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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문화사회연구소

해명되지 않는 ‘포획’과 ‘저항’

≪경제와 사회≫ 116호(2017년 겨울호)에 싣는 서평 원고입니다. 우리 연구소의 김주환 선생이 집필했던 『포획된 저항』(이매진, 2017)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이론적 쟁점들을 추려봤습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서평이지만 생산적 사유와 논쟁을 기대해봅니다.
by 김성윤 posted Dec 09, 2017 Views 737 Likes 1 Replies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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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경제에 대한 믿음은 지속될 수 있을까. 국내 사회과학계에서 사회적 경제 담론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한 것은 노무현 정부 당시인 2000년대 중반쯤이다(김준환, 2004; 한상진, 2004; 황덕순, 2004a; 황덕순, 2004b). 물론 1990년대부터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이 간헐적으로 강조됐고(노순규, 1991; 홍정화, 1991 등) 기든스의 방한으로 이른바 ‘제3의 길’이 초당파적으로 관심을 끌기도 했지만, ‘사회적 기업’이라는 구체적인 조직 형태가 모색되고 ‘사회투자국가’가 국정 의제로 확정된 2004~2006년을 사회적 경제의 본격적인 시발점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때부터 학계와 사회운동진영 그리고 기업과 정부 사이에서 사회적 경제를 둘러싼 담론과 실천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회적 경제가 해답이 아니라 문제에 가깝다는 사실은 시간이 갈수록 명확해지고 있다. 여기서 문제란 적어도 세 가지 수준에서 제기될 수 있다. 첫째, 현실적 문제. 초창기 사회적 기업에서부터 비교적 최근의 사회성과연계채권(social impact bond)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경제를 가동하다보면 관료주의적 행정, 전(前)-자본주의적 경영, 미성숙한 시민의식 같은 곤란이 뒤따르곤 한다. 둘째, 이념적 문제. 사회적 경제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 중 어느 것을 더 강조할지에 관한 문제들은 이 분야의 종사자들을 혼란에 빠뜨리곤 한다. 셋째, 정치적 문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사회정책 또는 경제정책으로 공론화되곤 하지만, 사회적 경제가 가지는 대안으로서의 적합성은 여전히 불분명한 상황이다. 사회적 경제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같이) 필요 이상의 과잉된 수사들로만 정당화될 뿐 실제로는 다차원적인 문제를 겪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적잖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사회적 경제 그 자체를 정치적 프로그램이라 볼 수는 없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시민들에게 사회적 권리를 보장하는 한편 대안적인 경제학적 교환 원리를 강조하는 데 그치는 수준이다. 따라서 사회적 경제의 허와 실을 짚으려면 실제로 사회적 권리가 보장되는지 경제 정의가 실현되는지 등을 따져보면 그뿐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대안 체제에 대한 기대감은 쉽게 줄어들지 않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의 기묘한 관계 때문이다. 첫째, 사람들은 종종 ‘사회적인 것 = 정치적인 것’이라는 관념적 혼동에 빠지곤 한다. 둘째, 이것은 단순한 착각만은 아닐 수 있는데 (정의를 어떻게 내리냐에 따라서는) 정치적 행위란 사회적 연대와 보장 같은 것이 있어야만 가능한 경우가 종종 있다. 셋째, 전-자본주의적 관행과 신자유주의화로 인한 파멸적 효과가 중첩적으로 나타나는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자본주의를 정상화하고자 하는 ‘사회적’ 실천들이 ‘정치적’ 저항의 자리를 대신할 수도 있다.


그런 까닭에 사회적 경제라는 장에는 개개인의 역사적 경험과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다양한 수준의 기대들이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의 조종을 울렸던 지구적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대안적인 정치적 좌표가 좀처럼 부상하지 않고 있다는 상황을 고려하면 사회적 경제의 정치적 효용성은 더욱 높이 어림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사회적 경제는 오늘날 우리가 처한 정치적 곤란을 여실히 드러내는 징후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바깥을 상상하는 것이 거의 무의미한 듯한 세계에서 가능한 실존적 행위란 고장 난 자본주의를 고쳐 쓰는 일밖에는 없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지점에 이르게 되면 하나의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사회적 경제는 기성 체제에 대한 저항의 발로일까, 아니면 정치적 한계상황을 가리키는 징표인 것일까.

 

 

1. 푸코주의적 기획 : 포획과 저항 사이

 

『포획된 저항』(이매진, 2017)은 후자의 질문을 긍정하는 저작에 가깝다. 저자 김주환은 이미 수년 전부터 사회적 기업과 윤리적 소비 등을 비롯한 사회적 경제를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범주로 이해해왔던 바 있다(김주환, 2012; 김주환, 2014; 김주환, 2016a). 저자 자신이 명시하듯, 『포획된 저항』에서 주로 동원하는 비판의 무기 역시 (이데올로기 비판이나 규범적 비판이 아닌) ‘푸코주의적인 신자유주의 통치성 비판’이다(33~36쪽). 사회적 기업에 관한 텍스트 분석에서 시작해서 담론적 실천과 사회적 실천의 양상을 비판하는 절차는 흠잡을 구석이 없어 보인다(1부). 이는 사회적 기업의 담론과 실제를 비판하고자 할 때 이 저서만큼 원숙한 저작물을 찾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게다가 사회적 기업과 사회적 경제를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일환으로 본다는 것은 학계나 현장의 확고(하지만 불충분)한 신념에 비하자면 용기 있는 발견과 추론이 아닐 수 없다.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2부에서는 ‘성공’과 ‘젠더’ 그리고 ‘사회적 기업가’ 등의 가치가 갖는 담론적 모순성을 지적하고, 3부에서는 ‘사회적인 것을 통한 위험 관리’ 및 ‘사회적 기업가로서의 주체성 생산’이라는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을 규명해내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사회적 경제에 대한 규범주의적(이고 때로는 종교에 가까운) 낙관론이 지배적인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환영할 만한 시도가 아닐 수 없다. 사회적 기업을 비롯해 사회적 경제의 실천들이 가지는 불가능성의 조건들을 파악하는 작업은 이론적으로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가 보는 사회적 기업 담론은 대략 다음과 같은 점들이 특징적이다. 사회 보장과 경제 정의를 위한 대안적 실천의 ‘성공’은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지만 여기서 강조점은 사회가 아니라 기업에 있다(4장). 여성 노동을 끌어안는 것처럼 보이지만 돌봄을 시장화하는 맥락에서 본다면 그 자체로 ‘젠더’의 모순을 심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5장). ‘사회적 기업가’는 기존의 사회운동가 정체성을 비판하는 가운데 등장하지만 그 핵심은 어디까지나 전문경영인에 있는 것으로서 오히려 진보와 보수는 암묵적 동맹을 맺고 있다(6장). 요컨대, 그에 따르면 진보 진영은 보수 진영에 대한 대항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다른 한편, 사회적 기업은 다음과 같은 사회적 실천의 구도 하에 놓여 있는 것이기도 하다. 첫째, 공동체·휴머니즘·참여 등의 규범적 가치들이 평가와 인증 등 다양한 테크놀로지들과 더불어 추진되고 있는데, “오히려 신자유주의 통치는 사회적인 것의 가치들을 통치 대상으로 변형한 뒤 활성화함으로써 더 효과적으로 작동한다”(223쪽). 이것은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실천이 신자유주의를 강화하는 의도치 않은 “정치적 오류(224쪽)”라고 할 수 있다(7장). 둘째, 사회적 기업가의 주체성을 생산하려는 지식과 통치의 테크놀로지들이 두드러지는데, 문제는 이와 같은 도덕적·변혁적 주체의 형상이 (연대나 사회변혁이 아니라) “취약 계층 일자리 창출과 사회 서비스 제공, 사회적 기업 조직의 재정적 자립이라는 협소한 수로로 흐르게 하는 통치의 배치”(263쪽)라는 점이다(8장).


