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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문화사회연구소

정치사회

“우리는 차별을 하지 않아요” ― 진화된 혐오 담론으로서 젠더 이퀄리즘과 반다문화

페미니즘을 비롯한 혐오 비판론은 혐오의 지형을 폐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지형을 재편하는 데 기여한 것일까. 이 글은 혐오 비판 담론과 성찰적 관계를 이루는 혐오 담론들을 다룬다. 안티-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의 여성혐오 비판을, 반-다문화주의는 다문화주의의 인종차별 비판을 자양분 삼아 진화하고 있다. ‘젠더 이퀄리즘’과 ‘반다문화 담론’의 주된 특징 중 하나는 각각 여성혐오와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있다. 이들은 최근 부흥하는 페미니즘의 정체성 정치 전략을 ‘여권신장주의’로 몰아넣으면서 스스로를 ‘성 평등주의’의 보편적 설정으로 격상시키는가 하면, ‘문화적 다원론’에 입각해서 다문화 정책 기조가 민족문화(의 문화적 차이)를 위협한다고 비판한다. 요컨대, ‘성 평등’과 ‘문화적 차이’라는 대안적 논리가 그들 고유의 혐오 담론을 진화시키는 구성 요소가 된 것이다.
― 『문화/과학』 94호(2018년 봄호)에 특집 기획으로 실린 글입니다.
by 김성윤 posted Mar 13, 2018 Views 1310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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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티-페미니즘, 반-다문화주의

 

하나의 형식을 공유하는 두 가지 사례가 있다.

 

#1
현재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에는 본래의 뜻과는 달리 와전된 여러 의미들이 혼재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희 파랑의 정후보와 부후보는 페미니스트라고 스스로를 규정하는 것이, 당장은 본 선본의 성평등의 지향이라는 문제의식을 잘 대변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 선본은 학내 성평등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을 분명하게 밝힙니다.[1]

 

#2
동남아인들과 흑인들이 태생부터 열등하다는 식의 글을 보고 참 황당하고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식의 인종주의적 발언들이 서슴없이 나온다면, 다문화 반대운동은 정당성 있는 정치운동으로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그저 편견과 독선으로 가득 찬 인종주의자들의 모임쯤으로 공격받기 딱 좋죠. 자기 생각이 남들한테 공감을 받길 원한다면, 최소한의 상식이나 보편성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2]


오늘날 안티-페미니즘과 반(反)-다문화주의는 혐오와 차별[3]에 반대하고 평등을 지향한다. 자가당착 같은가.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혐오와 차별에 반대하면서 동시에 페미니즘과 다문화주의에도 반대하는 허위의식이라고 힐난할 것이다. 어쩌면 이런 주장들이 별다른 토론거리가 안된다고 무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성차별하지 않는 안티-페미니즘과 인종차별하지 않는 반-다문화주의가 세상물정 모르는 이들의 솔직하지 못한 궤변처럼 들릴 것이다. 또 누군가에게는 혐오자나 차별주의자라는 낙인을 회피하기 위해 얄팍한 술수를 부리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단순한 궤변이나 술수라는 착각. 그래서 지난 몇 년간 이 ‘괴상한’ 논리는 방치돼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저들의 논리는 대중적으로 진화를 거듭했다.


물론 이 새로운 논리에 합리적으로 대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다문화주의 연구자는 반다문화 활동 참가자들을 초대했던 학술토론 모임을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그동안 학술대회나 강연회 등에서 이들 단체 회원들과 여러 번 조우했다. 이들은 회의장의 한쪽을 장악하고서는 자신들의 견해와 어긋나는 주장을 펴는 패널에게 노골적인 비웃음과 야유를 퍼붓고, 심지어는 입에 담지 못할 저주와 욕을 해댔다.”[4] 그렇지만 저들이 보이는 놀라운 역설을 상기한다면 반문이 들기도 한다. 대화가 되지 않았던 것은 오히려 이들의 논리를 논리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탓이 아니었을까. 안티-페미니즘과 반다문화 등 우리 시대의 혐오 담론과 차별 논리는 ‘우리는 차별을 하지 않아요’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도 너희들의 생각은 허위의식이라고 평가절하하면서 ‘차별주의자’라는 익숙한 레퍼토리만 반복한다면, 고상함을 자처하는 이에게 되돌려줄 수 있는 게 강짜 말고 뭐가 있을 수 있을까.


단순히 누군가를 편들려는 것은 아니다. 진짜로 문제적인 것은 그들을 합리적 대화상대로 보지 않는 동안 몇 가지 중요한 문제의식을 날려버리는 데 있기 때문이다. 가설적으로 보면 대략 이렇다. 하나는 오늘날 혐오와 차별 담론이 종래의 순진한 정치학 담론으로는 온전히 해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사이 ‘혐오하지 않는 혐오’와 ‘차별하지 않는 차별’이란 역설이 빈틈을 파고들어간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추구하던 언어가 결코 완결적일 수 없으며 때로는 상대의 성장을 돕기도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인권 담론은 이쪽의 무기였지만, 이제는 저들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 페미니즘과 다문화주의를 물리쳐야 한다(?).’ 마지막 하나는 저들의 논리가 어쩌면 세대적이거나 역사적인 층위에서 새로운 사고방식을 뜻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이다. ‘와전된 페미니즘’을 멀리하고 ‘성평등을 지향’한다는 사례1의 대학 총학생회 선거운동본부는 80%나 되는 찬성표를 얻었고, 사례2의 ‘인종차별하지 않는 반다문화’ 정서는 해외여행 경험이 가장 빈번한 20대들에게서 가장 높게 나타난다.[5]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차별금지법을 제정한다면 혐오와 차별 따위도 억제될 수 있을까. 기대와 달리 저들은 이미 자신이 혐오나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때 가서도 우리는 저들의 언행을 징벌할 수 있을까. 이 게임에서 저들은 정의에 입각한 보편성의 언어(평등, 차별금지, 조화, 정의 등등)를 기꺼이 수용하고 오히려 판돈을 올리면서 우리더러 패를 까라고 요구한다. 저들은 우리의 패를 다 읽었는데, 단지 도덕적 우월감만으로 게임을 이길 수 있을까. 오히려 우리는 언제든 우리의 언어적 세계에 오류가능성이 있음을 인식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를 추월해버린 저들의 논리를 이제는 거꾸로 따라잡아야 할 때가 아닐까. 즉, 우리의 인식 체계에서 정정의 계기를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려면 그동안 포착하지 못했던 혐오와 차별의 내적 논리를 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지난 몇 년 동안의 혐오 담론은 (페미니스트 인식론의 확산과 혐오의 개념화라는 성과와는 별개로) 혐오 자체에 개입하기보다는 단순히 혐오나 차별의 심각성을 환기하는 수준에서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를 감성적이거나 도덕적인 문제로 소급해 들어가면서 저들의 경험과 논리 체계에 대해서는 철저히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나 정작 실재하는 혐오와 차별 담론은 모종의 자기 부정을 통해 우리들이 가진 언어의 틈바구니 새로 빠져나가버린 것은 아닐까. 한 마디로 말해 저들 논리의 현실적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물음이다.

