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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

생존의 민주주의, 그리고 청년

이 글은 오늘날 ‘N포세대’로 불리는 청년들의 이중적 정서구조에 주목하며 그 정치적 의미를 읽어내고자 시도한다. 청년들은 세계의 급진적 붕괴를 바라면서도 달관세대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안락을 추구하는 이중적인 정서구조를 내비치고 있다. 일견 상반된 이 두 가지 정서는 생존의 불가능성이라는 동일한 문제의식의 소산처럼 보인다. 그런데 생존의 문제를 천착하는 이 정서의 귀결이 탈정치화로 귀결될 것이라는 세간의 전망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여러 쟁점들이 내재되어 있지만 청년들의 공동체주의적 실천들 속에서 공적 감각 회복을 위한 실험들이 일어나고 있는 양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현시대에 거의 유일한 공감 감각의 회복 작업인 것은 아닐까. 대의를 잃어버린 시대에 청년들만의 독특한 민주주의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연상태로의 전락에 저항하는, 사회적 권리에 대한 집합적 요구로부터 출현하는 것일 수 있다.
― 『문화/과학』 95호(2018년 여름호)에 특집 기획으로 실린 글입니다. 기존의 강연문, 쪽글 등에서 공개했던 내용을 재구성해서 실었습니다.
by 김성윤 posted Oct 12, 2018 Views 3460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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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의 한 장면

 

 

“싸우자, 이곳은 우리들의 세계다”

 

일본의 어느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2012)에서 결코 등장하지 않는 주인공 키리시마는 누군가의 애인이었고, 친구 무리의 구심점이었으며, 배구부의 리베로이자 에이스였다. 그의 부재는 남겨진 친구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모두가 그를 찾기 위해 혈안이지만, 연락두절 두문불출 행방불명 상태다.


나는 이 영화를 포스트민족주의 시대의 알레고리로 읽는다. 고등학교에서 일어나는 겨우 몇 일 동안의 이야기이지만 ,청(소)년 모두의 이야기이며 차라리 우리 모두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집합표상이 사라진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적어도 영화 시작 직전, 그러니까 키리시마의 부재를 확인하기 전까지만 해도 학교의 모든 회로는 안정적으로 돌아갔다. 물론 모든 것이 순탄했다는 뜻은 아니다. 키리시마는 배구부원들을 다그친 바람에 원망을 사기도 했고, 모든 이의 삶 역시 언제나처럼 불투명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사라지자 거의 모든 이들이 불안을 호소한다.


우리의 존재론적 불안이 어디서 연원하는지는 다차원적이다. 동구사회주의 이후 미래의 좌표가 사라졌고 냉전 이후로는 공통의 표적이 사라지기도 했다. 그뿐일까. 암약한 신자유주의화로 인해 거의 모든 것이 불확실성 논리로 점철됐다. 그런 가운데 민족주의의 시효 마감은 지금 우리가 처한 현재적 좌표마저도 뒤흔들었다. 나는 어떤 존재일까. 무언가를 모델 삼아 나를 비춰볼 수도 없고, 누군가를 적대시해서 나의 자리를 확인할 수도 없다. 게다가 이제는 ‘우리’라는 동질성을 부여했던 최후의 끈마저도 풀려버렸다.


우리 시대 청년들의 비극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하는 것일지 모른다. 어른들은 말한다. 예전에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고. 물질적 풍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유무형의 폭력이 엄존했을지언정 적어도 그 시절엔 실존의 위기라는 건 상상키 어려웠을 테니 말이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걸까. 영화의 실제 주인공 기쿠치 히로키는 ‘shorai’(將來)라는 마크가 달린 야구가방을 메고 끝없이 방황한다. 우리는 무엇에 저항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B급영화 덕후 마에다 료야는 이렇게 읊조린다. “싸우자, 이곳은 우리들의 세계다. 우리들은 이 세계에서 살아가야만 하니까.”

 


인간성을 제거해야만 가능한 실존

 

그들에게 ‘세계’란 어떤 것일까. 어쩌면 세계라는 말을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덕후들에게서나 있을 법한 오글거리는 행위인 것 같기도 하다. 이따금씩 광장 같은 곳에서 혁명 같은 말들을 운운한다고 하지만, 그들이 이해하는 세계와 그곳에서의 정치적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언어에 얼마나 동의할 수 있는지 등등의 문제들은 고스란히 남는다. 일제강점기와 유신시대 그리고 80~90년대가 다르듯, 오늘날의 세계는 과거의 세계와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란 근대적인 정치 일반의 보편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특정 집단이나 개인이 요구하는 정치적 상상물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싸우자”라는 말을 단순한 허세로만 여겨선 곤란하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변동의 중심에 청년이 있기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관성일지 모른다. 그런데 오늘날 그런 역사적 청년이 가능한 것일까. 지난 십여 년 동안 숱한 청년 담론이 있어 왔지만 그럴싸한 답을 찾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1990년대 신세대 출현 이래로 청년은 소비 주체였고 경제 위기의 표상이었으며 이제는 별다른 의미도 없는 그저 특정 연령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20대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어느 설문조사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느냐는 질문에 1순위 대답은 ‘붕괴, 그리고 새로운 시작’이었다.[1] 산업화 시대의 ‘경제성장’도 아니고 사회과학 시대의 ‘민주화’도 아니며 문화의 시대에 제기된 ‘탈권위주의’도 아닌, 오늘날에나 찾아볼 수 있는 지극히 이례적인 소망이다. 청년과 정치라는 말은 그만큼 간극이 크다. 우리는 여기서 무언가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건져 올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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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만, <그녀의 몸빼>(162X130.3cm Oil on canvas), 2011