저자가 동원한 신자유주의 통치성 비판은 ‘공동체를 통한 통치’를 비롯해 사회적 삶에 기업가적 정신이 결부되는 작금의 현실을 이해할 때, 효과적인 준거점이 된다. 게다가 이 과정이 특정 행위자나 사회세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주도된다기보다는, 담론구성체에서 통치성에 이르는 일련의 반(反)목적론적인 권력관계에 의해 (비의도적으로) 진행된다는 점을 고려하게 한다는 점에서도 더 많은 역사적 지점들을 착목하도록 돕는 측면이 있다. 물론 통치성 비판의 기획이 가지는 강점은 동시에 약점이 되기도 하는데, 다행스럽게도 저자 역시 이 부분은 암묵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약점 중 하나는 사회적인 것의 자리가 담론적 질서와 주체성 차원 등 주로 비경제학적 영역들로 고립된다는 점일 것이다. 예컨대 사회적 기업에 관한 경제학적 접근 같은 것들은 전체적인 진리 체계의 하위 담론쯤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는데, 결국 사회적 기업이 자본 일반의 이해관계와 맺는 사회경제적 효과 같은 문제들은 구조적으로 간과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논점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 어떻게 전체 경제에 의해 포획되는지에 관한 사안과도 연결되는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통치성 관점에만 집중할 경우에는 정치경제학적 효과에 관한 서술을 불문에 부침으로써, 사회적 경제를 ‘포획’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동학에 관한 논구를 회피하게 된다.


물론 푸코주의 특유의 반(反)경제학적 특징이 『포획된 저항』의 완결성을 저해한다고 볼 수는 없다. 실제로 저자 자신도 군데군데 경제학적 서술을 시도하고 있으며, 굳이 그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신자유주의적 통치 기술의 배치 형태와 효과를 분석해내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성과임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다만, 책 전반적으로 봤을 때 저자의 통치성 비판의 전략이 매끄럽게만 제시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유의해볼 필요가 있다. 저자 역시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통치성 비판에는 또 다른 함정이 있을 수 있다. ‘개인들의 거부와 저항에 주목하는 비판’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36~38쪽)가 반증하는 것처럼, 통치성 분석은 구조기능주의적 혐의가 있다는 재-비판에 직면하곤 한다. 요컨대 저항이 포획되는 양상을 보여주는 장점이 있지만 역으로 저항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데 있어서는 약점이 고스란히 노출되는 것이다. 이런 비판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인지, 저자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의 관점을 통해 통치성 비판의 약점을 보완하고자 한다.

 


2. 그람시주의적 전략 : 지배와 대항 사이

 

저자 김주환은 이미 2012년 「신자유주의 사회적 책임화의 계보학」과 2014년 「사회적 기업 성공담론의 구조와 신자유주의 헤게모니」로 ‘사회’라는 접두어를 가진 경제적 관행들과 신자유주의 체제 사이의 관련성을 드러내고자 했던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이들 ‘사회적인’ 관행은 사회적 책임성의 윤리를 주체성에 각인시키는 신자유주의 통치 방식의 변화를 가리키며, 따라서 이를 대안으로 간주하는 몇몇 진보진영의 흐름들은 비의도적으로 신자유주의 체제를 강화할 우려가 있다. 『포획된 저항』이라는 다소 도발적인 책 제목 역시 그와 같은 논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의 저작에서 사회적인 저항적 실천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헤게모니화에 기여하게 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포획된 저항』이 나오기 1년 전인 2016년 「한국의 사회적 경제에서 연대와 민주주의 이념의 기능 맥락과 규범 맥락의 동학」이란 논문에서 저자는 연대와 민주주의를 향한 사회적 경제 활동가들의 규범적 행위가 신자유주의 통치성과 경합하면서 사회적 경제의 복합성과 역동성을 주조해내는 측면을 강조했던 바 있다. 이는 활동가들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자신의 기존 논지를 일정 부분 정정한 것이기도 한데, 그는 “사회적 경제가 단순히 신자유주의 체제를 보완하는 기능적 역할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김주환, 2016b: 133)라면서 ‘저항의 포획’이 이전 논문들에서 논의했던 것처럼 완결성을 가진 메커니즘은 아님을 역설한다. 『포획된 저항』에서 이론적 자원 중 하나로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채택한 것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의 소산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저자와 더불어 사회적 경제에 대해 이론적·정치적 경계를 견지해왔던 필자의 입장에선 최근 논문(김주환, 2016b)에서 보였던 저항과 포획에 대한 그의 관점이 다소 징후적으로 여겨진다. 물론 그의 입장 변화는 단순히 담론 분석과 심층 인터뷰라는 연구 방법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일 수 있다. 담론의 질서에선 명확하던 것이 개개인의 내면에서는 불명확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을뿐더러, 전자의 방법보다는 아무래도 후자의 방법이 연구 대상으로부터 연구 설계나 서술 방식에서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물론 입장 변화 자체가 문제라거나, 변화된 입장이 최근 저작에 충분히 반영되어 있지 않은 점 같은 게 문제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책 전반에 깔린 통치성 비판의 기획과 그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헤게모니론이 합리적으로 접합될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 토론의 여지가 생기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이론적 배경 부분(2장)에서 약속한 것과 달리 ‘개인들의 거부와 저항’이라는 요소는 희박해진다. 책의 구조상 저자의 최근 연구 결과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헤게모니론의 적용이 충분치 못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염려되는 점은 『포획된 저항』에 적용된 그의 헤게모니론이 앞으로도 지배와 대항의 대립적 구도하에서만 전개될 공산이 크다는 사실에 있다. 물론 통치성을 문제 삼는 비판의 구도에서 지배 헤게모니가 구축되고 관철되는 방식을 살펴보는 작업은 비교적 용이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저자 역시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 저항적 실천을 ‘포획’하면서 헤게모니화하는 동학을 실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지배와 대항의 ‘힘 관계’를 이해할 때 몇 가지 사항이 덜 고려된 듯한 인상은 지우기 어렵다. 우선, 사회적 기업 담론에서 대항 헤게모니가 (진보진영의 무능력에 의해서든 공모관계에 의해서든) 출현하지 않음을 지적하지만, 그 사정에 관해서는 원하는 만큼 역동적인 해명을 시도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이는 저자가 연구대상을 사회적 기업으로 삼아서 발생한 곤란일 수 있다. 왜냐면 사회적 기업 분야는 상대적으로 경영학이라든가 자활운동 등 연성화된 생활정치 영역에서 형성됐기 때문에 갈등과 경합의 양상이 상대적으로 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1] 그런 까닭에 사회적 기업의 자장 내에서 지배에 반정립하는 대항 헤게모니의 가능성을 기대하기란 애초부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기왕 대항의 전략을 구상한다면 통치성이 요구하는 행실(conduct)과는 다르게 행하는 것으로서 푸코의 대항-품행(counter-conduct) 논리를 따르는 것이 무방했을지 모른다. 만약 푸코주의적 비판으로부터 일관성 있는 전략을 추진한다면 결국 실천의 장은 사회적 기업의 바깥 또는 곁에서 찾아지는 게 아닐까. 그러나 통치성에 대해 비판을 전개했다가 그람시주의적으로 정치적 가능성을 타진하려는 그의 시도는 묘한 엇박자를 만들어낸다. 문제의 대상은 통치성 같은 구조화된 형식일 텐데, 해법은 신자유주의 세력 또는 지배 세력과의 투쟁 같은 다소 고전적인 초점으로 회귀할 가능성마저 내비치기 때문이다.[2]

