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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논문

팬데믹이라는 정세 : 쇼크 독트린인가, 커머닝인가

『문화/과학』 103호(2020년 가을호)에 실린 글입니다. 해당호의 특집 주제는 '코로나19의 문화정치'입니다.
사정상 전체 글 중 일부만 공개합니다.
by 김성윤 posted Sep 10, 2020 Views 166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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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이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다. 아무리 가까운 시점이라 하더라도 사건의 향방을 가늠하려면 확대해석이나 과소평가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런 한계를 감안하면서 다음의 세 가지 원칙들에 준거하여 코로나 이후의 사회변동에 대한 토의를 시작하도록 하자.

 

  • 하나,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 삶의 양식이 질적으로 바뀔 것이라 예측할 수 있다. 반대로 그런 예측은 과장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의 삶은 그 어떤 것도 바뀔 게 없다고 단언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단서가 있다면,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쏟아냈던 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현재 시점의 예언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구성해내는 집합적 힘이 된다는 사실이다. 또한 미래에 대한 그와 같은 기대들을 통해 우리는 현재를 인지할 수 있다. 담론적 실천들은 사회변동의 맥락과 연결되면서 일종의 자기실현적 예언의 성격을 내포한다.
     
  • 둘, 그 어떤 사태든 단일한 원리로 이뤄지는 법은 없다. 지구에 운석이 떨어진다든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신적 개입이 있지 않는 한, 우리가 경험하는 변화들은 앞선 시기에 존재했던 모순들과 사건들이 과잉 결정되는 과정이자 이미 그렇게 된 결과다. 하나의 사건이라 할지라도 역사적 추이, 구조화된 관행, 인위적 개입이 교차하면서 복잡성의 구도를 띨 수밖에 없다. 사회의 분화가 진전될수록 역사에 대한 단순 명쾌한 해설은 점점 더 불가능해진다. 과잉 결정의 구도는 우리가 경험하는 사회변동이 주어진 역사적 조건 위에서 전개되며 따라서 현재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볼 때에는 부득불 구조의 우위라는 맥락으로 출발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 셋, 월러스틴은 다음과 같은 구절과 함께 『근대세계체제』의 서술을 시작한 바 있다. “모든 것은 변한다.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1] 사회변동에 있어 이 모순을 이해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구조라는 것은 분석의 범주와 단위를 어떻게 둘 것인가에 따라 장기간에 걸쳐 안정적인 속성을 갖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와 동시에 생성-발전-소멸의 시간성을 지니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회변동을 이해한다는 것은 재생산과 변형을 동시에 포착하는 일이기도 하다. 구조의 가변성과 항상성이라는 양면적 성격은 우리가 조우하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 사건들이 어떠한 정세적 효과를 수반하는 것인지를 주목하게끔 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코로나19 이후로 세계의 문법이 급격히 전환될 것으로 전망하곤 한다. 그러나 무엇이 착시이고 무엇이 현시인지는 불분명하다. 거리와 객석의 텅 빈 광경, (수치와 그래프의 과잉 표상에 비해) 실재하는 고통의 과소한 재현, 그리고 질병 자체의 차별적 증상 등등으로 인해 지금 일어나는 변화의 무쌍함을 시지각적으로 알아채기는 매우 어렵다. 실제로 우리가 인지하는 수준 이상으로 세계는 더 크고 더 많은 변화를 동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반대로, 어쩌면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물질성이 사회변동의 동인이라는 관점은 과장된 것일 수도 있다. 사실 팬데믹의 효과에 관한 많은 언급들은 비교적 익숙한 것들이기도 하다. 우리는 코로나 블루가 아니어도 늘 우울했고 언택트가 아니라 해도 고립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뉴-노멀 운운하지 않더라도 삶의 전환적 문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팬데믹 자체는 트리거일 뿐 대단한 계기는 아닐 수도 있다. 격발된 탄환이 돌아올 수 없는 것처럼 어떤 추세를 회귀 불가능한 수준으로 그리고 가속적으로 몰아넣고 있을 뿐이다. 착시와 오판 그리고 간과의 가능성은 늘 존재한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이와 같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정세에 개입하고 세계를 변형하려는 움직임은 늘 있어왔다. 에이즈 시대에는 사회 전반이 보수화될 때 HIV 환자나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에 대한 저항으로서 예술가들(로버트 메이플소프, 키스 해링, 펠릭스 곤살레스-토레스 등)은 액티비즘과 양식적 혁신을 추구했다. 그렇지만 오늘날 (게다가 포스트-아방가르드 시대에) 우리가 코로나19라는 새로운 물질을 통해 위험하고 새로우며 동시에 신뢰할 만한 감각의 새로운 단초를 마련할 수 있을지는 감히 예단할 수는 없다. 물론 신유물론적으로 물질의 구성과 분포를 재상상하거나, 기존의 관성적 관심사들(빅브라더와 감시)을 계승하거나, 아니면 동시대의 생존주의적 요청을 조명하는 시도들이 가능하겠지만, 여기서 진정으로 새로운 문제가 발굴될 것이라는 확신은 아직 생겨나지 않는다. 아마도 당분간은 이 바이러스가 은유하는 것처럼 꽤 오랜 잠복기를 거쳐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코로나19와 사회변동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준별해낼 진단 키트가 여전히 마련되어 있지 않다.