 


2. 페미니즘을 혐오하는 ‘젠더 이퀄리즘’

 

알 만한 사람들에게 2017년 초 <나무위키>의 ‘이퀄리즘’ 또는 ‘젠더 이퀄리즘’ 또는 ‘성 평등주의’ 사건[6]은 제법 익숙한 일일 것이다. ‘성 평등주의’ 문서의 원문 요지는 대강 이렇다. ‘페미니즘은 성평등을 위해 남성을 차별해야 한다고 하므로 성평등주의가 될 수 없다. 즉, 페미니즘은 여권 신장을 위한 사상이고 젠더 이퀄리즘은 남녀를 동등하게 보는 사상이다. 따라서 페미니즘 대신 젠더 이퀄리즘을 택해야 한다.’ 페미니즘의 한계를 바로 잡기 위해 (서구에서) 성평등주의가 일어났다는 (그들만의) ‘팩트’, 그리고 온라인에서 통용되는 <나무위키> 특유의 막강한 ‘공신력’으로 인해 예상외의 파장이 일어났다. 문서가 최초 작성됐던 이래로 근 5개월 동안 ‘성 평등주의’ 논법은 온오프라인으로 퍼져나가며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는 무기가 됐다. 문서의 주장이 의도한 것처럼, 준동하는 페미니즘을 걸러내고 보다 보편적인 입지에 올라갈 이론적 근거를 제시해줬기 때문이다.


정말로 젠더 이퀄리즘이 페미니즘을 대체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 사건은 <나무위키>의 취약성을 이용한 사상 날조 및 대중 선동 해프닝으로 판명이 났다. ‘성 평등주의’ 문서에 문제를 제기한 <페미위키>에 의하면, “일군의 사람들이 페미니즘을 비판하기 위한 의도로 나무위키의 여러 특성을 활용하여 젠더 이퀄리즘이라는 가상의 사회 운동 내지 철학 사조를 꾸며내고 허위 정보를 만들어낸 사건”이었으며, “인터넷 커뮤니티의 여성혐오 정서, 부존재 증명의 어려움, 확증편향과 정보에 대한 선택적 노출, 영어 문서에 대한 낮은 독해력 및 문해력, 상호 강화 현상 등”이 빚어낸 일이었다.[7] 이론의 여지없이 ‘성 평등주의 날조 사건’은 꽤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안티-페미니즘 분위기와 선택적 팩트주의에 입각한 반지성주의적 태도가 결합한 산물이었다.


그렇지만 젠더 이퀄리즘과 페미니즘의 싸움이 완전히 끝난 것 같지는 않다.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들은 세 싸움에서 밀린 것일 뿐 젠더 이퀄리즘 자체가 논파됐다고 여기지는 않고 있다. 이런 식의 유보적 태도가 대표적이다. “문제가 있었다면, ‘일반인’들이 쓰는 통념적 표현을 이론적 체계를 가진 ‘학문’처럼 호도했던 것 정도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걸 단순한 ‘주작’이라고 몰아붙일 일은 아니지 않나? 그런 식이라면 젠더 이퀄리즘이 아예 없다고 말하는 페미위키도 ‘주작질’ 아닌가?”[8] 심지어 이런 맥락은 대중주의나 반지성주의와 만나 오히려 젠더 이퀄리즘의 도덕적 정당성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구체화된 형태를 띠지 못하더라도 엄연히 존재하는 젠더 이퀄리즘 ‘정서’를 단순 묵살하는 페미니즘이야말로 대중들을 무시하는 나쁜 사상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정확히 말해 ‘페미니즘을 혐오하는 젠더 이퀄리즘’이라는 독특한 정서 또는 신념을 반영했다. 페미니즘을 혐오하는 성평등주의는 분명 형용모순으로 보인다. ‘내가 이렇게 여자를 좋아하는데 여성 혐오라니 말도 안 된다’는 여성 혐오자의 변론보다도 모순적이다. 그런데 젠더 이퀄리즘의 정서구조는 혐오의 대상을 여성이 아니라 페미니즘으로 삼는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물론 페미니즘 혐오가 여성 혐오와 근본적으로 무관하지 않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 다소 불명료한 지점이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여성 혐오에서 페미니즘 혐오 그리고 젠더 이퀄리즘 주작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이른바 ‘메갈리아 사태’가 있었고 연이어 일종의 혐오 전쟁이 촉발됐었다는 사실이다.


여혐혐 진영은 여혐 문화를 문제 삼았고, 여혐 진영은 자신들이 혐오 공격을 받는다고 여겼다. 여혐혐 진영에는 페미니즘이 있었고, 여혐 진영에는 당연히 별다른 이론적 자원이 없었다. 여혐 진영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체계에 의한 배제의 공포와 불안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일 텐데 여기다 예기치 않았던 혐오 공격까지 받는다면 어떤 상태가 될까. 이런 상황에서 집단 창작된 젠더 이퀄리즘의 논리적 형식은 적어도 그들 입장에서는 페미니즘을 따라잡고 나아가 추월할 수 있다는 믿음을 자극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눈여겨볼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페미니즘을 생물학적 여성들의 배타적 권리를 위한 이념과 운동으로 프레이밍하고, (마치 남성연대가 양성평등연대로 개명한 것처럼) 자신들의 정서와 신념을 ‘성 평등주의’라는 이름의 보편적인 형식으로 가장했다. 만약 인간 감정에 단순한 기원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들의 페미니즘 혐오 내지 페미니스트 혐오를 단순히 여성 혐오로 환원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여성을 혐오하지 않지만 페미니즘은 혐오한다는 선언이 그들의 세계에서는 전혀 모순적이지 않게 된다.


이런 상황이라면, (이미 그 자체로 혐오 담론의 진화적 형태인) 젠더 이퀄리즘이 언젠가 다시 나타나더라도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단순 해프닝이 아니라 여러 요인들이 착종되면서 나타난 하나의 국면일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이런 관점이 가능하지 않을까. 여성 혐오나 그 주체인 남성을 단일한 감정이나 실체로 간주해서 대응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역습 같은 것. 여성 혐오란 여러 복잡한 감정과 주체들의 블록을 통해서만 작동한다고 봐야 한다. 누군가는 골수 마초이즘으로 여성 혐오와 차별을 일삼겠지만, 다른 누군가는 온정적 가부장주의로 상대적으로 덜 혐오·차별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어떤 범주에도 들지 못하는 잉여인간으로 살면서 자신은 혐오와 차별의 주체 자격조차 가지지 못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특히 이 두 번째와 세 번째 결이 중요한 듯하다. 젠더 이퀄리즘 정서는 ‘약자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남자’[9]들을 포섭한다. 주지하다시피 그들에게 현존하는 젠더 불평등 문제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인식된다. 여성 상위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상상은 오히려 남성이 차별 받고 있다는 생각을 증폭시킨다. 그들이 ‘성 평등’을 요청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처구니없는 거짓말 대잔치에 상당수 사람들이 혹했던 데에는 보다 세심한 이해가 필요해 보인다. 진정으로 중요한 논점은 ‘성 평등주의’ 문서 날조 그 자체가 아니라 어째서 이 문서가 설파하는 논리에 적잖은 사람들이 이토록 매혹될 수 있는가 하는 데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젠더 이퀄리즘은 적어도 세 가지 지점에서 막힌 혈을 뚫어주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하나는 페미니즘이 사실상 성차별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이고(‘오직 여성의 권리신장만을 위해 투쟁한다니!’), 다른 하나는 자신들은 남성우월주의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다는 것이며(‘우리는 혐오 세력 따위가 절대 아니야!’), 마지막 하나는 ‘성 평등’이 현재 자신들이 당하는 물질적·정신적 곤궁에 대한 대항적·대안적 논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페미니즘이 부추기는 역차별과 남성 혐오를 없애야 해!’).[10]

