줬을 때 어떤 미래에 도달할지를 그린 디스토피아물이다. 드라마는 할머니를 구심점으로 한 4남매 중산층 가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결국 포퓰리스트 정치인이 총리직에 오르고, 영국은 끔찍한 감시사회로 접어든다. 

 

그 한복판에서 가족을 모두 모아놓고 할머니가 일장 연설을 펼친다. “잘못된 일은 모두 다 너희 탓이야.” 그게 어떻게 우리 탓이냐고 화를 내는 손주들에게 할머니는 ‘슈퍼마켓 계산대 여자’ 얘기를 꺼낸다. 그 여자들이 ‘자동 계산대’로 바뀌기 시작할 때 항의하거나 시위를 조직한 사람이 있었냐고 물으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이 지경으로 놔둔 거야. 실은 우리도 좋아해. 그 계산대를 좋아하고 원해. 거닐다가 장 볼 물건을 고르기만 하면 되거든. 계산대 여자와 눈 마주칠 일 없지. 이제 없어졌어. 우리가 없앴고 쫓아낸 거야. 그러니까 우리 탓이 맞아. 우리가 만든 세상이야.” (*번역은 왓챠플레이 공개판을 참고했다.)

 

‘슈퍼마켓 계산대 여자’가 더 싸고 편한 것을 찾는 소비자들의 적극적 방관 속에 어느새 ‘자동 계산대’로 대체되어 없어지고 쫓겨나는 이야기. 할머니의 말엔 드러나지 않지만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현명한 소비의 논리가 사회를 잠식하는 게 ‘발단’이라면, 현명한 소비자이지만 동시에 노동자이며 시민인 우리 자신까지 조여 오는 게 ‘전개’이고, 모두가 현명한 소비자가 되어버린 까닭에 서로를 돕지 못하고 제각각 없어지고 쫓겨날 위험에 처하는 것이 이 서사의 ‘위기’에 해당한다. 

 

코로나19는 우리가 각자도생 대신 시민적 연대의식으로 무장할 때라야 이 전대미문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보여주고 있지만, 다른 영역에서 우리는 여전히 시민적 연대가 아닌 ‘현명한 소비자’의 위치에 서 있다. 택배노동자 처우 개선, 도서정가제 개정 등의 문제에서 그렇다.

 

최근에 전북 익산 지역 CJ대한통운 택배기사들이 고객들에게 보낸 ‘배송지연에 따른 사과문’이 화제가 됐다. 전국택배노동조합 호남지부가 순차적 파업에 돌입하면서 배송지연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파업에 돌입한 것은 잇따른 택배기사들의 과로사에 대한 대책마련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택배의 중요한 공정 중 분류작업이 있는데, 택배사는 인건비 절감을 위해 별도의 작업자를 두지 않고 택배기사에게 업무를 시키고 있다. 

 

택배업계는 업계 경쟁과열로 택배비 인하 경쟁이 일어났고, 이에 따라 노동자를 추가고용하거나 처우를 실질적으로 개선할 만한 여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택배기사의 노동환경을 개선하려면 택배비를 현실적인 수준으로 인상해야 하는데 그걸 소비자가 감내하겠냐는 얘기다. 물론 이러한 논리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업체들의 회계 자료를 들여다봐야겠지만, 택배비가 수년간 인상되지 않다가 2019년에야 CJ대한통운의 주도로 소폭 인상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다수 시민들이 현명한 소비자로서 판단하는 게 아니라 동료 시민으로서 자신의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올 11월 일몰을 앞둔 도서정가제의 개정 논쟁도 마찬가지다. 전국 100여개 서점주들이 모인 ‘전국동네책방네트워크’의 성명서는 현명한 소비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도서정가제를 없앤다면 출판사들은 책 가격을 높일 수밖에 없고, 힘없는 출판사들과 동네책방이 줄폐업하고 도산하게 될 것이다.” 현명한 소비가 도리어 소비의 대상을 사라지게 만든다는 얘기다. 

 

“도서정가제는 불완전하지만, 그나마 그런 안전장치 덕분에 서점·출판사를 차리는 청년 창업이 늘고 독립서점이 전례없이 증가하며 풍성한 책문화를 만들 수 있었다.” 실제로 도서정가제 시행 전후 독립서점의 수가 크게 늘었고, 이를 거점 삼아 지역 단위 문화활동이 활성화돼 왔다. 법에 의해 강제된 측면이 있긴 하지만, ‘손해 보는 소비’가 궁극적으로는 사회를 건강하게 변화시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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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정가제 개악 반대 참여서점 스틸컷 모음 [부산 동네서점 비상대책위 제공=연합뉴스]

 

택배비‧배달비 인상과 도서정가제 같은 문제들은 우리를 시험대에 올리고 질문을 던진다. 결코 소비의 문제로만 환원될 수 없는 이슈들에 대해서 소비자와 시민이라는 공존하는 두 가지 태도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에 관한 질문이다. 우리가 불편하고 손해를 봐야 지속될 수 있는 노동과 문화가 존재하고, 노동과 문화가 지속돼야 그것의 편익을 누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까. 이것은 사회적 연대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건강한 순환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당장은 사람을 쥐어짜서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슈퍼마켓 계산대 여자’들이 그렇듯이 그것은 언젠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경로다.

 

“우리가 없애고 쫓아냈다”고 할 때 그것은 죄를 추궁해 벌을 주자는 게 아니다. 현명한 소비는 불법이 아니고, 우리는 사람을 쥐어짜서 돌아가는 자본주의 구조의 주범이 아니다. 사과를 요구할 일도 아니다. 다만 지속 불가능한 체제가 지속되는 것을 방해하지 않은/못한 ‘사회 구조의 동참자’로서 최소한의 책임감과 부채감을 가져야 한다는 윤리의식에 대한 얘기다. “우리 탓이 맞아. 우리가 만든 세상이야.” 그리고 함께 이 구조 속에서 벗어나오자고 조심스럽게 권유하는 정치에 대한 얘기다.

 

물론 택배비 인상과 도서정가제의 이득이 대기업이나 자본이 아닌 노동자와 서점에 온전히 돌아갈 수 있도록 기업을 감시하고 법‧제도를 보완하는 일은 정치의 역할이다. 그러나 정치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은 시민의 역할 아닐까. 소비자이자 시민인 우리가 앞서 정의로움을 요구하지 않는 한, 지지율만 바라보는 정치는 웬만해선 따라오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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