 

물론 이런 논점들은 그의 후속 작업에서 해소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려가 남는 부분은 그가 지배와 대항의 힘들에 대해 비교적 단선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점에 있다. 이는 책에서 신자유주의와 통치성 그리고 사회적 기업 등에 관한 역사적 접근이 비교적 짧게만 논의된 탓도 있을 텐데(3장), 어쨌든 그에게 ‘지배적 힘’은 국가와 시장을 위시로 한 신자유주의 세력, 그리고 ‘대항적 힘’은 시민사회운동 진영 같은 식으로 등치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각각의 세력들이 가지는 혼성과 균열의 계기 그리고 실제적 모순성 등을 이해하는 데에는 일정한 곤란이 뒤따를 수도 있다.


가령, 책 말미에서 “한국의 진보적 시민운동 진영이 여전히 신자유주의를 시장 논리에 따른 사회적 영역의 축소와 억압이라는 견지에서 보는 한 (중략) 그런 요소들을 통치 목적을 위해 적절히 배치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신자유주의 통치의 작동 동학을 볼 수 없다”(283쪽)고 강조하는데, 이런 이해방식은 얼마간 진실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부분적 진실일 수밖에 없다. ‘사회적 영역의 축소와 억압’에는 신자유주의뿐 아니라 전-자본주의적 요인도 있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진보적 시민운동 진영’에도 정치적·이론적 입장이 다양하다는 점 등에 대해서는 초점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담론적 실천이든 사회적 실천이든 그 안에 내재하는 역사적 모순성에 대한 고려가 요구되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3. 하버마스적 해법 : 기능과 규범 사이

 

저자에 따르면, 신자유주의 통치성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시장 또는 경제와 사회의 구분, 시민사회와 국가의 구분 자체를 해체하고 시장이나 경제 외적인 요소라고 간주되던 모든 영역을 시장과 경제의 영역으로 간주한다.”(50~51쪽) 여기서 ‘해체하고’의 앞부분에 주목하는 것과 그 뒷부분에 주목하는 것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생길 수 있다. 어떤 상황을 문제화하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대응 전략이 다른 방식으로 취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앞부분에 주목한다면 우리가 여태껏 알고 있던 일체의 자유주의적 구분법이 신자유주의화를 통해 실제적으로 ‘혼성화’됐다는 점에서부터 출발할 것이고, 뒷부분에 주목한다면 경제적인 것으로부터 사회적인 것을 ‘구출’해내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 두 가지를 양자택일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본다. 한편에서는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작동 방식 속에서 국가, 사회, 시장, 개인 등의 관계 설정 방식이 재구조화되고 있다는 관점”(33쪽)을 피력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적인 것을 어떻게 되살릴까”(4부 부제)하는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좀처럼 드러내진 않지만) 하버마스류의 ‘규범적 비판’(30쪽)의 입장에도 서 있는 셈이며, 재구조화된 세계에서 새로운 정치를 모색하기보다는 뒤틀어진 세계를 바로잡는 정치를 모색하려는 뉘앙스를 풍기기도 한다. 어쩌면 바로 이 지점이 『포획된 저항』 이후로 사회적 경제에 대해 그가 취하고자 하는 입장일 수도 있다. 저자는 저항이 포획된 형세를 그려내면서도 포획으로부터 벗어날 새로운 저항의 가능성을 은밀하게 타진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또한 푸코와 하버마스 사이의 오랜 긴장을 고려한다면) 저자가 언젠가는 푸코주의적 기획을 폐기하거나 도구화할 수 있겠다는 예감이 들기도 한다. 억측일 수 있겠지만 이런 예상은 흥미로운 부분일 수 있다. 사회적 경제 안에서 정치적 가능성을 찾겠다는 해법은 그 자체로 고전적인 정치학을 채택한 것으로 보이는데, ‘사회적 기업이란 장 안에서 사회적인 것을 되살린다’는 규범주의적 보편성을 추구한다면, 전술했던 것처럼 통치성의 포획력을 강조하는 푸코주의적 지식 체계와는 근본적으로 불화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세 가지 이론적 계기들(푸코, 그람시, 하버마스)을 상황에 따라 병치시킬 유혹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식민화 테제만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국가-시장-시민사회가 혼성화되는 상황에서 시민사회적 가치를 급진화하고 강화한다는 게 실제로 가능할지는 여전히 의문점으로 남는다. 결국, 통치성 비판 또는 고전적 정치 관념 둘 중 하나를 어느 시점에선가는 외면해야 하지 않을까.


한 마디로 말해, 『포획된 저항』은 제목이 주는 단호함과는 달리 얼마간 불안정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사회적 기업의 통치적 기능에 대한 비판이 있는가 하면, 거부와 저항의 징표들을 찾으려는 탐구가 섞여 있고, 심지어는 사회적 실천들의 규범주의적 맥락까지도 얼룩처럼 묻어 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저항과 대항 정치에 대한 저자의 의지가 곳곳에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흔적이 정치적 미덕이 될지 아니면 의도치 않은 오류가 될지는 (누구나 겪어왔거나 겪게 될 문제라는 점에서) 두고두고 지켜볼 만한 대목이 아닐까 싶다.