 

젠더 이퀄리즘 정서에 동조하는 이들이 여성 혐오를 부인한다는 사실을 두고 누군가는 성차별 구조에 대한 인식 능력 부족, 또는 여성들의 삶과 환경에 대한 공감 능력의 부족 같은 것에 이유가 있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니 ‘구조맹’이니 ‘공감맹’이니 하는 표현들이 나왔을 테고 말이다.[11] 그런데 정말로 이들 안티-페미니스트가 성차별을 비롯한 사회구조에 무지하고 또 여성을 비롯한 타인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을까. 질문을 반대로 던져볼 수도 있겠다. 페미니스트 또는 페미니즘 옹호자들은 성차별 구조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고 타인의 삶을 헤아린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물론 젠더 이퀄리즘 정서구조의 허구성을 부정하려는 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집단적으로 상상되고 언표화되는 순간 (더 이상 상상이기를 그치고) 현실의 일부를 구성하게 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도록 하자. 그렇다면 젠더 이퀄리즘을 단순한 허위의식으로 내팽개치는 것이야말로 진짜 허위의식이 아닐까.


이들이 구조 문제를 보지 못한다는 판단을 검토해보자. 보통은 두 가지 정도가 쟁점이 되곤 한다. 하나는 성차별 구조에 대해 안티-페미니스트들이 침묵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들이 삶의 위기 문제를 사회경제적인 모순에 의한 것으로 보지 못한 채 특정 집단이나 개인을 혐오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같이 일련의 적극적 평등실현 조치(affirmative action) 같은 것이 운위되기 시작하면 사정이 복잡해진다. 여기서도 두 가지가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쟁점이 된다. 하나는 역차별 구조에 대해 페미니스트들이 침묵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페미니스트들이 역사적 모순으로 인한 삶의 위기를 보지 못하고 무고한 중하층 집단들을 혐오하고 불이익을 주려 한다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이렇다. 그동안 구조적 차별을 받았던 여성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게 되면, 이는 (역차별 정서를 정당화하는 논리이기도 한데) 과거의 차별에 관여하지 않은 현재의 남성들이 희생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이 생각하기에는 이렇다. 차별에 가담했던 남성과 현재 자신은 다르다. 혐오 문제도 마찬가지다. 과거에 혐오의 주체였던 남성과 현재 자신은 다르다. 그런데도 왜 페미니스트들은 모든 남성을 뭉뚱그려서 우리를 희생양으로 만들려 하는가. 정말로 공평해지려면 우리가 아니라 전세대의 기득권 남성들을 문제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기득권에서 배제됐다고 자신을 판단하는 이들은 페미니스트들이야말로 구조를 보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혹시 이것은 흔한 ‘찌질남의 피해자 코스프레’인 걸까. 이들의 ‘성 평등주의’ 담론 내부를 들여다보면 실제로 자가당착에 가까운 피해의식이 보이는 경우들이 많은데, 이는 젠더 이퀄리즘 정서를 이해하는 데 유용한 단서가 될 수도 있다. 특히나 갈수록 사회경제적 격차가 심해지고 그 여파로 세대 갈등이 첨예화되는 상황에서 이들 ‘젊은 남성’의 사고방식은 주목을 해볼 만하다. 실제로 젠더 이퀄리즘에 관한 온라인 논란이 벌어지는 곳에서는 종종 ‘버림받음의 서사’가 출몰하곤 한다.

 

“남자 때문은 맞죠. 가장 큰 적이 기득권 남성임. 여자들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젊은 남성 줘패는 게 기득권 꼴마초 남성.. 그거에 들러붙는 게 꼴페미”[12]


저는 남자지만 남자로 사는 게 참 힘들어요. 저는 여느 강한 남자들과 다르게 축구나 운동 같은 것도 못 하구요. 힘도 약하고 할 말도 잘 못 하구요. (중략) 사회가 남성을 억압하고 요구하고 있는 사항들, 비단 군대뿐만이 아니라 남자는 강해야 한다, 한 집안의 가장이어야 한다, 남자가 전업주부로 있으면 백수다…. 당신네 여성들은 공감성이 높다는데 이런 고통은 보이지도 않나요? 아니면 공감성의 탈을 쓴 본인의 이기심인가요? 당신만 억압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나야말로 이 지구에서 버림받은 기분이니깐.[13]


실제로 최근의 남성성 위기에는 박탈감이 중요한 기제가 된다.[14] 구조적 성차별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30-40대가 되기 전이라면, (여성 혐오 경향이 상대적으로 덜 노골적인) 남성들의 생애 경로에서 성차별을 인지할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드문 편이다. 남녀공학을 다니는 경우 또래 여학생이 교사들한테 더 많은 보살핌과 애정을 받는다고 느낀다. 굳이 남녀공학이 아니더라도 이제는 여학생의 학업 성취도가 남학생보다 높아서 더 좋은 학벌과 학력을 가질 공산이 크다는 것도 알게 된다.[15] 그리고 데이트 비용에서부터 시작해서 가장 크게는 군대 경험에 이르기까지 박탈감을 극대화하는 장치는 도처에 산재해 있다. 요컨대 경제활동인구가 돼서 직장 생활을 하거나 결혼을 해서 젠더화된 가족을 꾸리기 전까지는 이들에게 남자가 차별을 받는다는 의식이 지배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화가 나서 여성 혐오를 일삼는 ‘사이버 마초’ 되기, 아예 모든 걸 포기하고 대체 쾌락을 탐닉하는 ‘초식남’ 되기. 그에 반해 여성의 경제 참여와 합리적 대우가 보장되는 후기-자본주의 시대에 맞춰 모든 것을 공평하게 하자는 ‘찌질남’의 길도 있을 것이다.[16] 젠더 이퀄리즘은 바로 이 세 번째 선택지와 보조를 맞추고 있는 셈이다.


일련의 혐오 전쟁에서 페미니즘 진영이 놓친 게 있었다면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남성성이 다양한 층차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예전부터 회자된 바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17] 그러니까 젠더 이퀄리즘이란 것은 부차적 위치의 남성성을 가진 존재들의 특정한 정서구조를 반영했던 것이다(뒤집어 말한다면, 모든 남성이 젠더 이퀄리즘 정서를 가진 것은 아닐 것이다). 이들은 현재 자신이 다중적 압력을 경험하고 있음을 끝없이 피력한다. 1) 헤게모니적 남성성으로부터의 실제적 압력(‘젊은 남성 줘패는 기득권 꼴마초 남성’), 2) 기성 젠더 구조에 의한 성적 규범으로부터의 압력(‘남자로 사는 고통’), 3) 그리고 부흥하는 페미니즘의 도전으로부터 나오는 압력(‘그거에 들러붙는 게 꼴페미’) 같은 것들이다. 젠더 이퀄리즘 정서를 단순 해프닝으로 한정해선 곤란하다는 이야기는 결국 이런 맥락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이들의 독특한 ‘성 평등’ 논리에서 다분히 급진적인 논점을 끌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젠더 이퀄리즘 정서가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표적을 갖고 있다는 것인데, 하나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이고, 다른 하나는 남성성의 분열을 포괄하지 못한 채 성별 대립 구도만 강화하는 페미니즘이다.