 

결국 우리는 동일한 질문으로 되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팬데믹이라는 정세와 더불어 권력의 형세는 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 말이다. 그것은 통념 그대로 초월적 권력에 관한 것일 수도, 푸코주의적으로 편재적이고 생산적인 권력에 관한 질문일 수도 있다. 그 사이에서 한없이 지연되고 있는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해방주의적 전망은 팬데믹과 더불어 어떤 도정을 밟고 있는 것일까. 경제학적 사안들 역시 고려해야 한다. 자원의 불합리한 배분과 더 많은 축적을 위한 몸부림 위에서 평등한 세상이라는 변혁론적 전망은 팬데믹과 더불어 어떤 좌표점 위에 위치하게 되는 것일까. 또한 이 모든 사안들에 근간이 되는 대중정치적 상황도 마찬가지다. 여론, 세계관, 입장, 이념, 이데올로기 등등 그 무엇이라 부르든 정치적 감각이라는 것의 향방은 어쩌면 가장 중요한 질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원칙적 입장들과 문제의식 위에서 이 글은 코로나19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몇몇 정세적 상황들을 다루고자 한다. 이들 사안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정도의 관심사를 통해 검토된다. 첫째, 방역 시스템은 표면적으로 바이러스의 박멸을 목적으로 하지만, 사회적 안전이라는 목표는 경제적 순환이라는 목표와 모호한 역관계를 이루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이 사이에서 가동되는 정치적 합리성의 실천들을 통해 드러나는 것과 드러나지 않는 것을 비판적으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비상사태의 창출은 정치적으로 주권권력의 발동을 자극하는 듯하지만 지역적으로 편차를 보이기도 한다. 또한 경제적으로 재난 자본주의적 상황이 창출된다는 점을 짐작할 수도 있다. 여기서 국가권력과 시장권력 그리고 사회권력 사이의 긴장을 읽어내는 것은 필수적이다. 셋째, 이미 몇몇 논자들은 민중들로부터 공통적인 것의 요구를 읽어내는 의미화 작업을 전개하고 있는데, 이러한 요구들이 사실은 공적인 것 및 공통적인 것을 아우르며 비교적 불균등하게 출몰하고 있음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중정치적 상황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해답이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변인이자 질문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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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회적 신체의 재상상 : 바이러스와 더불어 사는 삶

 