 


참고문헌

 

김주환. 2012. 「신자유주의 사회적 책임화의 계보학 ― 기업의 사회책임경영과 윤리적 소비를 중심으로」. ≪경제와 사회≫, 96호. 210~251쪽.
―――. 2014. 「사회적 기업 성공담론의 구조와 신자유주의 헤게모니」. ≪문화와 사회≫, 16호. 223~274쪽.
―――. 2016a. 「한국에서 사회적기업과 신자유주의 통치 ― 사회적인 것의 통치 메커니즘을 중심으로」. ≪경제와 사회≫, 110호. 164~200쪽.
―――. 2016b. 「한국의 사회적 경제에서 연대와 민주주의 이념의 기능 맥락과 규범 맥락의 동학: 사회적 경제 활동가들의 인터뷰 분석을 중심으로」. ≪기억과 전망≫, 35호. 93~139쪽.
―――. 2017. 『포획된 저항 ― 신자유주의와 통치성, 헤게모니 그리고 사회적 기업의 정치학』. 이매진.
김준환. 2004. 「사회적 자본과 사회적 기업에 관한 고찰」. ≪한국사회≫, 5호. 89~120쪽.
노순규. 1991. 「장애인고용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 ≪장애와 고용≫, 1권 2호. 64~66쪽.
한상진. 2004. 「한국에서의 사회적 기업 : 비정부조직, 정부, 기업 간 파트너쉽을 통한 발전 방향」. 한국사회학회 사회학대회 논문집, 2004년 12월. 129~140쪽.
홍정화. 1991. 「우리나라 기업의 사회적 책임수행에 관한 연구」. ≪경영학연구≫, 21권 1호. 1~36쪽.
황덕순. 2004a. 「사회적 기업, 사회적 일자리를 통한 고용창출」. ≪국제노동브리프≫, 2권 5호. 1~3쪽.
―――. 2004b. 「유럽에서의 사회적 기업의 확산과 국가의 지원」. ≪국제노동브리프≫, 2권 6호. 72~78쪽.

Notes

  1. 그에 반해 사회적 경제 전체 장으로 옮겨 보면 진보와 보수, 그리고 각각의 실천 형태들(협동조합, 마을만들기, 자원봉사, 도시재생 등)에 따라 정치적 견해와 이해관계가 상이해진다.
  2. 어쩌면 독특성(singularity)을 통한 대항과 보편성을 둘러싼 대항 사이의 접합을 상상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은데, 그것의 실효성에 관해서는 더 많은 논구가 필요하겠지 싶다.

Who's 김성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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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및 운영위원입니다. 주전공은 사회학을 하고 있고 최근에는 플랫폼 자본주의, 도시재생과 민주주의 등의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시간이 나는대로 연구소 홈페이지에 들러서 이용자 여러분들과 교감하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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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11'
  • 김주
    김주환 2017.12.14 08:32
    역시 김성윤소장님의 이론적 날카로움이 빛을 내는 분석입니다. 저 스스로 이 책을 쓸 때 느꼈던 일정한 이론적 긴장과 혼란 그리고 이 책의 문제의식과 여러 부족한 점들을 보완하고자 다른 구도로 한국의 사회적 경제에서 사회적인 것의 문제를 보고자 이론적 탐색을 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느끼고 있는 여러 난점들을 매우 정확하게 잘 집어주고 있는 글입니다.
    사실 이 책을 쓸 때는 한국에서의 논의되는 사회적인 것이나 정치적인 것에 대한 급진주의적인 이론적 논의 지형과는 무관하게(또는 무관심하게) 사유하던 상황이었습니다. 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들어와서야 한국에서 사회적인 것이나 정치적인 것에 대한 논의가 상당히 깊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칼 슈미츠, 무페, 아감벤 등이 떠오르는 제도 바깥의 초법적 위상을 가지는 정치적인 것에 대한 논의). 그런 점에서 책을 읽으신 분들은 <포획된 저항>에서 논의되었던 사회적인 것이나 정치적인 것이라는 용어의 개념 등이 한국에서의 논의 맥락과는 다소 유리된 채 나이브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느낄 것입니다.
    어쨌든 김성윤소장님의 이 서평은 저의 고민과 제가 가지고 있는 이론적 긴장을 매우 잘 포착했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 논점만 말을 해보자면, 첫째, 저는 앞으로 대항행실 수준에서 정치적인 것을 사유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행실은 구조화된 힘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행실과 물질화된 구조적 힘으로서 통치 메커니즘을 바로 맞대응하는 구조가 될 경우 반응은 두 가지로 결판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하나는 궁극적으로 대항행실이 통치 메커니즘에 흡수되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통치 메커니즘과는 무관하게 된 자기관계의 새로운 산출로서의 미학적 삶의 스타일의 산출이라는 낭만화된 급진적 미학적 실천입니다. 둘 모두 선택지가 될 수 없을 듯합니다.
    두번째 문제는 푸코 통치성 프레임의 도구화나 폐기 가능성 문제인데, 요즘 저의 문제의식은 기능맥락화된 체계의 힘과 도덕 및 규범 네트워크로서 정치화된 사회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사이의 긴장과 대립 구도입니다(저는 이것을 사회적인 것의 기능적 적용맥락과 대안적인 규범적 구성맥락 사이의 변증법으로 표현합니다) . 제가 도덕 및 규범 네트워크로서 사회적인 것을 정치화된 내용을 가지는 것으로 봐야한다는 이야기는 어떤 '보편적 도덕 및 규범'을 그 자체 목적으로 상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제가 생각하는 도덕과 규범은 철저히 니체-마키아벨리적인 노선에서 헤게모니 틀 안에 들어오는 도덕과 규범입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 사용되는 도덕과 규범으로서 전략과 전술 운용의 대상으로서 도덕과 규범인 것이지요. 이것은 푸코 vs 하버마스의 구도로 끌고가고자 함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을 권력(푸코), 자본(맑스)와 같은 시스템 기능을 통해 구성되는 것으로 보는 관점과 복수의 인간들 사이의 도덕과 규범를 통해 구성되는 것으로 보는 이원적 관점을 취하면서, 그 각 차원이 힘을 공급받는 차원들을 정치적인 것으로 놓는 것이지요. 니체-마키아벨리적인 요소를 추가함으로써 사물의 논리로서 푸코의 권력 분석에 정치적 역동성을 부여하고 싶은 것입니다. de facto 대 de jure, 포르투나 대 비루투(마키아벨리), 체계통합과 사회통합(Lockwood), 체계와 생활세계(하버마스), factual order 대 normative order (파슨스) 같은 이항구도를 투쟁이라는 정치적인 것의 지평에 위치시켜 다루고자 합니다. 그럼으로써 근본적으로 생산력 대 생산관계-계투나 , 자본의 법칙 대 계급투쟁 같은 맑스의 구도와 유사한 틀로 끌고 가려는 것이지요. 따라서 제가 하버마스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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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윤 2017.12.16 11:25
    counter-conduct가 불충분한 제안이라는 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본문에서는 단지 서술의 완결성이라는 맥락에서만 언급했던 것이었습니다ㅎㅎ('포획된 저항'은 그 같은 가상적 완결성이 없기에 흥미로운 저작이라고 보는 편입니다). 어쨌든 미학적 실천은 실존적 결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기는 하지만, 정치의 다양한 맥락을 포괄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무조건적으로 의탁하기는 어려운 논점이기는 합니다. 그런 점에서 어느 시점에 도달하게 되면, 즉 분석가로서의 푸코라는 효용이 한계에 다다르게 되면, 다른 관점의 프레임을 끌어오거나 구축하게 되는 건 불가피하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사회적인 것을 헤게모니 투쟁에 의해 두 가지 (이상의) 원리가 역동적으로 경합한 결과물로 보는 관점 역시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도덕 및 규범에 대한 분석적 구분은 이론적으로 매우 인상적인 시도로 여겨집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살짝 불안감이 있습니다. 말씀하셨던 "이항구도"는 시스템과 인간, 구조와 행위 같이 사회학주의의 흔적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자본을 시스템 기능에 의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자본(주의)의 동학은 (단순 법칙이 아니라 경향적 법칙 같은 아이디어에서처럼) 법칙적 운동은 물론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 간/내 투쟁을 위시로 한 다양한 사회적 실천들을 수반한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째, 기능적인 것과 규범적인 것의 구별에서 기능적인 것을 헤게모니에 대한 역사적 투쟁의 결과로'도'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점. 선생의 저술에서 유추해보면 어떤 지점에선 그렇게 보는 듯하면서도 또 어떤 지점에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능 맥락에 대한 계보학적 접근이라든가 정치경제학 비판의 가능성이 엿보이다가도, 어느 시점에서는 체계나 법칙 같이 다분히 초역사적인 영역으로 보는 것 같은 느낌도 주거든요.