이들의 논법이 정말로 비합리적이기만 한 것일까. 그들은 논리적 진화를 추구하면서 자신들이 알고 있는 페미니즘을 넘어서고자 한다. 우선, ‘페미니즘 = 여권신장주의’라는 19세기적 등식을 동원한다.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않는 탓에 그들에게는 역사적으로 확장된 페미니즘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 때문인지 그들이 일상에서 접하는 페미니즘의 편린들은 죄다 여권신장주의로 응축된다. 그 다음, 성평등을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범주 안으로 끌어들인다. 성평등이 사회적 정의 또는 일종의 정언명령이 된 세계에서 혐오와 차별의 원흉이 되는 길은 절대 들어서선 안 되는 길이다. 이때 세대 관계 및 젠더 질서에서의 상대적 약자 위치는 제법 훌륭한 입지점이 된다. 결국, 젠더 이퀄리즘은 바로 이 자리에 똬리를 틀면서 ‘자기실현적 예언’[18]이 되었다. 성평등이 페미니즘의 전통적 이슈라는 점에서 젠더 이퀄리즘의 논법이 괴이하게 보일 테지만, 이들은 오히려 성평등 관점을 페미니즘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한다. 페미니즘을 특수주의 논리로 가둬두는 한편 허상뿐인 젠더 이퀄리즘 정서에 이론적 외양을 씌우면서 말이다. 그렇게 하면 혐오와 차별은 저들의 것이 되고, 이쪽에서는 혐오와 차별에 대항해 사회 정의를 실천하는 집단으로 자기-상상을 하게 된다.

 


3. 인종 차별을 하지 않는 ‘반다문화’

 

이번에는 반다문화 담론의 진화된 내용을 살펴보자.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사람들은 외국인들과 더 많은 접촉을 하면 배타적 민족주의 내지 인종주의 성향이 수그러들 것이라고 봤다. 낯선 타자에 대한 공포와 혐오가 문제니 낯이 익으면 문제가 줄지 않겠냐는 생각이었을 터이다. 2006년 노무현 정부가 다문화주의를 선언했던 이후로 10년이 넘게 시간이 지나갔다. 그리고 민족주의 교육이 아니라 다문화주의 교육을 받은 세대가 드디어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뜻밖이다. 딱히 인종 차별을 하는 건 아니지만 외국인이 싫고 못 믿겠다고 한다.[19] 다문화사회는 시작하자마자 역풍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역풍의 한 가운데에는 인종 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인종주의자들이 자리를 잡았다.


인종차별은 안 하지만 외국인은 믿을 만한 사람이 못 된다는 이율배반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까.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지만 인종주의적 사고를 하고 있다는 것에서 일정한 언어도단을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 이들에게 racism은 폭력적 언행을 동반한 인종차별과 관련되지만, 일군의 사람들을 정형화·종별화하는 것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를테면 어디선가 중국인 관광객을 보고 난 후 ‘중국인들은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는 자신이 인종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딱히 그 중국인에게 험한 말을 하거나 비하 발언을 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일본인 친구와 대화를 했던 경험을 토대로 ‘일본인들은 이중적’이라고 몰래 수다를 떨더라도 그는 인종주의자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상상한다. 인종주의에 대한 사회적 통념에 비춰보자면 완전히 틀린 생각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렇게 국적에 따라 민족성에 꼬리표를 다는 일(labelling)이 차별 행위로 가는 첫걸음이라는 점은 잠재적 위험성을 내포한다.


낯설지 않더라도 타자는 타자인 걸까. 이런 문화적 분류 작업이 그들의 경험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외국인과 접촉하면 할수록 인종적·민족적 편견이 작동하게 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동안 이들이 익혔던 다문화주의 교육이 그만큼 불완전한 것이었다는 의문을 품어볼 수도 있겠다. 실제로 이들이 학교생활에서 접했던 다문화 교육은 꼬리표를 떼기보다는 새로운 꼬리표를 다는 일이었을지 모른다. 어느 교사가 특별 보충 수업을 위해 이주배경 학생을 이렇게 불렀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지 않던가. “다문화는 끝나고 남아라.” 물론 다른 문화나 습속을 접했을 때 생소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곧바로 존중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여기 한국 땅에서 낯선 관계 방식을 수용한다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고 말이다.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인의 수는 계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외국인 유학생 12만명, 이른바 다문화 학생 10만명, 이들과 직간접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하며 성장했을 세대에게서 외국인 혐오가 가장 크다는 것은 정말 예기치 못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외국인 혐오의 근원으로는 일자리 경쟁과 범죄 문제가 꼽힌다. 외국인과 실제로 일자리 경쟁을 하는 건설 부문 일용직 노동자들에게서 외국인 혐오 수준이 높게 나타난다는 것쯤은 어느 정도 이해를 해줄 만하다. 그러나 고학력구조의 한국 사회에서 1, 2차 산업 부문에 종사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일자리를 위협한다는 건 뭔가 말이 안 되는 대목이다. 20대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범죄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아직도 유튜브에는 중국인 장기밀매나 조선족 인육 매매 등 외국인 혐오를 조장하는 콘텐츠들이 활개를 치지만, 정작 외국인 범죄의 비율이나 건수 그리고 심각성이 그렇게 큰 것인지는 불분명하다.[20] 그럼에도 외국인 노동자 등에 대한 한국인, 특히 청년층의 태도는 과거의 온정주의와 상반되는 배타주의적 태도로 점점 기울고 있다.


이것은 기존의 가설이 틀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례로 고전적인 시대에는 인종주의를 미디어가 부추긴 탓이 컸다고 하지만, 오늘날 미디어 경관의 분열증적 상황을 생각하면 확실히 지형이 변화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 한쪽에서는 다문화 공생을 유인하려는 교양 프로그램이 넘쳐나지만, 뉴스에서는 외국인 범죄 보도나 카더라 통신이 나오기도 하고, 범죄 영화를 표방한 <황해>, <공모자들>, <범죄도시> 등은 조선족이나 중국인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대놓고 조장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미디어 환경 자체도 다변화돼서 이제는 소셜 미디어나 온라인 커뮤니티 차원에서 외국인 혐오를 ‘대중적으로’ 확대재생산하기 바쁘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의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가 그만큼 분열적인 양상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공식적으로는 다문화주의를 배우지만 비공식적으로는 형해화된 민족주의를 학습하는 시대고, 문화적 상대주의의 교양을 익히지만 동시에 민족의 습속과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고무 받는 시대이니 말이다.