헤겔주의적 어법을 빌리자면 인간성의 상실이란 말이 가장 적합할지 모른다.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며 죽음을 견디고 죽음 속에서 버티며 그 속에 머무르는 삶은 기피 대상이 된 듯하다. 부정성과 조우해서 씨름하는 정신적 인간성은 점점 더 요원한 일이 되고 있다. 소비주의 시대에 청년은 동물이었고, 외환위기 이후에는 속물이었으며, 오늘날에는 일베를 비롯해 각종 혐오를 일삼는 괴물과도 같은 형상이 출몰할 지경이 됐다. 오늘날 청년들이 바라는 미래상이 정치 민주화도 그렇다고 경제발전도 아닌, 붕괴와 새로운 시작이라는 ‘리셋’이란 사실은 어딘가 씁쓸한 대목이다. [2]

 

‘헬조선’에서 태어난 이상 ‘이번 생은 망’했으니까 ‘우리의 소원은 이민’일 수밖에 없는 걸까. 단지 염세적이기만 한 건 아니다. 때때로 달관세대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다. ‘욜로’(you only life once)니까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해야 하고 재테크는 언감생심이니까 ‘탕진잼’하면서 노는 수밖에 없다. 오늘날 청년이라는 형상이 이 두 가지 극단점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쪽에서는 세계의 절멸을 바라고 다른 한쪽에서는 세계에서의 안락을 원하는. 어쩌면 이 두 가지 욕망이 갈지 자 모습을 하고 있는 Z세대의 현재를 가리키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정말로 우리는 역사의 끝자락에 와 있는 걸까. 오늘날 청년들에게 진정성이 소멸되고 동물·속물로 전락한 채 ‘생존’을 가장 큰 화두로 삼는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는 건 지극히 솔직한 반응처럼 보이기도 한다.[3]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안 해본 것 없이 거의 다 해본 어른들로부터 정작 아무런 유산도 물려받지 못한 세대. 그렇기에 그런 그들에게서 재래의, 기성세대가 알고 있던 언어로서의 역사의식을 기대한다는 것은 흔한 꼰대짓에 불과할지 모른다.


붕괴라고 하는 건 지금처럼 살기 싫단 의미와 맞닿아 있다. 이 세계를 당장 끝내버리고 싶다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흔히들 하는 얘기로 우리는 갈수록 더 나빠질 운명이다. 적어도 당분간은 그렇다. 출구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세계는 이미 붕괴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연령별 편차가 있을지언정, 대다수 청년들이 철들었을 즈음 대한민국은 이미 붕괴 상태였다. 어른들은 말한다.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기 위해 청년들 너희가 이 대한민국을 구해야 한다. 그런데 청년인 내가 여기서 어떻게 세계를 구하란 거냐, 하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무런 답이 안 나온다. 혁명? 냉소를 불러일으키는 말이다. 한국이란 나라가 ‘정상적인’ 국가이길 바라는 것 말고는 어떤 것도 확실치 않다. 그런데도 나아질 기미가 없다면? 찾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해답은 그냥 끝내버리는 것밖에 없는 것이다.


장강명의 소설 <표백>(2011)에서는 청년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능동적 행동이라고 하는 건 자살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한다. 스스로 인간성을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실존적 대응이라는 역설적인 이야기인 셈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가 기성세대라면 1960년대 소설을 떠올려 봐도 좋다. <서울 1964년 겨울>이라거나 <오발탄> 같은 소설들. 거기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이상한 사람들이다. 나쁜 놈이거나 악역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지금 시점에서 다시 보면 색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말인즉슨, 이 사람들이 바로 어떻게 해서든지 다 망가뜨리려 하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다. 모든 관계를 망가뜨리기. 자기 아내를 팔아버리고, 그렇게 해서 돈이 생기면 하룻밤에 다 탕진시켜 버리고. 모든 관계를 망쳐버리고 자살한다거나 하는 상태.