    둘째, (첫 번째 논점에서 파생되는 것으로서) 정치의 구도를 이항 관계로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점. 이항구도는 여전히 체계(기능적 적용 맥락)와 행위(규범적 구성 맥락) 사이의 대립을 연상시킵니다. 저는 오히려 그렇게 보면 정치의 역동성을 포착하는 데 곤란이 따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적으로 말해, 체계의 역사적 형성이라든가 행위의 퇴행적 가능성 같은 논점들이 부차화되거나 간과될 소지가 있어보인다는 거죠. 댓글을 보면서 계급투쟁을 '체계에 대한 저항적 실천'으로 등치시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사회학적 구도와 마르크스적 구도가 과연 행복하게 만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재고의 여지가 있어보입니다.

    요컨대 제가 던지고자 하는 제안은 역사이론적인 맥락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글 한 편 어쩌면 저작 한 권에 다 담아내기 어려운 부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만, 어쨌든 부족한 서평,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김주
    김주환 2017.12.18 07:13
    김성윤 소장님의 코멘트 취지 충분히 공감합니다. 요즘 저는 전통적인 아카데믹한 사회학의 기초적인 구도에 조금 더 밀착시켜서 사유를 하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사회학 전공을 했으나 사회학 정체성보다는 큰 범위에서 맑스주의 정체성을 가지고 사유해왔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생각해보니 맑스주의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론 전통을 포괄하는 사회학의 기초적인 이론구도들 (과거에는 무시해왔던 구도들)이 다 괜히 나온 것이 아니며 나름 매우 훌륭한 이론적 자원이 된다는 것을 느낍니다. 맑스주의의 이론적 자원만 가지고 있으면 더 넓은 사유가 가로막히는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비맑스주의적인 사회학적 기초 관념들을 무시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엄청난 손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 둘을 어떻게든 이론적으로 결합시키는 문제에 요즘은 더 많은 흥미를 느낍니다. 요즘은 헤게모니라는 맑스주의 개념을 인류학전통의 주술 논의, 사회학전통의 상징적 상호작용론(고프만의 전략적 상호작용)의 논의와 연결시켜보려고 머리를 굴리고 있답니다. 기능적 적용 맥락(체계통합) VS 규범적 구성맥락(사회통합의 질서차원)이라는 용어는 비맑스주의적 용어죠. 오히려 전통적인 de facto와 de jure의 구분에 터하는 것이고, 보수적인 사회학자로 알려진 파슨스의 factual order와 social order의 구분을 그 뿌리로 가지죠. 하지만 기능적 적용 맥락과 규범적 구성맥락의
    대당이라는 관점이 터하고 있는 system integration과 social integration의 구분은 파슨스와 이론적으로 정반대 진영에 속하는 네오 맑시스트 Lockwood가 파슨스의 위 구분을 생산적으로 맑스주의와 결합시켜 정교화한 개념입니다. '어째서 객관적 조건(일종의 체계통합 메커니즘)은 혁명의 조건을 충족하고 있는데 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가'라는 맑스주의의 골치거리가 되는 문제를 Lockwood가 설명하기 위해 비맑스주의 요소(뒤르켐 전통의 요소)를 끌어온 것이죠. 이때 social integration은 '어떻게 사회를 통합시킬 것인가' 따위의 보수적 질문에 답하고자 하는 용어가 아니라, 사물과 사물(상품과 상품의 관계)의 관계가 아니라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회적 관계(맑스주의에서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생산관계[계급관계])가 '질서를 이루거나 갈등에 들어가거나' 하는 메커니즘을 지칭합니다. 당연히 Lockwood는 계급투쟁을 이 social integration의 메커니즘에 넣습니다. 사회변동을 설명하는 맑스주의의 두 가지 축인 생산력 발전(사물의 논리)과 계급투쟁(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회적 관계의 논리) 중 후자를 social integration에 전자를 system integration에 배치하는 것이죠. 맑스가 상품물신성을 '인간과 인간의 사회적 관계'가 '사물과 사물의 사회적 관계'로 전도되는 현상이라고 정의할 때, 이는 social integration이 system integration으로 전도되는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것이죠. 소장님 말처럼 저도 실제의 작동에서 그 둘을 깔끔하게 구분할 수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Lockwood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그 구분은 어디까지나 관점주의적인 이분법에 따른 개념분석적 구분일 뿐이죠. 그래서 저도 계급투쟁이라는 사회적 관계라는 바다 위에 system integration과 (규범과 통합 메커니즘으로서) social integration을 위치시키려 하고 이를 위해 끌어올 수 있는 좋은 이론적 자원이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이라고 봅니다. 첨언하여 체계통합과 사회통합의 대당은 쉽게 말해 사물들의 관계와 인간들의 관계의 대당으로서 구조와 행위의 대당을 대체하기 위한 이론 구도입니다(참고로 소장님이 우려하는 체계와 규범의 대당 구도로 가져가는 하버마스식의 구도와는 달리 그것은 체계와 규범의 구분에 정확히 일치하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는 규범의 메커니즘도 있지만 전략적 투쟁의 메커니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전략의 메커니즘 안에서 도덕과 규범은 전략적 활용 수단이 되겠죠). 