사람들 말마따나 다문화주의 시대의 반다문화 담론은 감정적 차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가령 경제 위기 시대의 곤궁을 소수자에 대한 공격을 통해 마술적으로 해소하고자 하는 정치적 무의식이 작동한 결과라고 말이다. 희생양 가설은 다른 문제로 생겨난 피해의식과 분노를 외국인에게 전위시켜 내적 결속과 확신을 다지는 과정에 주목한다. 그런 까닭에 혐오와 차별은 자신이 직접 대면하거나 경쟁하지 않았던 대상으로도 번져나갈 수 있다. 가령 유럽에서 무슬림의 테러 범죄와 한국에서 조선족의 흉악 범죄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지만 그들에게는 외국인 범죄라는 점에서 까닭 모를 공통분모가 형성된다. 외국인이 범죄를 저지를 토양을 만든 것은 다문화정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사회의 범죄와 프랑스 테러 사건의 문제 원인은 둘 다 다문화”가 되고 그럼으로써 “다문화의 위협은 세계 공통의 문제”로 인식되기에 이른다.[21] 그런 식으로 무슬림은 잠재적 테러리스트, 중국인·조선족은 장기밀매하고 인육 팔아먹는 범죄자가 된다.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마술이란 때때로 그게 마술인줄 알면서도 속아주는 게 마술이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저들은 위험하고, 또 위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민족주의가 재출현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렇게 볼 개연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 주지하다시피 세계 곳곳에서 극우민족주의가 준동하고 있다. 브렉시트와 트럼프 사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또 다른 이민의 나라 프랑스에서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약진은 이제는 익숙한 뉴스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세계적 추세는 단순한 반동일까. 민족주의 정서가 반다문화 정서의 근간이 된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반다문화 담론은 이민과 다문화주의로 인해 한국의 민족성과 사회 안전이 위협받는다는 민족주의적 방어 반응인 셈이다. 그러나 이것이 과거의 민족주의와 동일한 형태로 나타난다고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과거의 민족주의가 민족적-사회적 국가라는 결합태를 통해서 제기되었던 것이라면,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꽤 오랜 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라면, 반다문화 정서에 자리 잡고 있는 민족주의는 그와 같은 물질적 기반은 빼먹은 채로 전개된다는 점이 특징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그들의 민족주의는 이주민을 비롯한 이방인에 대한 구별과 배제의 논리를 중심으로 작동될 뿐, 구성원들의 실제적인 결속과 물질적인 보장을 요구할 원천적 명분으로서의 힘은 부재하다. 실제로 평창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논란에서 보았듯이 민족주의는 민족의 구심점이 되지 못한다. 민족주의는 단지 하나의 민족 문화와 다른 민족 문화의 차이를 구분하는 상징적 도구로서만 유용할 뿐이다.


한 가지 더 특징적인 것은 반다문화 담론은 다문화주의와 마찬가지로 문화 간의 차이라는 맥락을 핵심적인 기초로 삼는다는 점이다. 그래야만 우리의 민족문화를 남의 민족문화와 구별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민족주의의 포섭력이 약화된 시점에서 나타난 극우정당들의 새로운 정치 전략에 대해 잠시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그 유명한 히잡 논란에서 국민전선은 다문화주의를 곤궁으로 몰아넣었던 바 있다. 라이시테(laïcité) 이념의 동원이 대표적이다. 종교가 공적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면 안 된다는 원칙은 공적 공간인 학교에서 히잡을 쓰지 못하게끔 하는 배제의 근거가 되었다. 요컨대 그들은 이민자에 대한 배타심을 감정적으로만 자극했던 게 아니라 기성 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가진 대중들에게 이성적 논리를 제공해주었다.[22] 다문화주의에 관한 국민전선의 기상천외한 농담은 가히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요는 이주민의 문화구성체가 프랑스의 지배적 민족문화에 침식될 수 있으므로 이주민들이 자기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프랑스를 떠나야 한다는 논리였다. 히잡을 하고 학교를 다니고 싶으면 프랑스를 떠나라. 다문화주의의 이름으로. 이는 가장 프랑스적인 언어인 똘레랑스(관용)를 유지하면서도 극우정당 특유의 외국인 혐오증을 관철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2005년 방리유 사태를 기점으로 2015년 샤를리 에브도 테러를 거치면서는 철저한 불관용 원칙으로 다문화주의의 실패를 선언했지만 말이다.


이런 식으로 극우정당들은 특유의 극단주의 색채(인종주의, 파시즘, 민주주의 부정 등)를 완화하면서 공화국의 수호자로서의 이미지를 주조하는 ‘탈악마화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23] 이렇게 나타나는 극우 논리는 감정적 상태를 넘어 이성적 논리로 반다문화 담론을 정당화한다. 반다문화 담론은 단순히 피부색이 달라서 오는 이질감 때문에 취해지는 배제 담론이 아니게 된다. 실제로 근대화된 또는 근대화를 추구하는 세계에서 비근대적 문화가 공존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불편한 일일 수 있다. 치안 질서가 확립된 곳에서 흉악 범죄율이 높다고 간주되는 이주민이 유입된다는 것, 이제야 서서히 전통적 가부장제가 퇴조하는 마당에 여성 혐오와 차별 정서를 가진 이주민과 어울리게 된다는 것 등등은 단순한 공포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공존 불가능성 문제를 건드리게 된다. 이를테면 어느 이주민 가정에서 불과 열 세 살짜리 아이를 30대 남성에게 시집보내려 한다면 만 18세가 돼야 결혼이 허용되는 나라의 시민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반다문화 담론은 바로 이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그런 점에서 인종 차별을 하지 않는 반다문화라는 게 성립 불가능한 것만은 아닌 셈이다. (서두의 사례2에서처럼) 그들은 혈통이나 생물학적 동질성에 근거해서 이주민을 선별하(지만 그런 방식을 절대 노출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종 차별 혐의로부터 그들의 담론구성체를 보호하는 위장일 수 있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고려해본다면 그 자체가 사실일 수도 있다. 실제로 그들의 인종주의 언어는 생물학적 요소가 아니라 종교와 습속 등 문화적 요소들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슬람교도 어느 정도 요인이 되긴 하겠죠. 이슬람교가 사실 억센 사막 유목민을 다스리는 일종의 ‘규범’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니까요. 즉, 이슬람교의 계율로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억센 기질로 남의 나라의 법을 무시하고 쳐들어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24]


[인육캡슐 밀반인 사건 관련] 뉴스에 나왔는데 비위생적으로 취급해서 병균이 많고 몸에 해로운데 조선족들이 만병통치약으로 팔고 있죠. 조선족이 아니라 식인족이라고 불러야 합니다.[25]


자기 자신은 인종차별주의가 아니라고 강조하는 인종주의, 또는 인종 없는 인종주의, 따라서 생물학적 인종주의라기보다는 문화적 인종주의로 부를 만한 인종주의, 이것을 두고 발리바르를 따라 ‘신인종주의’라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26] 그래서 반다문화 담론에서는 이주민을 이야기할 때 항상 형용어가 따라붙는다. 그냥 무슬림이나 조선족이 아닌, (남의 나라 법을 무시할 정도로) ‘억센 기질’의 무슬림, (식인족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비위생적’인 조선족 등등.


민족주의도, 인종주의도, 반다문화 담론에 와서는 과거에 우리가 알던 그것과는 다른 배치에 놓이게 된다. 스스로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단언이 자기모순이 아닐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이런 맥락 덕분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문화적 차이를 강조하는 가운데, 한편으로는 그 차이에 따라 문화들을 구분하려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종차별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 하는 형식 논리는 다문화주의의 그것을 빼닮았다는 사실이다. 관주도 다문화주의가 제도적 인종주의였다면, 시민주도 다문화주의는 문화적 차이를 자연화(인종화)하는 차이주의적 인종주의였던 셈인데, 반다문화 담론은 이렇듯 민족성·종족성에 근거한 문화적 차이로부터 시작하여 외국인 혐오와 배제의 정당화 논리를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27]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다문화주의는 인종주의를 배격하려 했지만, 뒷문으로는 슬그머니 인종주의를 끌어들이고 있던 셈이다. 요컨대, 반다문화 담론은 다문화주의에 대립하기만 했던 게 아니라 다문화주의의 문화주의적 취약성을 숙주로 삼았다.