무려 5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시점에 와서 장강명의 <표백>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할 수 있는 능동적 저항이란 대체 뭐냐, 체계나 규범에 순응하거나 그럴 수 없다면 그냥 자살하라는 것. 자살을 선택하면 지금처럼 완벽해 보이는 시스템이, 나 하나 죽음으로써 오점이 있다는 게 증명이 되지 않겠냐는 질문이다. 이게 체계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다. 인간성이 제거된 세계에서 어떻게 하면 부정성을 초극할 수 있을까. 청년들의 실존적 조건은 이율배반적이다. 왜냐면 인간성을 회복하라는 정언명령을 거부하고 일말의 가능성마저 소멸시키는 것이야말로 이들에게 주어진 거의 유일한 실존적인 선택지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한동안 파국론을 비롯해 붕괴에 관한 각종 내러티브가 우리 주변을 지배하던 게 결코 우연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작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전술한 설문조사에서도 세부적으로 새로운 시작에 대해 물어봤던 바 있었다. 가장 많이 나온 답변은 공동체의 복원이었다. 김홍중이 제시했던 ‘생존’의 하위 이념형 중 하나인 공존의 길이기도 하다. [4] 물론 그 공동체를 과거의 전통적 생활공동체라든가 민족공동체 같이 강한 동질성에 기초한 집단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그보다는 근린관계를 회복함으로써 생기는 소속감과 거기서 오는 심적 안도감, 그리고 믿을 만한 타인들로부터의 인정 등을 추구하는 느슨한 수준의 사회적 결속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요즘 보면 넘쳐나는 각종 공동체주의들(마을공동체, 협동조합, 블록체인, 팬덤공동체 등등)이 괜한 우연은 아닌 것 같다. 실제로 ‘공존’을 해답으로 삼는 적잖은 청년들이 거기서 매력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성장을 요구받지만 좌표와 표적을 잃어버린 시대

 

붕괴, 파국, 절멸의 세계관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1990년대 초반과 1997년이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던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특히 그 즈음의 역사적 조건에서 태어난 오늘날의 청년세대에겐 더더욱 그렇다. 1990년대 초반엔 동구 사회주의권 몰락이 있었고, 1997년엔 IMF 구제금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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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표의 상실 이후에는 무엇이 올까?


1990년대 초반은 그 당시 20대들이 갖고 있었던 좌표라고 할 만한 게 사라졌던 시점이다.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면서 이른바 87체제가 가동됐고, 반독재 투쟁이 성취를 이룰 무렵 그동안 묵혀뒀던 급진적 요구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강경대 정국은 국가폭력에 대한 급진적 저항이 일고 있던 시점이어서 굉장히 중요했다. 그러나 유서대필조작 사건을 비롯해 정국이 반전됐고, 동구 사회주의권 붕괴로 인해 현실사회주의라고 하는 대한민국의 미래상 하나가 사라져버린 상황이 돼버렸다. 지금의 우리가 사회주의니 공산주의니 이런 것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청년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선택지 하나가 사라진 건 꽤나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그 당시 20대 청년들이 좌표를 상실했다는 건 굉장한 불안감을 초래하는 문제일 수 있다. 생물학적으로는 이미 성장이 끝난 시기이기도 하지만 사회학적으로 보면 계속 성장해야 할 시기인데, 성장이라 하는 건 앞으로 나가건 뒤로 나가건 움직인다는 의미이다. 근데 어디로 움직이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 된 셈이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대체 뭐가 남는 거지? 굉장히 애매한 상황이 됐다. 1997년에 IMF 구제금융 있었을 때는 심지어 마지막 한 줌의 기대감을 품게 했던 경제적 안정, 풍요로운 삶 같은 것도 불가능하다는 게 증명돼버린 셈이 됐다. 정치적 좌표와 경제적 좌표가 상실돼버린 세계.


이것이 좌표의 상실이라 한다면, 다른 한편으론 표적도 사라졌다. 우리가 어떤 사회적 동일성을 가지려면 나와 같음이라는 확인과 더불어 이방인이 됐든 이웃이 됐든 외부 존재에 대해 나와 다름이라는 확인이 병행되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표적이 사라졌다는 건 대강 이런 이야기가 된다. 냉전 해체로 인해 민족 내지 국가를 단위로 가상의 적을 상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동북아 지정학에서 여전히 북한이 도사리고 있다지만 1990년대 이른바 ‘고난의 행군’ 기간을 거치는 동안 북한은 더 이상 가상의 적으로 삼을 만한 경쟁 국가가 되기 힘들어졌다. 그러면 민족 바깥에서 가상의 적을 찾을 수 있을까? 민족 자체가 불가능한 프로젝트가 된 상황에서?


일례로 1990년대 문민정부에 이어 DJ 정부가 들어서는 동안 재래의 통치 패러다임을 벗어나기 위해 제일 먼저 한 조치 중 하나가 국민교육 패러다임을 폐지시키는 것이었다. 이제 더 이상 국민체조는 의무가 아니다. 일제 내지 신군부의 잔재라는 부정적 인식에 더해, 세계화 국면에 접어들면서 각종 국민 들어가는 것에 대한 거부반응들이 실제로 실행단계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393자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하지 못해 체벌을 받는 풍경도 사라졌다. 이것은 신호탄으로 민족주의라는 게 점차 형해화돼버리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우리가 단일민족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생물학적으로도 그렇고 유전학적으로도 역사학적으로도 우리가 단일민족이 아니란 건 여실히 증명된 상황이지 않은가? 새삼스럽지만 곱씹어 보면 굉장히 놀라운 변화이기도 하다.


