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사단법인 문화사회연구소사단법인 문화사회연구소

정치사회

‘산재공화국’ 노동자에게 필요한 뉴노멀은 따로 있다

경향신문 2020년 4월 27일자 지면에 기고된 글입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2004272041025
by 강남규 posted May 28, 2020 Views 1588 Likes 0 Replies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Extra Form

코로나19가 휩쓴 세계에 ‘뉴노멀’이 등장한다고들 한다. 뉴노멀은 본래 경제학에서 쓰는 말로, 특정한 경제위기가 나타나면 그 이전의 표준이 무너지고 새로운 표준이 등장한다는 뜻이다. 전문가나 언론은 코로나19 이후의 세계에서 재택근무나 화상회의의 일상화가 뉴노멀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 시대를 미리 준비해서 앞서가라는 제언과 함께.

 

여기 전혀 다른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코로나19 이전과 별 다를 바 없는 일상을 산다. 이들의 노동은 재택근무가 불가능하고 화상회의도 무의미해서, 이들은 마스크 한 장에 의지한 채 일터로 나가 일을 해야 한다. 이들은 ‘사무실’이 아니라 ‘현장’으로 출근한다. 현장에 나가지 않는다는 것은 일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일하지 못한다는 것은 돈을 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뉴노멀은 남의 나라 이야기다.

 

‘산재공화국’ 한국에서 이런 종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노동건강연대가 각종 자료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올해 초부터 지난 4월15일까지 노동자 177명이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었다. 죽음의 경위는 저마다 다양하지만 죽음을 막지 못한 이유는 대체로 비슷하다. 이윤을 보채느라 안전에 돈을 쓰는 대신에 사람을 밀어 넣은 곳에 죽음이 솟아났다.

 

코로나19로 사망한 사람들의 소식은 속보로 알려지지만, 산업재해로 사망한 사람들의 소식은 건조하고 짤막한 단신 정도로 기록된다. 한 줄 기사라도 나면 차라리 다행인 수준이다.

 

2019년 산재 사망자 2020명, 하루에 5~6명꼴이다.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는 일은 한국에서 너무나 노멀한 나머지 ‘새로운 사실’로서 뉴스가 되지 못한다. 혹은 누군가의 말처럼, 사람들은 산재가 자신에게 ‘전염’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l_2019112101002507300197941.jpg

 

하지만 오늘만은 여러 신문 지면에 산재 사망자들의 이야기가 실릴 것이다. 오늘은 4월28일, ‘세계 산재 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이다. 오늘만이라도 산재 실태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산재를 추방하는 날이 조금이라도 앞당겨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많은 기자와 필자들이 날카로운 기사와 귀중한 글을 쏟아낼 것이다.

 

그들에 비하면 내게는 더 나은 글을 쓸 지식도 경험도 실력도 없으나, 하필 오늘 이 지면을 채우게 된 자의 책임으로 이 글을 쓴다. 그런데 무엇을 쓸까 한참 고민해 봐도 얹을 만한 새로운 이야기는 떠오르지 않는다. 산재가 반복되는 원인이 무엇인지, 더 이상의 죽음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글은 이미 충분히 많다. 너무 오랫동안 너무 많은 죽음이 있어 왔기 때문이다.

 

작가 김훈은 2019년 11월25일 경향신문에 특별기고한 글에 이렇게 적었다.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넘치되, 그 능력을 작동시킬 능력이 없으니 능력은 있으나 마나다. 능력을 작동시킬 능력이 마비되는 까닭은, 이 마비가 구조화되고 제도화되고, 경영논리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깔끔하게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다시 한번 구호를 외치겠다. 지금도 거리에서 유가족과 활동가들이 목이 찢어져라 외치고 있을 구호들이다. 산재는 살인과 다를 바 없다.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 현장은 노동자가 가장 잘 안다. 노동자의 작업중지권을 보장하라! 규제만 지켰어도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산업현장 안전규제 대폭 강화하라! 기업 처벌 강화가 안전 강화의 지름길이다. 중대재해 기업처벌법을 제정하라! 위험의 외주화를 금지하라!

 

누군가들은 이 같은 요구들이 ‘비현실적’이라고 비아냥거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2020년에도 ‘죽지 않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바라야 한다는 것이 더욱 비현실적이지 않은가.

매년 2000명이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지긋지긋한 노멀은 이제 그만할 때도 됐다. 남의 나라 이야기 같은 뉴노멀 말고, 이들 노동자에게 절실한 뉴노멀을 기다린다.


팀 블로그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들의 연합 블로그입니다

  1. 정치사회
    profile

    기자들 눈에는 안 보이는 ‘청년’들

    90.9%. 무슨 숫자일까? 2018년도 기준 신문기자 중 대학 졸업 이상의 학력을 소지한 사람의 비율이다(2019 한국언론연감 자료 인용). 60.1%. 이건 또 무슨 숫자일까? 2016년도 2월 기준 방송기자 중 ‘SKY’를 졸업한 ...
    Date2020.07.21 Category정치사회 By강남규
    Read More
  2. 정치사회
    profile

    '등록금 반환 운동'이 던진 질문들

    코로나19 여파로 대학 교육이 전면 온라인 비대면화된 첫 학기가 끝나간다. 캠퍼스에 대학생들이 모이지 못한 결과로 대학의 많은 기능들이 중단됐고, 교육 기능만 다소 어설프게 작동했다. 별다른 이슈 없이 유야무...
    Date2020.06.23 Category정치사회 By강남규
    Read More
  3. 정치사회
    profile

    ‘오보 권하는 사회’를 넘어서려면

    일본군 ‘위안부’ 피해생존자 이용수 선생님의 5월 7일 기자회견 직후 한 달 조금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정의기억연대(정의연)에 관한 보도가 그야말로 홍수처럼 쏟아졌다. 의혹을 던지는 언론매체는...
    Date2020.06.22 Category정치사회 By강남규
    Read More
  4. 정치사회
    profile

    ‘일하는 국회’라는 도그마를 넘어서야 한다

    5월을 마지막으로 제20대 국회가 문을 닫고 제21대 국회가 열렸다. 이 분기점에서 언론들의 평가는 다음과 같이 요약되는 듯하다. 20대 국회는 역대 최악이었고, 21대 국회는 ‘일하는 국회’가 되기를 기대한다는 것. ...
    Date2020.06.03 Category정치사회 By강남규
    Read More
  5. 정치사회
    profile

    재난, 시스템 그리고 시민

    오는 6월이면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25주기를 맞는다. 거대한 재난은 수많은 관련자들을 만들어냈다. 생존자·유가족·자원봉사자 등 관련자들의 구술을 채집해 ‘사회적 기억’으로 엮은 책 <1995년 서울, 삼풍>을 읽다...
    Date2020.05.28 Category정치사회 By강남규
    Read More
  6. 정치사회
    profile

    ‘산재공화국’ 노동자에게 필요한 뉴노멀은 따로 있다

    코로나19가 휩쓴 세계에 ‘뉴노멀’이 등장한다고들 한다. 뉴노멀은 본래 경제학에서 쓰는 말로, 특정한 경제위기가 나타나면 그 이전의 표준이 무너지고 새로운 표준이 등장한다는 뜻이다. 전문가나 언론은 코로나19 ...
    Date2020.05.28 Category정치사회 By강남규
    Read More
Prev 1 2 3 4 5 6 7 8 9 10 ... 61 Next
/ 61

@ 각 저작물에 대한 권리 또는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Developed and Published by APORIA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