반다문화 담론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문화적 차이를 빌미로 이주민과 그들의 문화를 배제해야 하는데 이것은 인종 차별의 함정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반대해야 하는 것은 다문화‘정책’이지 특정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들은 인종주의라는 꼬리표를 떼고 휴머니즘에 입각한 담론과 행동을 지향하고자 한다. 휴머니즘. 즉, 모든 인간은 평등해야 한다. 이때 평등에 대한 요구는 젠더 이퀄리즘과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약자의 위치로 놓으면서부터 시작한다. 이를테면 “대기업에 들어가거나 고시 붙을 역량”이 있으면 외국인 혐오를 하지 않을 텐데, 그렇지 않은 이상 “외국인과 섞”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들 수 있다.[28] 외국인과 섞이는 경험이 혐오의 이유가 된다는 발상도 신선하지만, 어쨌든 여기서 초점은 이러한 인식이 외국인이 한국인의 잠재적인 경쟁 상대라는 맥락을 가진다는 점에 있다. 이때의 경쟁은 일자리 경쟁일 수도 있지만, 더 넓은 의미에서 유무형의 한정된 자원을 둘러싼 경쟁을 의미할 수도 있다. 가령,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다문화 정책은 우리들이 낸 세금을 축내는 것이다, 다문화정책이 이주민들의 무임승차를 돕고 있다, 이런 식으로 도움 받아 번 돈으로 해외 송금을 하고 있다, 우리 국민은 꿈도 꾸지 못하는 출산 및 육아 지원도 받고 있다, 등등. 우리에게는 있어야 할 것이 없는데, 저들에게는 없어도 될 게 있다고 믿는 듯하다. 그리하여 이런 상황을 초래한 다문화주의, 다문화정책은 폐지되어야 한다는 믿음은 더욱 강해진다.


현행하는 반다문화 담론에는 민족주의 경향, 문화적 차이의 인정, 평등주의 성향 등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살펴봤던 것처럼 이런 요인들은 각각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모두 긴밀하게 얽혀 있다. 그 덕분에 인종차별 없는 반다문화주의라는 독특한 위치가 생긴다. 주지하다시피 다문화주의는 포스트-민족주의 시대의 새로운 통치 이념으로 제기되기는 했지만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삐걱거리고 있다. 정확히 말해, 초국적으로 준동하는 자본의 운동과 비대칭적인 노동력의 국제적 이동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보충물로서, 다문화주의는 이론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운동적인 차원에서도 한계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사회적 규범이 소구력을 가지려면 그에 준하는 물적 기반을 동반해야 하는데 지금의 체계에서 구성원들의 사회적 권리를 충족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다문화주의는 지금 시대의 대안적 규범으로서의 해법을 담보해낼 수 있을까. 유감이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소란만 더 커질 것 같다.

 


4. 역차별 그리고 더 적은 민주주의

 

젠더 이퀄리즘과 반다문화 담론에 역차별 정서가 도사리고 있다는 점, 특별히 청년층이 연루돼 있다는 점이 마지막 토론의 대상이 되어야 할 듯하다. 이 두 논리는 일정 부분 겹치는 측면이 있다. 담론의 발화자 중 다수를 차지하는 집단은 공히 20-30대 남성들로 추정이 된다. 주로 온라인에 활동 기반을 두고 있고, 제도적 차원의 적극적 평등실현조치에 대해 역차별 정서를 가지고 있으며, 대다수가 일자리 문제에 민감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반다문화주의를 주장하는 대학생 김준규씨는 여성혐오 이슈에도 관심이 많다. “한국 사회에서 20대 한국인 남성은 정말 살기 힘들어진 것 같습니다. 여성에 치이고 다문화에 치여 아무 혜택도 못 받고 오히려 희생만 하는 것 같아요.” 김씨와 함께 온라인 웹사이트를 기획 중이라는 22살 박동진씨는 “주변에 커뮤니티를 조직하면 가입하겠다는 20대 남자들이 매우 많다”며 “소수자, 약자라는 이름으로 보호받는 사람들만 신경 쓰다가 막상 소외되는 것이 우리 20대 남성들”이라고 주장했다.[29]


젠더 이퀄리즘의 정서구조는 ‘여성 혐오에 대한 부인’과 ‘역차별 정서’ 그리고 이를 위시로 한 ‘페미니즘 혐오’의 결합태로 이뤄져 있다. 이와 상동구조를 보이는 문화적 인종주의의 담론적 질서는 ‘인종차별에 대한 부인’과 ‘역차별 정서’ 그리고 이를 위시로 한 ‘다문화주의 혐오’의 결합태로 이뤄져 있다. 여기서 역차별 정서가 결정적 동인이 되는 것은 주지의 사실과 같다. 사실 역차별 논란에 응답하는 방식은 그리 어렵지 않다. 가장 가깝게는 화제를 모았던 작가 손아람의 강연 영상을 참조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30] 그는 여기서 역차별이 선행 차별에 대한 일종의 차별 비용이라고 주장한다. 적극적 평등실현조치가 됐든 역차별이 됐든 이것이 구조적·제도적 차별의 반대급부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남성만 군대 가고 위험노동을 전담하는 것은 여성을 연약한 존재로 정형화해서 만들어진 결과이고, 남성만 데이트 비용을 내고 가정을 부양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경제적 불이익이 구조화돼서 나타난 결과인 셈이다. 마찬가지로 다문화교육을 하는 것은 배제됐던 종족적 소수자들을 포용하기 위한 것이고, 그들의 복지를 위해 시민의 세금이 투입되는 것은 인권의 사각지대가 만들어지지 않기 위함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차별 비용 같은 응답만으로는 역차별 정서가 말끔히 해소되지 않는다. 어디 페미니즘이나 다문화주의 이슈에서만 그럴까. 최저임금을 올리자 영세상인들은 임대료 인하 및 관리가 우선이라고 반발하고, 공항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려 하자 이번에는 기존 정규직들이 무임승차 운운하며 공정성에 시비를 건다. 제도에 대한 적극적 평등실현조치가 역차별로 번역이 되는 순간들이기도 하다.


이런 프레임 하에서는 어떤 문제도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적극적 평등실현조치의 옹호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①소수집단의 구성원들은 소수집단에 속한다는 사실만으로 과거의 차별에 대하여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고, ②현재와 장래의 기회 균등을 위해서는 과거에 공정한 경쟁에 참가할 기회를 박탈당한 소수집단에게 일시적으로 더 많은 혜택을 주어 진정한 기회의 균등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반대론자들은 이렇게 답한다. “적극적 평등실현조치는, ③기회 균등의 원칙에 반하며, ④소수집단에 속하지 아니한 사람도 피해자일 수 있으므로 우선적 처우를 개별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⑤과거에 소수가 차별받은 사실 때문에 차별에 관여하지 않은 후세의 다수가 희생되어서는 안 되며, ⑥차별받은 소수에게 그 차별을 받았다는 이유로 혜택을 주는 것은 과거의 차별로 인해 반사적인 이익을 받았을 뿐인 무고한 다수를 차별하는 것으로서 부당한 역차별(逆差別)이라고 본다.”[31] 결국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은 사회 정의에 호소하는 것밖에는 없는 것일까.