요컨대 반공주의와 민족주의가 적어도 청년들에게 실효성을 갖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그 자리를 대체할 통치 이념이 있기는 한 걸까? 다문화주의나 세계시민주의 같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문화논리들이 그 대체자로 점쳐지기도 했지만, ‘국민’들에게 좌표와 표적을 동시에 제공해주던 민족주의의 위력에 비할 바는 못 되고 있다. 성장하라고 재촉을 받는데 어떻게 하면 성장할 수 있는 걸까? 당신들이 바라는 성장이란 대체 무엇일까? 우리에겐 닮아야 하거나 극복해야 할 대상이 부재하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를 정립할 수 있는 자리조차 보전하기 곤란하다.


안팎으로 누굴 미워해야 할지가 모호해진 상태인 셈인데, 이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된다. 프로이트 식으로 얘기하자면, 대개 새로운 문명은 형제들끼리 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가 독점하고 있는 인적·물적·성적 자원을 형제들끼리 나눠먹음으로써 시작한다. 마치 왕의 머리를 벰으로써 세상이 바뀐 것처럼, 아버지의 시신을 나눠먹으면서 자식 세대가 성장하고 세계의 새로운 질서가 구축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모든 위대한 이야기에 부친살해 모티브가 있다고 이야기한 것이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그런데 지금 시기에 와서 보면, 우리는 죽여야 할 아버지가 없는 상태에 처해 있다. 엄혹했던 군부 독재 정권은 진즉에 몰락했고, 부스러기 같이 남아 활개 치던 이명박근혜 정권도 패퇴했다. 우린 누구를 또는 무엇을 죽여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예컨대 영화 <완득이>(2011)를 떠올려보자. 주인공 완득이(유아인 분)는 항상 열이 받아 있는 상태다. 화가 나니까 화를 풀어야 하는데 우리 시대 청소년들이 그렇듯 마땅히 풀 데를 찾을 수 없다. 처음엔 자기를 괴롭히던 ‘동주 선생 죽여주세요’라면서 신에게 기도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교사가 없다. 생물학적 아버지는 오히려 장애를 갖고 있어서 자기가 돌봐야 할 사람이다. 심지어 국가라고 하는 아버지는 마이너리티 그룹(영화에서는 이주민)을 돌보지도 않는다. 그래서 국가 대신에 내가 이 사람들을 챙겨야 하는 상황이 온다, 주지하듯 오늘날 국가는 전반적으로 무능력하니까. 국가가 전지전능하면 국가권력을 상대로 투쟁이라도 할 텐데 말이다.


반면 <말죽거리 잔혹사>(2004)의 현수(권상우 분)처럼, 그러니까 적어도 1970~1990년대 청소년들은 표적이 비교적 명확했다. 생물학적 아버지한테 맨날 얻어터져서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싶어 무술을 연마한다. 학교엔 교사라는 아버지가 있고, 길거리엔 애국가가 나와서 좋아하는 사람도 못 따라가게 하는 국가라는 아버지도 있었다. 그래서 영화 절정부에서 현수는 “씨×, 대한민국 학교 다 ×까라 그래”라고 외치고 쌍절곤으로 교실 창문을 깨부수면서 학교를 박차고 나올 수가 있었다. 분노의 표적이 있다는 것, 부정성의 계기가 존재한다는 것은 한 인간이 존립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장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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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적이고 수평적인 연대라는 새로운 좌표(?)


그에 반해 <완득이>는 자기 주변 사람들이랑 일종의 대동놀이를 하면서 끝이 난다. 묘한 상황이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좌표는 마음에 맞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랑 서로 손잡는 것 말고 아무것도 없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표적은 정말 없는 건가. 무엇에도 확정적으로 대서거나 나설 수 없는 상황이다보니 뒤에서 ‘꼰대 어쩌고 세상 어쩌고 혁명 어쩌고’ 구시렁거리는 수밖에는 없다. 그들에게 세계는 더 나빠질 수는 있을지언정 더 좋아질 수는 없다.