팬데믹은 어떤 변화를 확정적으로, 불가역적이게끔 만드는 힘을 가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징후적인 것은 사회를 상상하는 방식의 변화가 마침내 종장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한동안 우리는 사회 혁신 운운하면서 어떤 다른 관계가 가능할 것이라 상상해왔다. 고립되지 않은 친밀한 관계, 공동체적 억압 없는 평등한 관계, 국가폭력 없는 시민적 관계, 시장경제로부터 방어 가능한 상호부조적·사회보장적 체계 등등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적 세계를 다시 설계할 수 있다는 믿음이 구체화되던 참이었다. 사회를 설계한다는 것은 말 자체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어떤 식으로든 전체화라는 형식을 빌릴 수밖에 없다. 다소 전향적인 맥락에서 어소시에이션, 그리고 그에 반해 연성화된 뉘앙스를 풍기는 네트워크 같은 기표들이 그와 같은 대안적 전체화의 구도를 표상하는 것들이었다. 이론적으로야 대문자 사회의 불가능성이 폭로된 지 한참이지만, 정작 사회 형식 내지 공동체 형식 없이 인간적 삶을 영위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사회를 재상상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요청될 수밖에 없는 논점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팬데믹은 사회에 대한 병리학적 은유를 다시금 부추기고 있다. 의학적 지식의 발전과 함께 사회를 하나의 신체로 상상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게놈 단위로 바이러스의 실체를 추적하는 오늘날에 이르면 사회라는 신체는 이전과 필경 다른 언어를 통해서 포착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사회에 대한 상상은 팬데믹과 함께 모종의 형질 전환을 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테일러의 표현처럼 한동안 사회에 대한 근대적 상상이 시도되었다고 한다면,[2] 코로나19는 오늘날 우리가 사회를 어떻게 포스트모던하게 상상해야 하는지 나아가서는 사회를 어떻게 포스트모던하게 관리해야 하는지를 짚어주는 본격적 계기가 되고 있다. 거칠게 말해, 재래의 병리학적 은유가 사회적 신체로부터 증상을 진단하고 이에 대한 외과적 처방을 통해 환부를 처치하는 봉합(suture)의 방식으로 정상적 신체의 회복을 꿈꾸었다면, 후기자본주의가 됐든 포스트모더니티가 됐든 달라진 세계에서의 은유는 진단-처방-처치의 절차들을 다소간 다른 방식으로 개정한다. 즉 진단은 오늘날 대개의 의료 행위가 그러하듯 일련의 과학기술적 절차들을 통해 구성되고 정당화되며, 의료 종사자들 사이에서 합의된 매뉴얼과 전문가적 소양을 통해 처방이 이뤄지고, 동원 가능한 모든 분과적 기법과 수단들을 통해 신체는 회복되고 점점 더 수명은 길어진다.

 

(중략)

 

2. 경제적 자유주의,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전체주의

 

성공적인 통치술이라는 것은 사실 이상주의적인 상황을 창출해내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의 방역 체계가 서구 자본주의 지역들로부터 주목받은 이유도, 정확하게 말하면 바이러스 박멸 때문이 아니라 바이러스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박멸이 아닌 통제란 다른 게 아니다. 감염 확산을 억제하고 치명률을 유의미한 수준으로 줄이면서도 동시에 총선을 치뤄내고 식당에 사람들이 바글거릴 수 있게 하는 어떤 통치적 역량이야말로 관건인 것이다. 성공 비결이라는 것은 실제로 좋은 시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로 하여금 지금이 좋은 시절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 즉 위기관리 능력에 대한 신뢰를 사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시소 위에 올라타 있다. 코로나19에 대비해서 각종 봉쇄 조치를 취하면 코로나 블루에 빠지고, 그렇다고 해서 봉쇄를 완화하면 바이러스가 전파될 수밖에 없다. 상황은 양자택일을 강제하는 듯하다. 활성화냐 안전이냐. 한국처럼 무역과 관광 등 대외 의존도가 높은 상황이라면 이런 고민은 더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안전을 택하면 안전이 위협받고 활성화를 택하면 거꾸로 초토화될 수도 있는 역설까지 도사리는 마당이다. 그 위에서 규범적 균형을 찾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많은 사람들은 팬데믹이 산출하는 직접적인 결과가 무엇인지 궁금하겠지만, 비상사태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여러 선택지들 사이에서 최적화된 방식을 찾아내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어렵게 된 상황, 즉 오페가 이야기했던 위기관리의 위기라는 상황이다.[3] 팬데믹으로 인해 오늘날 국가들의 대다수는 행정적 합리화, 재정적 조달, 상징적 동원 등 다양한 방면에서 또 다른 균형점을 찾아야 하는 통치 불가능 상태에 처하게 됐다. 그리고 사회적 신체에 관한 신화를 공유하거나 이를 얼마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입장을 가진 대다수 구성원들 역시도 이 같은 난처함에 공감하면서 무엇이 최선의 길인지를 두고 당분간은 갑론을박에 휩싸일 수 밖에 없다. 예컨대 세밀한 사회공학적 지식을 요하는 최적화의 답안을 얻어내기 위해 국가기구는 다양한 견해와 가치 체계를 지닌 전문가 집단을 초청해서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정치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갈등관리라는 명목으로 시민들의 여론 동향을 부단히 살피며 어디에도 중심을 잡지 못한 채 갈지자 행보를 그릴 수도 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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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지없는 ‘쇼크 독트린’

