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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을 잃어가는 시대

경향신문에 2020년 8월 18일에 연재된 글입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8180300055&code=990100
by 강남규 posted Aug 20, 2020 Views 129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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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미투 운동’이 전개되던 어느 날, 친한 선배가 말했다. “산다는 건 스승을 잃어가는 과정인 것 같아.” 스승이라 여겼던 이들이 가해자로 밝혀지고, 선배로 여겼던 이들이 그들을 두둔하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온 말이다.

 

2019년 8월9일 차기 법무부 장관으로 조국 전 민정수석이 지명된 날로부터 1년이 지났다. ‘조국대전’으로 시작되어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피소 사건으로 끝나가는 1년이다. 그사이에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여러 일들이 있었다. 1년의 시간을 더 살았기 때문일까. 그동안 나를 포함한 젊은 진보주의자들은 또 많은 스승과 선배들을 잃어버렸다.

 

스승과 선배들은 종종 거침없었다. 조국 전 장관·박원순 전 시장 두 사람의 일은 적어도 법리적으로는 아직 ‘미확정된 사실’이었지만, 그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던진 말들은 ‘확고한 의견’이었다. 도덕적이지 않지만 불법이 아닌데 뭐가 문제냐고 하는 사람들,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이 그렇게 죄가 되냐는 사람들을 매일같이 마주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내가 스승이라 여겼던 사람들이었고, 어떤 사람들은 진보주의의 선배라고 여겼던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잃어버렸다.

 

“성적인 농담도 할 줄 모르던 그가 성폭력 가해자가 된 사실을 아직은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했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가 SNS에 올린 글이었다. ‘2차 가해’라는 비판이 일었다. 며칠 뒤 그는 그의 책이 ‘세종도서’에 선정됐다는 평범한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거기에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어용 지식인’, ‘2차 가해자’ 김동춘 아직 덜 죽었나 봅니다.” 나는 그의 글로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키워왔고, 대학에서 활동할 때 그를 초대해 특강을 열었던 적도 있다. 나는 그를 잃어버렸다. 성공회대 출신 제자들은 그의 글을 보며 당황해했다. 정말로, 산다는 건 스승을 잃어가는 과정인 걸까.

 

박원수 후보 교수·지식인 지지성명 발표 - 중앙일보

출처 : 뉴시스

 

젊은 제자들이 마지막 애정으로 그들에게 진심 어린 댓글을 남겼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니 젊은 세대끼리의 대화에서는 “더 이상 믿을 어른이 없다”는 말이 수시로 나온다. 어떤 스승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면 지난 1년 사이에 그가 무언가 이상한 말을 하지는 않았는지를 서로 확인한다. 누군가를 교육행사에 강사로 모시려고 해도 우선 그의 SNS를 염탐하며 지난 발언과 행적들을 조사한다.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가 이렇게 갈라지고 있다.

 

스승들은 왜 그들이 가르친 것과 정반대로 실천한 걸까. 결국 거기에 정의로움과 옳음보다 단단한 연(緣)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이 들 때면 허탈하다. 서울대에서 함께 공부하고 운동했다는 인연(조국), 시민운동을 함께한 인연(박원순) 따위가 스승들의 지성을 가로막은 탓에 믿어왔던 가치와 실재하는 피해자보다 당사자를 향한 연민이 먼저 작동한 것은 아닌가. 그러나 박원순 전 시장과 28년 동지였던 정춘숙 의원이 시사IN 인터뷰에서 자신의 ‘내적 분열’을 고백하며 “박원순을 빼고 봐야 보인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듯, 나의 스승들도 언젠가 “○○를 빼고 봐야 보인다”는 걸 깨달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여전히 우리 세대에겐 배울 사람이 필요하기에 그렇게 믿는다. 하지만 이제는 스승을 찾기보다 동료 시민을 찾겠다. 동료 시민으로서 예의와 윤리를 다하지 않는 자에겐 배울 것이 없다. 떠나간 스승들이 동료 시민으로 내 옆자리에 돌아와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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