물론 지금의 세계는 여전히 완벽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들 중 누군가는 반드시 늘 화가 난 상태일 수밖에 없다. 언제든 화날 준비가 돼 있고. 화가 날 수밖에 없고. 또 계속 화가 쌓인다. 문제는 이 적개심을 상쇄시켜줄 표적과 좌표가 없다는 것이다. 부정성의 계기를 통해 소소하게는 심리적 안정으로부터 시작해 거창하게는 인간 본연의 정신을 성취해야 하는데 전혀 그럴 수 없는 상태라는 이야기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각자 알아서 분노의 표적을 찾는 수밖에 없다. 넘쳐나는 분노에너지를 긍정 에너지로 승화시킬 도리도 마땅치 않다. 그래서 필요악으로 어떤 관행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도 이해가 어렵진 않다. 혐오 발화, 대상을 가리지 않는 혐오. 묻지마 범죄, 아노미적 행위 같은 것들. 내 일자리 뺏는 놈들이 있는 거 같아. 여성상위시대. 다들 자기만의 개똥철학으로, 옹기종기 모여서 판단 내리는 수밖에 없다. 치안 문제가 심각한 것 같아, 조선족. 지금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형벌을 받는 게 아닐까, 동성애자. 이런 식으로 우리 내부에서 계속 선을 그으면서 적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잃어버린 대의 뒤에 오는 수평적 연대의 문제

 

그런가 하면 우리는 ‘대의’를 잃어버렸다. 대체 무엇을 위해 서로 연결되고 모일 수 있을까. 그리하여 어떤 실존적 투쟁을 펼칠 수 있을까. 카리스마? 그리스도? 어떤 인물이어도 좋고 또는 어떤 이념이어도 좋다. 무엇을 음차한 것이든 ‘키리시마’의 실종은 부친 살해의 모티브를 잃은 세대가 이제는 사회적 결속(bond)을 보장할 집합표상조차 잃어버리게 된 불행에 직면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건 이중적으로 굉장히 심각한 문제가 되는데, 한편으론 표적이, 다른 한편으론 좌표가 상실된 상황이다. 농담 섞어 얘기하자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국역되어 팔려나갔던 것도 괜한 우연만은 아닌 셈이다. 뭔가 애매한 상황, 앞을 볼 수 없고 그렇다고 어디에 화를 낼 수도 없는 꽉 막힌 상황이다. 일대일 농구를 하면서 키리시마를 기다리던 귀가부 친구들이 자문하는 순간은 그래서 더 극적이다. “우리들 말야, 왜 농구하고 있는 거야? 사실, 키리시마 기다리려고 시작한 거잖아? 그럼 지금은?”


전술했던 것처럼 청년들이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점은 결국 최소한의 소속감과 인정 없이는 인간이 더 이상 사회적 동물이 될 수 없다는 징표일 것이다. 그런데 근린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것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미묘한 문제일 수 있다. 1990년대 신세대들이 등장할 때만 해도 공동체는 언제나 문제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개인주의적 가치관을 지니고 탈권위주의를 지향하는 게 우습게도 굉장한 저항이었다. 혼밥(혼자 밥 먹기)하고 혼영(혼자 영화보기)하고 아싸(아웃사이더)로 산다면 그건 문제적인 게 아니라 거꾸로 정말 대단하고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저항할 줄 아는 소위 개념 있어 보이는 행동의 일종이기도 했다. 한국 사회에서 개인주의가 자리 잡기 시작한 게 얼마 안 됐고 때마침 각종 포스트주의들이 수입되는 상황이 되다 보니 그들에겐 그 자체가 굉장히 큰 저항이었던 셈이다. 그 당시 청년들에게는 남들이 나를 바라보고 나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오죽하면 이런 제목의 책이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5]

 

그렇지만 요즘엔 상황이 바뀌어서 남들이 날 보지 않으면 불안해한다. 묘한 반전 상황인데, 단도직입적으로 본다면 포스트민족주의 시대에 신뢰할 만한 새로운 대체 이념이 없는 상황과 관계있지 않을까 싶다. 과거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는 국가폭력과 이어지기 때문에 늘 문제적이었다. 그렇지만 이 국가주의적 민족주의마저도 소실된 세계에 때 아닌 혼란이 찾아온다. 물론 과거 폭력의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여기서 민족주의가 의도치 않게 생산했던 특정한 효과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략 두 가지 정도인데, 한편으로는 어찌 됐건 민족이란 이름으로 또는 국민이란 이름으로 호명된 사람들끼리 동류의식을 형성하게 해줬던 것이 대표적이다. 같은 민족 구성원이구나, 같은 대한민국 국민이구나, 하는 상상적 동질감을 형성해주는 메커니즘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의 이념 진공 상태를 보충하기 위해 동원된 다양한 장치들, 예컨대 국민교육 같은 걸 하면서 국가주의의 작동과 동시에 사람들 사이에 민족주의적 신념을 만들어냈던 측면이 있다. 아무도 의도한 것이 아닐 수 있지만, 개인마다 편차가 있을지언정 공적인 것에 관한 맥락들이 지배적인 윤리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예컨대 국민교육헌장은 ‘반공’이란 두 글자를 빼고 보면 사실 정말 아름다운 문장이기도 하다. 안으론 민족중흥, 밖으론 인류 공영에 이바지해야 할 때. 민족주의 그리고 말뿐이긴 하더라도 심지어 세계시민주의적인 내용까지도 있었다. 반인권적 체벌과 군사적 규율 속에서 이런 내용들이 체화된다는 것은 어떤 효과를 가져왔던 것일까. 적어도 이런 교육을 받았던 세대들이 스스로를 공적인 존재로 상상하고 공적인 책무감을 가졌던 세대들임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민족주의가 붕괴 내지 형해화됨으로써 이 두 가지가 허물어진다. 우선 당연하게도 사람들 간의 동류의식이 해체돼버렸다. 시차를 두고 분위기 반전이 일어난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날 안 보는 것 같아서 불안해진다. 독립은 하고 싶은데 고립은 싫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도 공적인 것을 더 이상 지배적인 윤리로 승인하지 못하게 된다. 2000년대를 내내 겪으면서 확인했던 것처럼, 사적인 경쟁 이데올로기와 물신숭배 같은 것들이 그 자리에 들어왔다. 청소년기에 곁을 두던 급훈은 ‘근면·자조·협동’이 아니라 ‘티코 탈래 BMW 탈래’ 같은 식으로 바뀌어 갔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면서 공적인 연결고리 구실을 했던 것들이 부재하게 됐다.