구조와 개인을 맞대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사회통합의 축을 넣고 구조를 체계통합으로 대체하여 인간의 행위를 조정하는 두 메커니즘으로 복수의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라는 사회적 관계차원(social integration)과 사물과 사물 사이의 관계라는 체계차원(system integration)을 설정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기서 대당은 구조와 행위 사이에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법칙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회적 관계의 법칙 사이에 설정됩니다. 저는 이 구분을 오해하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맑스주의 전통에서 이 social integration차원에 해당하는 계급투쟁은 맑스 이후 그다지 적절하게 사유되어 오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맑스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말할 때 이것은 익명적 사물들의 체계 논리로서 생산력의 발전과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 사회적 관계로서 생산관계를 결합시키는 이론적 시도였죠(체계통합과 사회통합의 결합). 가치법칙에 내재되어 있는, 가치법칙의 설명 요소로서 계급투쟁의 조건을 드러내는 <자본론>의 논의들 역시 체계통합과 사회통합을 결합시키는 분석 전략이죠. 하지만 자본론에서도 그렇고,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라는 테마도 그렇고 경향적으로 사회통합은 뒤로 밀리고 체계통합의 결과로서 종속변수가 되는 경향이 매우 강하죠. 그탓일까요. 우리 맑스주의자들은 습관적으로 사회변동을 이론적으로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변화나 경제적-객관적 구조의 변화에 의한 것으로 사유하곤 합니다. 계급투쟁은 이론적 설명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죠. 그럼 이게 정통 맑스주의만 그러느냐. 그렇지도 않죠. 알뛰세나 발리바르가 물신성(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회적 관계가 사물과 사물 사이의 사회적 관계로 전도되는 현상)이 야기되는 사회구조적 요인을 분석할 때도 그것은 inter-subjectivity가 아니라 inter-objectivity 수준에서 언급됩니다(사회적 관계를 inter-objectivity로 파악하는데서 알 수 있듯이 인간마저도 사물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죠). 이들이 이론적 반인간주의를 택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겠지만 그 결과 사물과 사물 사이의 관계만 남습니다. 당연히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서 진지하게 언급되어야 할 도덕과 규범의 문제는 인간주의의 문제틀로 간단히 배제되어 버리고 사회적 관계는 사물 사이의 관계로 환원됩니다. 지젝도 똑같죠. 물신성을 냉소주의와 연결시키는 지젝의 경우 '다 알면서도 행한다'라는 행위 공식이 나오는 것도 뭔가 사물적 성격을 가지는 시스템이 나 대신 저항해주고, 비판해주고 있기 때문이죠('전체주의적 웃음'). 여기서도 인간 행위는 시스템의 한 계기로 환원됩니다. 이들에게 계급투쟁은 어디로 간 것인지... 계급투쟁도 사물과 사물의 투쟁으로 봐야하고 어떤 시스템이 대신해주는 것으로 봐야만 하는 것인지..... 물론 알뛰세, 발리바, 지젝 등으로 이어지는 논의들은 확실히 체계논리가 날로 강해져 그것이 우리의 사고, 행위, 감정, 저항 등을 대신해주고 있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의 현실을 정확히 집어낼 수 있게 해줍니다. 따라서 이들의 논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에 대한 매우 유용한 분석 도구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결코 놓쳐서는 안되는 것은 이들의 논의 프레임에서 계급투쟁은 어떻게 가능한가, 다른 말로 social integration 차원에서 기존의 지배적인 도덕,규범은 어떻게 깨질 수 있는가 또는 기존의 지배적인 도덕, 규범을 어떻게 활용하여 계급투쟁에 이용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들이 적절히 제기될 이론적 공간이 취약하다는 점입니다. 마카이벨리 - 그람시의 사유라인을 적극적으로 끌고 들어와야 하는 이유입니다. 알뛰세가 <이데와 이데장치>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은 재생산의 문제설정이고, 재생산의 문제설정은 계급투쟁의 문제설정이다'고 말했으나 그 텍스틀 읽고나서 계급투쟁을 떠올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지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도 괜한 것이 아니죠. 결국 맑스 이후 맑스주의에서 사회적 관계라는 차원이 얼마나 진지하게 고유한 설명 범주로 받아들여졌었는지 반생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회적 관계의 차원을 쉽사리 사물과 사물 사이의 관계로 환원시키거나 그것의 결과물로 종속시켜온 경향이 있었죠.
    두서 없이 말이 길어졌네요. 어쨌든 저의 표현으로 기능적 적용맥락과 규범적 대안 구성맥락의 구분에 대한 많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구도로 제가 쓴 글이 지금까지 딱 한편 뿐이니 많은 오해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론과 사회> 겨울호에 푸코와 뒤르켐을 연관시키는 글이 오늘 내일쯤 나올텐데 그 글에서 이 이론적 구도가 다시 활용됩니다. 그리고 알다시피 요즘 제가 천착하고 있는 '물신과 주술 그리고 헤게모니'라는 주제도 이 이론 구도에서 사회적인 것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논의입니다. 이것도 다 쓰면 보여드리죠. 어쨌든 제가 생각하는 구도는 당연히 소장님이 강조하는 역사적 과정으로서의 자본(체계 논리)를 위치시키고자 하는 시도이고 그것은 계급투쟁의 바다라는 지평 위에 체계를 놓는 것이 됩니다.
    대충 다음과 같은 구도가 되겠죠.