 

팬데믹 상황에서 어떤 것들은 곧잘 드러나지만 또 어떤 것들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바이러스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말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표면적으로 이 말은 계급적 위치에 상관없이 누구든 감염의 위험이 있으니 조심해야 하며 나아가서는 지역과 국가를 막론한 문제이니 (코로나19의 원흉으로서) 중국인이나 아시아인을 차별하지 말고 ‘한배를 탔다’는 인식을 가지라는 뜻이다. 당연히 대강의 취지는 알아들을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동의하기 어렵다. 이런 말들은 이번 사태의 위험성이 모든 이에게 마치 평등하게 나타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수사는 수사일 뿐 그 자체가 진실이 될 수는 없다. 바이러스 앞에서, 그리고 코로나19라는 사태 앞에서 우리는 정말 평등할까? 단적으로, ‘꼰대 제거제(boomer remover)’라는 불쾌한 농담이 퍼질 정도로 연령과 건강 상태에 따라 증상은 차별적으로 나타난다. 바이러스가 모든 인체에 평등하게 침투할 수는 있겠으나, 바이러스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명제는 원칙적으로 성립이 안 된다는 방증이다. 에볼라 바이러스 때와 비교하자면, 전염병 앞에서 모두가 똑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은 위선적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인류가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배’를 탔다는 인식이 지나칠 정도로 확산되는 감이 있다. 물론 보건위기가 지구적으로 ‘고르게’ 확산되기는 했지만, 우리는 바이러스 문제를 ‘불평등’ 문제와 더 많이 연결시켜야 한다. 어떤 격언처럼 진짜 도둑은 위기 때야말로 활개를 치고 커다란 이득을 얻기 때문이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의 우석균 대표는 “K-방역 신화는 디지털 감시와 공무원, 역학조사관 들의 노력을 갈아넣어서 이뤄낸 성과”라는 흥미로운 인터뷰를 한 바 있다.[4] 그의 판단은 한국적 시스템이 성공적으로 보이는 듯한 모습이 ‘권위주의 멘탈리티’에 기반한 디지털 감시와 복종 덕분이라는5한병철의 지적과, 그에 대항해 “정부에 의해 동원된 저임금 공공의료 노동자들과 공무원들 때문”이라는 이택광의 비판을 종합한 듯한 언사로 들린다.[5] 물론 여기서 우리는 한병철의 지적을 간과하지 않되 이택광의 비판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6] 예컨대 K-방역에서 디지털 감시가 그렇게 결정적인 것일까. 그보다는 휴게시간과 휴일을 반납하고 감염 의심자를 하나하나 추적하고 다니는 일선 공무원, 그리고 방역 관리 최전선의 영웅으로 묘사되며 초과노동을 감내하는 의료진 등이야말로 더 결정적인 것은 아닐까. 마치 플랫폼 비즈니스의 핵심이 디지털 기술의 발전보다 실상은 월스트리트의 유휴자본 투자 그리고 플랫폼 노동자에 대한 강탈적 착취에 자리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중략)