사회학적 입장 특히 뒤르켐주의 입장에서 보면 사회적 규범이 부재한 상황을 일컫는 아노미적 상황으로 치닫는 것이다. 어쩌면 커뮤니케이션이 절대 불가능했던 1960년대 상황과도 흡사한 측면이 있다. 그제나 지금이나 통치이념이 부재한 상황이긴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가치관이 혼란에 빠지고, 내적 갈등에 휩싸여 헤어 나오지 못하고, 그러면서 내면으로의 침잠은 더욱 가속화된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가장 일차적인 반응으로 공동체적 결속을 원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겠다 싶기도 하다. 그 놈의 공동체 때문에 사달이 나더라도 어쨌든 우리는 공동체 없이는 살 수 없으니까.


결국 다른 식으로 공동체를 구성해내야 하는데, 이 과업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이뤄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관건이 된다. 공통의 이념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예전 같은 공동체-효과 그리고 공적 효과 같은 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6] 여기서 이론적으로 새로운 실험이 나타난다. 20세기까지 있어왔던 집합표상을 통한 공동체-효과를 부정하고, (적어도 거대한 규모의) 집합표상이 없는 새로운 공동체를 상상하는 것이다. 종교적 이념, 카리스마적 지도자 등등이 가져왔던 역사적 폭력성을 감안한다면 무리한 문제의식만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사적인 관계에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수평적 연대, 횡적 연대를 통해서. 주변 친구들끼리 모인다. ‘너 오늘부터 내 동료가 돼라’는 애니메이션 <원피스>의 반복적 대사는 이미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7] 우리끼리 협동조합 만들자, 우리끼리 공정무역하자, 우리끼리 사회적 책임을 다 하자, 우리끼리 마을 만들자, 도시재생하자, ….[8] 붕괴 이후의 새로운 시작이 바로 이 지점에서 실험되고 있는 게 아닐까. 어느새 사람들은 서로간의 연결을 제3의 매개항 없이 상상하고 있다. 사람들은 네트워크 위에서 연결되고 있다고 상상한다. 사람들은 안정과 번영을 위해 교량형(bridging) 또는 연결형(linking) 사회적 자본을 필요로 한다. 심지어 사람들은 블록체인을 통해 신성장동력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공통점은 하나다. 이들은 입체적 구조(structure)가 아니라 촘촘한 직조(fabric)를 통해 공동체를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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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작은 어떤 형태를 띠는 것일까?