    기능적 적용 맥락 ------------------ 체계통합
    규범적 대안 사회 구성맥락 --------사회통합의 도덕,규범적 차원(orderly한 차원)
    보다 넓은 바다로서 계급투쟁 ------사회통합의 투쟁,갈등적 차원(conflictual한 차원)

    소장님이 사회통합 개념을 약간 오해하고 있는 것도 이게 표현이 '사회통합'(social integration)이다보니 초점이 통합에 가게 되고 그래서 도덕, 규범만을 이야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표현은 사회통합이라고 했으나 Lockwood가 그 말로 지시하고자 하는 것은 사회적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사회통합이라는 말은 도덕, 규범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통합이라는 축에서 사회적 관계가 잘 질서잡히게 만들어주는 도덕, 규범이 있음과 그 질서 대신 갈등을 야기하는 도덕, 규범의 없음(도덕, 규범 대신 다른 투쟁의 논리) 문제를 포괄하는 용어입니다. 체계통합도 마찬가지로 부분체계들 사이의 질서잡혀진 통합과 부분체계들 사이의 갈등적 (무)질서 두 차원을 포괄하는 용어입니다. 나중에 더 이야기해보죠. ~~
  • 김주
    김주환 2017.12.18 07:32
    하나만 더 간단히 말하자면 제가 궁극적으로 생각하는 구도는 체계와 규범의 대립 구도가 아닙니다. 전통사회도 아니고,,, 오늘날 규범은 체계를 이길 힘을 상실했습니다. 힘을 상실한 조건에서 규범을 통해 뭘 해보겠다 이런 시도는 자기도 모르는 새 순식간에 체계의 통치 논리에 흡수되어버리기 십상입니다. 가여운 폴라니주의자들!!!!
    오늘날 그 힘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것을 몇가지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숙의에 기반한 토론의
    힘과 주권적 입법(하버마스의 길), 국가의 행정권력의 힘(국가권력 장악이라는 테마), 계급투쟁 내지 사회적 투쟁(정치적인 것). 당연히 저는 맨 마지막쪽이죠. 이 관점에서 규범이란 그 자체 텔로스가 이니라 철저한 전략적 활용의 수단이 됩니다. 이게 마키아벨리즘이고 헤게모니 논의의 핵심이죠.
    차라리 제가 골몰하고 있는 점은 전략적 행위는 결국 시스템의 기능 맥락으로 환원되지 않겠는가라는 하버마스식의 반문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반문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럼 이만..난 이제 지방으로 또 이동.....
  • profile
    김성윤 2017.12.19 17:56
    가여운 폴라니주의자들, 이라니ㅎㅎㅎ 근데 정작 가여운 건...ㅋㅋ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교통관계와 이데올로기' 문제 설정이 이후에 '생산양식과 물신성'으로 초점화됨에 따라 '인적 교류관계와 주술성'에 대한 논의로 충분히 다뤄지지 못했다는 이야기로 이해해도 무방하겠죠? 저는 이런 틀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암튼 <이론과 사회>에 실리는 논문이 기대됩니다 :)

    그리고 제 이야기는 계급투쟁을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으로만 국한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는데요. 논점 전달이 명확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부르주아 계급이 행하는 체계를 강화하거나 활용하는 실천도 계급투쟁이 아니겠냐는 거예요. 심지어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보다 부르주아 계급투쟁이 먼저 나타나는 경우들이 있을 정도니까요. 요컨대 부르주아적 실천의 역사성(그리고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과의 경합으로 인한 비의도적 결과)을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고, 그래야만 정치의 다양한 수준들을 자본의 법칙이라든가 체계 같은 것으로 한정할 위험을 피할 길이 열리지 않겠냐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래야만 지배의 균열이라는 모순성 또한 포착할 기회가 생길 테구요.

    아아, 연말이라 저도 시간이 없네요;; 아마도 목요일 연구소 송년회(2차 뒷풀이ㅋ)에서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목요일날 꼭 오세욧! 7시 광화문~
  • 김주
    김주환 2017.12.20 02:28
    교통관계라는 표현이 나중에는 생산관계라는 말로 바뀌죠. 맑스는 모던 소사이어티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교통관계는 사실상 생산을 둘러싸고 맺어지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그 핵심으로 한다고 봤기 때문이죠.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연합'이라는 관념은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자발적 연합'이라는 말로 바뀌죠. 이러한 변화는 일장일단이 있는데, 무엇보다도 순진무구한 자유주의의 문제틀(자유로운 교통, 사적소유라는 법/권리 앞에서 동등하게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관념은 전형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주조하는 제도화된 혹은 구조적인 힘을 포착할 수 있게 해줍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회적 관계가 '생산' 과정 속에서 '주체'가 '노동수단'을 동원하여 '자연대상'을 가공한다는 주객모델에 입각해 사유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문제도 야기했습니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에서 '주체-대상'의 주객모델을 '인간-타인'의 사회적 관계의 모델로 바꾸었지만 이 시기 맑스는 노동범주를 사회조직화 범주로 포착하기 시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후자를 전자에 다시 환원시킬 수 있는 여지도 함께 만들었습니다. 노동의 주객모델의 시선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회적 관계모델이 파악되니 그것은 유사 자연필연성의 논리에 종속되는 것으로 포착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물론 맑스의 원래 의도는 이런 것이 아니었죠. 첫째, 아렌트-하버마스의 평면적인 맑스 노동 개념 비판과 달리 노동범주를 통해 맑스는 주객모델의 주체철학적 구도로 회귀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회적 관계 모델로 이론지형을 옮기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맑스에게 노동은 그냥 노동이 아니라 항상 '사회적 노동'인 것이지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회적 관계, 특히 계급관계의 구도 속에서 실천되는 노동의 주객모델이 본래 맑스가 의도했던 것입니다. 거꾸로 선 헤겔을 바로 세웠다는 것은 사실 관념론을 유물론으로 바꿨다는 것이 아니라 주객모델 안에 사회적관계 모델을 환원시켰던 헤겔을 장갑의 안과밖을 뒤집는 방식으로 뒤집어 반대로 사회적 관계 모델의 지평 위에 주객모델을 위치시키는 것을 뜻하죠.
    두번째 맑스의 의도는 맑스의 의도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간과 인간의 사회적 관계(계급투쟁을 실질로 하는)의 비합리적이고 우발적 성격을 그 자체로 놔두지 않고 노동의 필연성과 합리성의 논리(예를 들어 생산력의 발전)와 결합시켜 우연의 바다에 필연과 합리성의 방향설정을 해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게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의 변증법이라는 테마로 표현되죠.
    그런데 사실 맑스의 첫번째 의도와 두번째 의도는 결합되기 힘든 시도입니다. 전자에서 주--객의 축보다 인간--타인의 사회적관계 축이 우선하지만, 후자에서는 반대로 주--객의 축이 인간--타인의 사회적 관계 축을 견인하는 우선적 역할을 합니다. 그러다보니 역사의 변동을 설명할 때 어떨때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라는 유사 역사필연성의 역사철학적 논의로 설명했다가, 또 어떤 때는 <콤선언> 첫구절이나 프랑스혁명에 대한 분석에서 처럼 계급투쟁으로 설명하는 정치학적 설명논리가 시도되는 등 두 경향 사이에서 진동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결국 <자본론>에 가면 두 요소가 같이 섞여 있기는 하지만 사물의 필연성 논리가 훨씬 우세해지는 경향으로 귀결됩니다. <자본론>에서 자본과 노동의 사회적 관계(계급관계)는 고정자본과 가변자본의 관계라는 사물과 사물의 관계로 바뀌어버립니다. 이제 사회변동은 계투가 아니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변화로 인한 이윤율 저하로 인한 것으로 설명됩니다. 맑스는 그 자신의 의도와 달리 결국은 사회통합(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의 축)을 희생시켜 체계통합(사물의 사회적 관계의 축)을 전면에 내세우는 강한 체계이론화의 경향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후 이는 형태를 달리하며 맑스주의 전통에서 강한 경향을 띠면서 계속되어 왔습니다. 이상하게도 맑스주의에서 계급투쟁이라는 테마가 경시되고 경제의 객관적 조건만이 주된 분석 대상이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첨언하여 사실 맑스는 인간과 사물의 주객모델의 축과 인간과 다른 인간 사이의 사회적 관계 모델의 축을 결합시키고자 했던 애초의 두 의도가 깔끔하게 양립하기 힘들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즉 맑스는 이러한 자기의 시도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를 맑스는 <자본론 3권>에서 "자유의 왕국은 필연의 왕국 피안에 있다"고 쓰죠(<자연변증법>의 엥겔스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의 레닌이 자유의 왕국과 필연의 왕국 사이의 단절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후자에서 전자로 깔금하게 이행가능하다고 말했던 것과는 대조되는 발언이죠.). 아렌트-하버마스의 맑스의 노동 범주 비판은 사실 허수아비 때리기의 오류였던 셈이 됩니다.]]