 

4. 어떻게든 위기를 관리하기

 

이번 계기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것은 순수한 프롤레타리아 내지 순수한 민중이라는 형상은 성립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앞서 이야기한 변형된 전체주의, 전(前) 자본주의적 자본주의, 전용되는 공공성 등의 쟁점을 두고 섣불리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과정에 있어 대중들은 단순히 적들의 책략에 잠시간 속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와 같은 곡절에 동참하는 존재들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대중정치’라는 언표는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선동적 정치와 대중이 주체가 되는 저항적 정치뿐 아니라, 오늘날 참여의 시대에 와서는 대중들 그 자신이 정치의 주체이자 대상이 되는 또 하나의 의미를 확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때의 정치란 어떤 본질주의적 의미도 갖지 않는 것으로서 고전적 의미에서 대항적 운동일 수도, 안타까운 퇴행일 수도, 이 양극단을 끝으로 하는 선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제3의 몸짓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전제를 공유함으로써만 현재 일어나고 있는 대중정치의 감각과 지형에 비로소 접근할 수 있다.

 

(중략)

 

물론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에서는 이 모든 초점들이 파편화되어 나타난다. 다중-스케일의 지구적 사건들이 발발하는 와중에 정세를 식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가 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하던 K-방역의 한계라는 것도 맨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2차 유행이 현실화되면서 그동안 K-방역 ‘국뽕’에 취했던 사실이 민망해지고 있다. 정보인권을 비롯한 기본적 권리의 행사가 불가능해지면서 ‘사람이 먼저’라는 구호가 한없이 초라해지는 상황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조국 사태 및 부동산 대란 등 정상국가의 비전과 경제적 풍요의 약속이 좌절되면서 ‘이게 나라냐’던 조롱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오고 있다.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공적 체계에 대한 요구가 유래 없이 고조되고 있지만 이를 실행할 국가적 리더십이 실추되고 있는 상황이라면 말이다. 더 두고 보기는 해야겠지만,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도 우리는 새로운 규범적 균형을 찾아내야 하는데 다행히도 팬데믹은 새로운 기회구조를 개방시키면서 우리를 또 한 번의 시험에 들게 하고 있다.

Notes

  1.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I』, 나종일 외 옮김, 까치글방, 2013, 15.
  2. 찰스 테일러, 『근대의 사회적 상상』, 이상길 옮김, 이음, 2010, 112.
  3. 클라우스 오페, 「위기관리의 위기: 정치적 위기이론의 요소들」, 서규환·박영도 옮김, 『국가이론과 위기분석』, 한상진 엮음, 전예원, 1988.
  4. 정대희, 「“K-방역 성공했지만, K-의료는 실패… 코로나 중환자실 100개 정도에 불과”」, 〈오마이뉴스〉, 2020. 7. 20.
  5. 이택광, 「순수한 상호공생의 이론적 근거: 슬라보예 지젝과 한병철의 논쟁에 대해」, 강영민 옮김, 〈Fabella〉, 2020. 4. 25. http://fabella.kr/xe/blog1/83886 원문은 Alex Taek-Gwang Lee, “On The Rationale Of Pure Mutualism: An Intervention Into The Debate Between Slavoj Žižek And Byung-Chul Han,” Fall Semester, April 14, 2020. https://fallsemester.org/
  6. 한병철은 중국 모델에 대한 전 세계적 모방으로 인해 디지털 경찰국가의 도래를 염려하는데, 전술했던 것처럼 경제적 자유의 보전이라는 한국 모델의 정치적 합리성은 중국 모델과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며 적어도 서구 자본주의 지역에서는 중국보다는 한국적 모델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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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및 운영위원입니다. 주전공은 사회학을 하고 있고 최근에는 플랫폼 자본주의, 도시재생과 민주주의 등의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시간이 나는대로 연구소 홈페이지에 들러서 이용자 여러분들과 교감하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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