사적인 관계, 사교적인 관계의 회복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서라도 당장은 이 일이 가장 급해 보인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안 되는 게 있으니까 항상 문제가 발생한다. 사실 20대 청년들이 ‘붕괴와 새로운 시작’을 꿈꾼다고 했을 때, 이것 자체만으로는 굉장히 놀라운 출발점이라 생각해볼 수도 있다. 신뢰할 만한 거의 모든 운동의 시작은 부조리한 체계를 파괴시키려고 하는 데서 찾을 수 있지 않겠나. 새로운 시작이 뭐가 될 진 모른다. 다 뒤집어엎은 다음에 자율적 리듬에 모든 걸 맡긴 다음 어떤 상황이 닥쳐올지도 확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수평적 연대에 근거한 공동체주의의 문제는 거기에 항상 빠져있는 설정이 있다는 점에 있다. 단적으로 수직적 적대라는 프레임이 빠져 있다. 계급사회에서 적대라고 하는 문제가 해소불가능하단 사실을 상기해본다면 이런 설정은 확실히 문제적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어느 순간 우리의 정상성은 속물주의에 의해 잠식당해 있다. 청소년들의 장래희망이 공무원, 연예인 등에서 갈수록 건물주나 임대업자쪽으로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9]은 어떻게 봐야 할까. 제 아무리 젠트리피케이션이 문제라고들 하지만, 우리의 장래희망은 남들보다 많은 자산을 가지고 여유로운 삶을 즐기며 ‘갑’의 위치에 서는 것이 돼버렸다. 즉, 수평적 연대를 꿈꾸지만, 이따금씩 도덕적 갑질에 대해서만 민감할 뿐 사회이동을 허용하는 한 계급사회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을 심화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에 반해 계급구조에서 상층 계급의 사람들, 특히 국가에 빌붙어 움직이는 상층 지배 엘리트 계급들은 (단순한 갑질을 넘어) 항상 수직적 적대를 행사하곤 한다. 우리가 늘 관찰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별다른 목소리를 안 내니 위로부터의 적대는 지속된다. 우리가 새로운 시작을 꿈꿀 때, 수직적 적대 즉 종적 적대에 대한 설정이 없다는 것은 거기에 맞받아치는 전략이 없다는 사실로 이어진다. 맑스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얘기하고 동시에 꼬뮨을 얘기할 수 있었던 것은, 거기에 수직적 적대와 수평적 연대라는 설정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적대적 계급들간의 관계가 비대칭적 권력 관계를 전제로 하는 이상, 더 치밀하게 고민하고 더 복잡하게 계산하도 될까 말까 하는 싸움인데, 오늘날 네트워크·사회자본·블록체인 등의 담론에는 마치 그들만의 공동체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상상이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공동체-효과는 그 범주 안의 일원들에게는 안도감을 선사하지만 바깥의 존재들을 배제하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모든 공동체주의는 일종의 선 긋기와도 같다. 물론 과거에 비하자면 자본주의 고도화와 더불어 적지 않은 이들이 체계 안으로 포섭되어 유례가 없을 정도로 포괄적이고 윤리적인 공동체를 꿈꾸고들 있기는 하다. 그러나 오늘날 세입자들이 공동체적 도시재생에서 얼마나 득을 볼 수 있을까? 다양한 섹슈얼리티를 가진 이들, 이주민과 난민들, 심지어 20대 여성이 맘 놓고 마을공동체 운동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걸까?

 


그래도 여기가 청년들의 로두스

 

문제는 이렇게 풀어야 할 과제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 길 말고는 오늘날 청년들이 공적인 감각을 체득할 방도가 딱히 없다는 데 있다. 현재 시점에서 가장 긴급한 문제는 맑스주의적인 착취관계 문제라기보다는 차라리 홉스적인 자연상태를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가까워보인다. 그렇기에 민주주의에 대한 통념이 그들 대다수에게는 상대적으로 다른 양상을 띨 수밖에 없다. 2000년대가 속물주의의 시대였다면 2010년대는 사실상 생존주의의 시대라 해도 무방할 지경이다. 붕괴와 안락이라는 극단적 전망도 결국에는 생존의 불가능성이라는 동일한 문제의식의 소산처럼 보인다.


만약 민주주의라는 것이 통념 그대로 자기 스스로 공적인 의사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라면, 오늘날 우리들에게 민주주의의 장은 주로 경제적인 장에서 제기되는 것으로 보인다. 말하는 입을 닫아서야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먹는 입을 채우지 못해서야 무슨 말을 할 힘이 생길 수 있을까. 이것이 기성세대들이 보기에는 소박하고 불충분하고 심지어는 탈정치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확실히 오늘날 청년들은 경제적인 장과 문화적인 장 곳곳을 표류하며 붕괴 또는 안락을 추구하는 형상을 띠고 있다. 그런가 하면 어디에도 쉽게 안주하지 못한 채 그들 고유의 존재론적 동요를 경험하고 있다고 그럴 듯하게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모더니티 출현 이래로 대체 어느 세대가 존재론적으로 불안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우리는 다만 형태를 달리할 뿐 언제나 더 많고 더 작은 민주주의를 요구한다.


비교적 얼마 전만 하더라도 체계로부터 탈주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제도권과 상징질서에 대항하면서 가능한 한 독립을 꿈꾸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삶은 더욱 궁핍해진다. 무려 단군 이래 가장 강력한 스펙을 가지고서도 말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과거와는 전혀 다른 논쟁의 지형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가리킬 것이다. 역사적 주체로서 고고한 삶을 위해 실존적 투쟁을 하던 것을 ‘사회 상태’에서의 투쟁이라 한다면. 오늘날 청년들은 하고 싶은 것과 의미 있는 것을 최대한 일치시키면서도 이를 위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자연 상태’로 떨어지지 않기 위한 투쟁을 하고 있다.