    이런 구도에서 볼 때 저의 문제의식은 맑스의 본래의 문제의식인 사회적 관계의 지평 즉 계급투쟁의 지평에서 사유하는 것입니다. 사물과 사물의 사회적 관계라는 축은 분명히 엄청난 이론적 분석력과 비판적 통찰을 제공해주는 버려서는 안되는 관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죠. 제 생각에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회적 관계라는 (계투 또는 그냥 투쟁) 차원--사실 이
    것은 이제 이미 정치적인 것의 차원 -- 을 가장 선명하게 사유했던 사람들은 니체, 마키아벨리, 그람시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연성의 바다 위에서 필연성을 위치시켜 사유하면서도 우연성의 바다에 빠져 죽지 않고 오히려 필연성을 컨트롤하여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전유할 수 있는 전략과
    전술의 사상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그들 같습니다. 이 문제의식이 저에게는 헤게모니로 표현됩니다.

    또 말이 길어져버렸지만 자본의 시스템도 당연히 계급투쟁의 소산이라고 봐야죠. 특히 지배계급이야 당연히 자본의 법칙이나 실정법 같은 시스템 논리를 통해 전체 사회를 지배하고 통제하려고 시도하겠죠. 이에 대해 피지배계급은 어차피 시스템의 주인이 될 수 없으니 그 시스템을 깰 수 있는 실천을 하려고 하겠죠. 그것은 초법의 주권의 명령이라는 형태로 등장할 수도 있을 것이고, 피지배계급 사이의 협동, 연대과 토론 및 분노의 조직화, 정치적 조직화 등의 형태를 통해 투쟁하는 형태로 등장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이게 계급투쟁이죠. 이 계급투쟁을 못보고 모든 게 사물의 시스템 논리로 돌아간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물신적 사고일 것입니다.

    목요일날 이야기합시다. 역시 새벽에 글을 쓰면 길어져요.... 짧게 쓰는 연습을 해야겠어요...
  • 김주
    김주환 2017.12.21 01:47
    다시 읽어보니 제가 쓴 글에서 소소하지만 부정확한 질술이 몇개 보여서...정정.. 헤겔은 사회적 관계를 주객모델로 환원시켰고, 궁극적으로는 이 주객모델을 정신의 '자기관계' 모델로 환원시켰다고 말해야 정확합니다. 결국 헤겔에게 나-타인의 사회적 관계, 나-대상의 주객관계는 나-자신의 자기관계 안으로 흡수됩니다. 그래서 맑스가 헤겔을 뒤집었다는 말은 자기관계와 주객관계 안에 포섭되어 있던 사회적 관계 모델을 꺼내어, 오히려 반대로 사회적 관계이 지평 위에 자기관계의 주체형성(주체의 산출)의 축과 주객관계의 노동 축을 위치시키는 구도로 나아갔다는 말이됩니다. 이게 역사유물론이죠.
  • profile
    김성윤 2017.12.23 11:11
    헤게모니 등을 통해 정치의 우위라는 관점을 가져가는 시도에 저 역시 적극 동의합니다. 체계 및 자본의 동학을 정치의 관점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역사성을 분석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니까요. 또한 그런 점 때문에 김주환 선생이 푸코 모델과 거리를 두게 될 것이라 짐작했던 것이었습니다. 주체화의 정치학이라고 해야 할까요, 푸코주의의 통치성을 통해 저항이 포획되는 양상을 짚어줄 수 있는 측면이 있지만 저항이 자본의 동학으로 포획되는 양상을 짚어주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테니까요. 다만, 서평에서 제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바는 통치성을 통한 포획이라면 저항은 주체화에 대한 저항 정치 모델을, 그리고 계급 정치 차원에서의 저항이라면 포획은 자본의 동학에 분석을 필요로 하게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즉, 통치성과 헤게모니가 손쉽게 결합될 모델들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 자본의 동학과 계급투쟁을 분석하려면 말씀하셨듯 역사유물론적 접근이 요청됩니다. 그리고 이 부분이 마르크스가 헤겔을 물구나무 세우고자 했던 맥락과 통할 테지요. 그렇지만 - 역시 지적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 여기서 철학과 정치 사이에서 동요하는 마르크스 특유의 곤란이 나타납니다. 또한 헤게모니 모델을 통해 이 난점을 해소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헤게모니 개념은 철학의 구도 역시 정치의 일종으로 파악하게 해준다는 이점이 있으니까요.

    단, 이때에는 <포획된 저항>에서 채 다루지 못하셨던 체계의 논리, 특히 자본의 동학에 대한 역사유물론적 접근 또한 안배되어야 할 것입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대항 헤게모니의 상대편을 통치성으로만 한정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봅니다. 김주환 선생 작업에서 언젠가 돌아오게 될 문제설정이 바로 이 지점이 아닌가 싶어요. 그럼 점에서 포획되지 않는 저항에 대한 해명이 불충분한 것과 마찬가지로, (헤게모니 개념을 동원하는 이상) 저항에 대한 포획 역시 해명이 불충분했다고 봤던 겁니다.

    저도 덧붙여서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오늘도 일정이 빡빡해서 여유를 내기가 어렵네요. 연휴에는 채점도 해야 하고요ㅠ 메리 크리스마스와 해피 뉴 이어 하고 또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 profile
    최혁규 2017.12.16 01:30
    저는 두 분의 논전 혹은 의견교환을 보며 행복해 하는 중입니다
  • profile
    김성윤 2017.12.16 22:55
    이런 기회가 종종 있어야 할 텐데..
  • 김주
    김주환 2017.12.18 07:14
    뭐 논전까지야.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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