역차별이 차별 비용이므로 감내할 필요가 있다는 설득에 안티-페미니즘과 반다문화 성향의 20-30대 남성은 위의 ⑤번과 ⑥번의 반론을 즐겨 쓴다. 실제로 손아람의 강연 영상이 온라인 커뮤니티들에 확산되자 이른바 남초 커뮤니티들을 중심으로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과거에 차별이 존재했던 건 충분히 인정하지만 오늘날 같이 제도적 차별이 없거나 희박한 상황에선 ‘남녀갈등’ 같은 문제가 아니라 ‘세대갈등’의 문제로 봐야 한다, 게다가 제도적 차별도 안 받고 권리와 임금도 같이 누리는데 의무가 하나 더 적다면 남자가 느끼는 역차별이 아니라 여성의 무임승차다, 과거의 차별이란 것도 사실은 어머니들이 고생한 것 아니냐, 등등.[32] 실제로 강연 영상에서 남성 청중의 표정은 둘로 갈린다. 대략 40대 이상으로 보이는 남성들의 공감하는 표정과 주로 20대로 보이는 남성들의 논쟁하고 싶어 하는 표정. 이것은 역차별 정서가 그만큼 공고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들에게는 세대론적 프레임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함의한다. 그들에 의하면 기득권들에 의한 자원과 권력 독점이 20-30대 한국 남성에게까지도 부수적 피해를 입혔다는 이야기이다.


이들의 논박을 보고 누군가는 자가당착 같아 우습고 또 누군가는 사회적 책임의식이 없는 것 같아 화가 날 수 있다. 그러나 혐오든 차별이든 직접적 가해 사실이 없는데 왜 계속 박탈을 당해야만 하느냐는 항변에는 별로들 주목하지 않는 것 같다. 즉, 멀쩡한 상태에서 역차별 당한다는 정서가 아니라, ④번의 반론처럼 이미 피해자인데 또 피해를 감수하는 (굳이 말을 만든다면) 가중차별을 당한다는 정서인 것이다. 지금의 세계가 불평등과 착취에 의해 굴러가고 있다는 것쯤은 그들도 어렴풋이나마 안다. 30대 이후부터는 성별 임금 불평등이 심화된다는 현실도 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어지간한 외국인노동자 월급이 자기가 벌 수 있는 돈에 필적하거나 더 많다는 사실도 안다. 그리고 요즘 같이 희망이 불가능한 시대에는 정작 40대가 되어도 기성세대 남성들처럼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도 안다. 설사 한발 양보해서 적극적 평등실현조치를 수용하더라도 조치가 끝나고 난 다음 자기에게도 기회가 온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인간심리라는 걸 얼마나 신뢰할 수 있겠나. 한번 가진 자는 가진 것을 절대 놓지 않는다. 그러니 적극적 평등실현조치를 할 거면 자신들의 기회를 빼앗지 말고 있는 놈들(‘꼴마초’)한테나 가서 빼앗으라고 투덜거린다.


지금 시대에 역차별 정서는 기만이라기보다는 부조리극에 가깝다. 그것은 정치적 분노의 대상을 대면적 타자로 삼는 부조리 때문만은 아니다. 젠더 이퀄리즘이든 문화적 인종주의든 이 그림에는 어쩌면 ‘생존주의’[33]라 부를 수 있는 얼룩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바로 궤멸이나 파국으로 이어진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어쩌면 그들의 우울함으로부터 한두 가지 가능성을 타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는 민족적-사회적 국가 형태의 해체 이후, 즉 시장의 퇴행적 확장 이후, 청년들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문화적 질서와 정치제도 등등을 새로운 단계로 옮겨놓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현재 시점에서는 (이미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것처럼) 배제의 객관적 희생자 중 하나인 청년들이 극우 정치 이데올로기로 쏠릴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새로운 연대와 공동체의 동일화 형식을 추구하는 청년들이 더 활발히 움직이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문화적 차이에 관한 것인데, 우리는 (더 적절한 이념을 발견해내지 못하는 한) 페미니즘이나 다문화주의를 배격하기보다는 이를 더 급진적으로 사유해낼 가능성을 실현해야 한다. 그것은 재래의 상징적 구획으로 회귀하고 마는 양성평등론이나 문화적 다원론으로 이행하는 수준이 아니라, 개인적 수준에서든 국가의 수준에서든 문화적 차이를 실존적 수준에서 밀어붙이는 일이어야 한다. 그렇게 했을 때에야 민주주의를 위한 공민적 운동의 주체적 조건들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34]

 

물론 젠더 이퀄리즘과 반다문화 담론에서 보이는 새로운 질서의 실현가능성은 불투명하다. 여태껏 상상하기 힘들었던 정치 지형으로의 진입은 누구나 그리고 언제나 꿈꾸는 바이지만, 종종 이들은 배제로 인한 정치적 불만으로부터 더 ‘적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길을 채택하기 때문이다. 세계에 대한 불만과 역차별 정서의 공존은 분명 불안한 신호다. 다른 이가 어떤 혜택을 누릴 때 ‘나도 저 혜택을 줘’라고 말하기보다 ‘저런 특혜는 안 돼’라고 말하는 태도는 결과적으로 한정된 파이 내에서 권리의 충돌 게임에 임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즉, 그들은 현대 문명이 됐든 자본주의 질서가 됐든 (그렇게 불만이 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존치시켜둔 채 타인이 누리는 권리를 포기하라고 요구한다. 그런 까닭에 그들이 구성하는 배제에 대한 간파와 평등에 대한 갈구는, 민주주의적 데모스의 출현보다는 반(反)민주주의로 귀착할 개연성이 크다.[35]