물론 어른들의 눈높이에 맞춰 그럴 듯한 정치적 감각으로 민주주의적 주체를 연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그처럼 손쉽기만 한 일일까. 저항적이고 대안적인 것처럼 여기던 공간들은 하나같이 체계 안으로 녹아들어갔다. 그리고 권력이 되었다. 정치적 자원을 독점한 세대, 문화적 자원을 독점한 세대, 그리고 그 어떤 것도 가질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려운 세대. 운동권에 대한 혐오와 세대 갈등이 폭증하는 것을 두고 단순히 우발적인 일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알던 세계가 끝남과 동시에 우리가 알던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방식 역시 급격히 전환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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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c Rhodus, hic salta


좌파 이론은 이러한 전환을 제대로 번역할 역량이 있는 걸까. 아니, 그럴 의사가 조금이라도 있는 걸까. 그보다는 섣불리 위기 운운하며 역사의 퇴행을 근심하는 데 여념이 없어 보인다. 정말로 민주주의, 정치의식, 그리고 인간성의 위기라도 온 것일까. 단언컨대, 위기나 종말에 준하는 어떤 사태가 있는 것이라면, 우선은 그보다 선배세대들이 알던 역사의 종말을 먼저 선언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의 눈에는 붕괴와 절멸을 소망하는 모습이 끔찍하거나 딱해 보일 것이고 안락과 적응을 추구하는 모습이 기가 차고 어이없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모든 어른들이 공적인 것을 체화할 장치를 불가역적으로 파괴하는 동안, 지금의 청년들 중 일부는 자신들의 공적 감각과 공존을 위해 삶의 원리들을 고유의 방식으로 써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수평적 연대의 실험들이 전술했던 것처럼 여러 제약조건과 자기한계를 떠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어차피 지금 시대에 어떤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는 것은 그것이 새로운 만큼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뻔한 한계 속에서 민주주의적인 것을 소망한다는 것은 세계와의 최소한의 투쟁에 그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집합표상이 없는 네트워크, 유토피아 없이 생존을 갈구하는 수평적 연대, …. 이런 실험들이 얼마나 성공적어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한 길을 개방시킬지는 아무도 보장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정치의 전선이 이전과 질적으로 달라졌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할 필요가 있다.


여전히 누군가는 청년들의 목소리와 움직임에서 낯 뜨거운 르포르타쥬를 읽어내려 할지도 모른다. 취업 못하는 청년, 착취당하는 대학원생, 알바를 전전하는 프리터족, 성장을 중지시키고 기생하는 파라사이트 싱글, 그리고 N포 세대. 모종의 전형화된 이미지들이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 물론 그런 식의 인상을 애써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 또한 현실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바로 거기서부터 그들만의 대의가 꿈틀거리고 있음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청년으로서 시민으로서 응당한 사회적 권리를 따내기 위해 (그것도 마땅한 표적도 없이) 고군분투하고 있다.


누군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정치의 지형은 바뀌었다. 청년들의 사회적 권리 요구가 정치적 대의의 종말 이후의 새로운 국면을 암시하는 듯하다. 생존에 대한 개인들의 요청은 분명 사회적 권리 확보를 위한 정치적 요구로 번안될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다. 여기서 역사의 끝을 보고 있다면 오래된 어법에 따라 그것은 정치의 퇴행을 뜻하는 것이겠지만, 기실 그것은 그들이 알던 정치의 한계상황을 가리키는 지표일 뿐이며, 이들은 선배세대들이 이룩한 찬란한 역사적 배제의 끝자락에서 어떻게든 몸부림치고자 한다. 생존과 궁리라는 우리들의 지배적 정서구조는 정치의 지형 속으로 인입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안에서 청년들은 그들 고유의 역사를 만들 수 있을까. 어떤 효과가 나타날 것인지에 대해서는 쉽게 예측하기 힘들지만, 그들에겐 여기가 로두스다.

Notes

  1. <경향신문>, “[부들부들 청년] “우리는 붕괴를 원한다””, 2016년 1월 1일자.
  2. 엄기호,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창비, 2016.
  3. 김홍중, 「서바이벌, 생존주의, 그리고 청년세대: 마음의 사회학의 관점에서」, 『한국사회학』, 49집 1호, 2015.
  4. 김홍중은 오늘날 청년들이 보유한 생존주의의 선택지로 독존, 공존, 탈존의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진단했던 바 있다. 김홍중, 위의 글, 198-201.
  5. 1992년 이인화(류철균)가 발표한 소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는 공지영, 요시모토 바나나,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표절과 혼성모방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을 부추기기도 했다.
  6. 그런 점에서 최근 들어 절정에 달한 정치의 팬덤화 양상은 공통의 이념을 공통의 인물 형상으로 대체하려는 대중적 운동이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7. 야스다 유키, 『원피스 식 세계 최강의 팀을 만드는 힘』, 에이지21, 2012.
  8. 이와 같은 사회성 구도에 대해서는 김성윤, <‘사회적인 것'의 이데올로기적 지형 ― 사회적 경제와 공동체 논리의 역사적 과정과 담론적 질서>,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7 참조.
  9. JTBC, “[탐사플러스] 공무원·건물주가 ‘꿈’ … 청소년들의 현주소”, 2016년 2월 29일 보도,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183269&pDate=2016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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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및 운영위원입니다. 주전공은 사회학을 하고 있고 최근에는 플랫폼 자본주의, 도시재생과 민주주의 등의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시간이 나는대로 연구소 홈페이지에 들러서 이용자 여러분들과 교감하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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