Notes

  1. 2017년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선거운동본부 ‘파랑’의 「정책 간담회 이후의 질문에 대한 답변」( https://www.facebook.com/snuwave60/posts/513848585662613, 2017. 11. 12 ) 중 일부.
  2. 인터넷 커뮤니티 <다문화정책반대>, 「인종주의 발언은 제발 삼갑시다」, 2015. 9. 19( http://cafe.daum.net/dacultureNO/2xJ0/39122 ) 중 일부. 이 게시글은 커뮤니티 내의 인종주의적 발언이 나타나자 내부적인 문제제기 차원에서 작성되었다.
  3. 이 글에서 혐오는 ‘특정 대상에 대한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차별은 ‘그들에 대한 인식적 구별 및 행위적 배제’를 뜻한다. 이렇듯 혐오와 차별은 이론적으로는 분석적 구분이 가능하지만, 현실에서는 감정과 인식 및 감정과 행위가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게 보통이다.
  4. 강진구, 「대한민국을 진짜 ‘자살’하게 만드는 것은 누구인가」, 웹진 『문화 다』, 2015. 2. 6( http://www.munhwada.net/home/m_view.php?ps_db=intre_siron&ps_boid=51 ).
  5. 「[포커스] 젊은 ‘反다문화주의자’의 탄생 ― ‘외국인 신뢰 않는다’ 20대가 가장 높아」, 『주간조선』, 2449호, 2017. 3. 20.
  6. 인터넷 사이트 <나무위키>의 “한 사용자 및 문서 기여자들이 정체불명의 ‘Gender Equalism’이란 단어를 ‘성 평등주의’로 명명하고 페미니즘을 대체하는 새로운 학문적 사조인 양 서술하여 대중을 선동한 사건”으로 회자된다( https://namu.wiki/w/나무위키 성 평등주의 날조 사건 ). 현재는 ‘나무위키 성 평등주의 날조 사건’이라는 문서로 자동넘김 처리되어 있으며, ‘성 평등주의’ 문서 원문은 https://namu.wiki/w/나무위키 성 평등주의 날조 사건?rev=203 에서 확인할 수 있다.
  7. <페미위키>, 「젠더_이퀄리즘_날조_사건」, 2017. 12. 9( https://femiwiki.com/w/젠더_이퀄리즘_날조_사건 )
  8. 인터넷 커뮤니티 <오늘의 유머>, 「이퀄리즘(성평등주의)=주작?」, 2017.1.31( http://m.todayhumor.co.kr/view.php?table=comics&no=21042 )의 댓글 내용을 정리함.
  9. 남성연대가 설립됐을 때 대변하고자 했던 대상이기도 하다.
  10. 이것은 또한 “합리성·정상성과 남성의 권리를 함께 점유하고픈 한국 남성들의 욕망”이 투영되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이우창, 「‘나무위키 성 평등주의 날조 사건’에 대하여」, <허핑턴포스트>(한국판), 2017. 2. 3( http://www.huffingtonpost.kr/woochang-lee/story_b_14587524.html ) 참조.
  11. 일례로 이런 인식이 지배적인 듯하다. “구조맹을 벗어나기 위해 진정 우리를 곤경과 고통에 처하게 만드는 문제가 무엇인지 알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면, 공감맹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편견과 혐오를 넘어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창간 기획 ― 혐오를 넘어](2) 강자 아닌 약자 향해 … 거꾸로 흐르는 분노」, <경향신문>, 2017. 10. 9.
  12. 인터넷 커뮤니티 <MLB PARK>, 「손아람 작가"남성이 받는 역차별은 남자 때문".jpg」, 2017. 11. 26( http://mlbpark.donga.com/mp/b.php?p=1&b=bullpen&id=201711260011380255 ).
  13. 「[페미니즘S] 그럼에도 이퀄리즘이 아닌, 페미니즘이어야 하는 이유」, 『잠망경』, 2017. 2. 19( http://magazine.freecamp.kr/archives/3750 )에 달린 댓글 내용 정리.
  14. 김엘리, 「불확실한 삶에서 움트는 신군사주의」, 『창작과 비평』 165호, 2014년 가을; 천정환, 「강남역 살인사건부터 ‘메갈리아’ 논쟁까지 ― ‘페미니즘 봉기’와 한국 남성성의 위기」, 『역사비평』 116호, 2016년 가을; 김수아·김세은, 「‘좋아요’가 만드는 ‘싫어요’의 세계 ― 페이스북 ‘여성혐오’ 페이지 분석」, 『미디어,젠더&문화』 31권 2호, 2016; 오찬호,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 동양북스, 2016 등.
  15. 물론 이러한 경험은 중등교육 과정에 한해서만 이야기될 필요가 있다. 여전히 기술·과학·공학 분야에서는 남학생들의 학업성취도가 더 높은 편이고, 노동시장에서의 고질적인 젠더 불평등은 좀처럼 변하지 않고 있다.
  16. 이와 같은 유형 구분에 대해서는 엄기호, 「신자유주의 이후, 새로운 남성성의 가능성/불가능성」, 권김현영 외, 『남성성과 젠더』, 자음과모음, 2011을 참조.
  17. Rathwyn W. Connell, Gender & Power (Polity Press, 1987)는 패권적 지배력을 가지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으로부터 시작하여 ‘공모적 남성성’, ‘종속적 남성성’, ‘동성애적 남성성’ 등의 층차에 주목했던 바 있다. 물론 이런 관계는 고정적·정태적이라기보다는 역사적 환경에 따라 가변적·동적일 수 있다.
  18. <페미위키>, 위의 글.
  19. 『주간조선』, 위의 글.
  20. 강동관, 「체류외국인 범죄에 대한 진실과 오해」, 『IOM이민정책연구원 이슈브리프』 2015-14호, 2015년 12월.
  21. 김현희, 「외국인 범죄/테러리즘과 반다문화 정서의 “글로벌화” ― 시화호 토막살인사건과 파리 연쇄테러사건을 중심으로」, 『OUGHTOPIA』 31권 1호, 2016, 231.
  22. 오창룡·이재승, 「프랑스 국민전선의 라이시테(laïcité) 이념 수용: 이민자 배제 합리화 전략을 중심으로」, 『유럽연구』 34권 1호, 2016년 4월.
  23. 홍태영, 「국민국가의 민족주의에서 ‘민족’없는 민족주의로: 21세기 유럽 극우민족주의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다문화사회연구』 10권 1호, 2017, 8.
  24. 인터넷 커뮤니티 <다문화정책반대>, 「불체자 다량 배출 국가들은 민족성 자체가 좀 문제인 듯」, 2010. 4. 30( http://cafe.daum.net/dacultureNO/2xJ0/5793 ).
  25. 인터넷 커뮤니티 <다문화정책반대>, 「인육캡슐 밀반입해 판매한 조선족 구속」, 2013. 5. 26( http://cafe.daum.net/dacultureNO/2xJ0/28507 ).
  26. Etienne Balibar, “Is There a 'Neo-Racism'?”, in Etienne Balibar and Immanuel Wallerstein, Race, Nation, Class: Ambiguous Identitie (Verso, 1991), 17-28. 물론 이때의 문화적 인종주의가 생물학적 인종주의 다음에 출현한다는 식의 선형적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27. 전의령, 「인터넷 반다문화 담론의 우익 포퓰리즘과 배제의 정치」, 『경제와 사회』 116호, 2017년 겨울, 408-410.
  28. 인터넷 커뮤니티 <다문화정책반대>, 「‘외국인 신뢰 않는다’ 20대가 가장 높아 … 젊은 ‘反다문화주의자’의 탄생」, 2017. 3. 26( http://cafe.daum.net/dacultureNO/63EX/307 )에 달린 댓글 중 일부에서 참조.
  29. 『주간조선』, 위의 글.
  30. 「차별은 비용을 치른다」, 『세바시』, 848회, 2017. 11. 20( https://www.youtube.com/watch?v=cYuFnDyARBw )
  31. 「적극적 평등실현조치」,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용어사전>, 2008년 1월( http://www.humanrights.go.kr/hrletter/08011/pop06.htm ).
  32. 인터넷 커뮤니티 <오늘의 유머>, 「손아람 작가 : 남성은 역차별을 받고 있나 ?」, 2017. 11. 25(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umorbest&no=1526034 ); 인터넷 커뮤니티 <MLB PARK>, 위의 게시글.
  33. 김홍중, 「서바이벌, 생존주의, 그리고 청년 세대 ― 마음의 사회학의 관점에서」, 『한국사회학』 49집 1호, 2015년 2월.
  34. 이상의 가설적 검토에 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 「유럽적 인종주의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대중들의 공포』, 최원·서관모 역, 도서출판b, 2007, 400-406 참조.
  35. 어쩌면 다른 나라들과 달리 한국에서는 우익 정치세력이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게 다행스러운 일일 수 있겠다. 지구화하는 우익포퓰리즘 양상에 비춰보자면, 지금 저들은 (주류 정치에 대한 혐오를 공유하며) 자신을 대의해줄 정치 집단이 나타나면 바로 그쪽으로 쏠릴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전의령, 위의 글 역시 한국의 반다문화 담론이 우익포퓰리즘과 공명하는 측면이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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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및 운영위원입니다. 주전공은 사회학을 하고 있고 최근에는 플랫폼 자본주의, 도시재생과 민주주의 등의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시간이 나는대로 연구소 홈페이지에 들러서 이용자 여러분들과 교감하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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