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사단법인 문화사회연구소

이론/논문

플랫폼과 ‘소중’ : 생산과 소비의 경합이라는 낡은 신화의 한계상황

분화된 대중(소중)에 관해서 드디어 공식적인 글을 썼습니다. 학위논문 이후로 어떤 연구를 하느냐는 질문을 받곤 했는데, 아마도 '플랫폼에서 사회적인 것의 문제' 정도로 잡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화/과학 93호(2017년 겨울호)에 특집 기획으로 실리는 글입니다. 더불어 오는 12월 9일 문화연구학회에서도 이 원고를 가지고 발표를 하기도 합니다.
by 김성윤 posted Nov 28, 2017 Views 245 Likes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gig_economy.jpg

 

 

“‘빅뱅’의 ‘뱅뱅뱅’처럼 히트곡은 지금도 쏟아져 나옵니다. 하지만 과연 그 곡들이 대중적 히트곡일까요. 옛날 히트곡은 여러 세대와 계층이 아는 소위 전 국민 히트송이었죠. 지금은 특정 세대와 집단 사이의, 그들만의 히트곡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요즘 노래를 대중(大衆)가요라고 할 수 있을까요. 소중(小衆)가요 아닌가요.”[1]

 

 

1. 대중의 분화라는 사건

 

오늘날 우리는 대중이 아니라 소중의 시대를 살고 있는 걸까. 우리들 개개인을 대중이 아니라 소중이라 부르는 게 합당한 걸까.


대중이란 말은 일정한 무지의 환상에 기초해 있다. 우리는 재현 불가능한 대단위의 무리를 에둘러서 ‘덩어리’란 뜻의 대중이라 표현한다. 즉, 대중이란 말은 근현대인의 존재론적 조건에 대한 재현의 실패와 이론적 곤란을 반증한다. 우리는 대중 형태에 관해 그 어떤 일반 이론도 만들어낼 수 없다. 일시적으로야 군집의 형태를 (계급적, 성적, 인종적으로) 판별해볼 수 있겠지만, 그 어떤 형태도 대중 자체에 대한 이론적 해명이 될 수는 없다.


그동안 대중적(popular) 문화라든가 대중들(the masses) 또는 문화 부족(the cultral tribe)[2]에 이르기까지 대안적 용어가 제기돼왔던 것도 저간의 사정과 무관치 않다. 이 말들은 대중이 의미하는 압도적 다수성의 긴장을 회피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가령 길거리 공연은 대량 생산(mass production)되지 않기에 대중문화(mass culture)가 될 수 없지만, 유의미한 수준에서 사람들이 좋아한다면 충분히 대중(popular)문화가 될 수 있다. 또한 촛불 집회에 모인 군중과 태극기 집회에 모인 군중이 서로 다른 정치적 지향과 목적을 가졌더라도 우리는 그들 모두를 대중이라 부른다. 대중은 이미 분화되어 있었거나 지금 이 순간에도 분화되고 있다. 우리는 ‘대중’이란 용어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틈새를 이해하고 보완하기 위해 부단히도 애써왔다.


이러한 변화를 (에두르지 않고) 유효적절하게 포착한 것은 마케팅 분야였다. 마케팅 작업이 시장을 조사하고 때로는 없는 시장도 창출하는 것이란 사정을 고려한다면, 대중의 ‘분화’라는 현실은 자연적 변화에 의한 것일 수도, 인위적 구축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1980년대 일본에서는 CF 프로듀서 후지오카 와카오(藤岡和賀夫)가 ‘소중’을, 하쿠호도(博報堂)생활종합연구소가 ‘분중’(分衆)을 각각 대중 개념의 분해 단위로서 고안해냈던 바 있다.[3] 이를테면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인들 대다수가 카시오나 세이코에서 대량생산한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지만(대중), 1980년대에 와서는 무려 8천여 종류의 손목시계를 나눠 차게 되었다(소중/분중). 1980년대라면 한국에선 너무 이른 현상이었을까. 소중, 분중, 신중간대중, 탈대중화 같은 신조어들은 흔한 마케팅 기법이자 과잉소비사회를 앞당기는 이데올로기적 호명에 불과한 것쯤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30여년이 지난 오늘날, 기존의 몰적(molar) 형태가 분해되고 개성과 다양성 그리고 감성 등 소비자 주체성을 중심으로 하는 대중들이 출현하고 있음을 널리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의 1980년대, 한국의 1990년대가 소중의 출현 시점이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소중의 전성기를 살고 있는 것만 같다. 실제로 대중소비사회의 전형들은 많은 부분 과거의 신화로 전락했다. 사람들의 이상적 구매행위는 쇼핑이 아니라 몰링(malling)으로 바뀌었다. 가급적이면 아직 젠트리피케이션이 되지 않은 힙 플레이스에서 데이트를 하고, 을지로입구역의 OB맥주가 아니라 동네 앞 수제 에일 맥주를 가장 맛있는 맥주라 여기고, 아이돌 음악을 듣는 건 무비판적인 것 같으니 인디음악이나 적어도 힙합을 즐긴다. 오늘날 분화된 대중으로서 소중은 몰적인 것에 대한 거부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극대화하고자 한다.


이러한 변화가 포드주의적 축적 체제에서 유연적 축적 체제로의 신자유주의화 과정에서 나타났음은 주지의 사실일 것이다. 감성경제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처럼 교환가치의 소비는 단순히 브랜드에 대한 충성심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특정 상품이 내포하는 ‘러브마크’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다.[4] 물론 이런 추세에서도 과잉소비를 통한 주체화라는 현대자본주의의 기조는 별반 변화가 없기는 하다. 그러나 과거에는 대량소비되는 소품종 상품을 통해 전체화됐다면, 최근 들어서는 (다소 철지난 유행어이고 동시에 지극히 중간계급 편향적인 용어이긴 하지만) 보보스에서 욜로에 이르기까지 대중-소비자에 준하는 용어로 뭉뚱그릴 수 없는 라이프스타일이 물신적으로 체험되고 있다.


한 발 양보해서 대중 개념을 분석적 편의를 위해 개발된 잠정적 용어로 간주하더라도, 오늘날에는 바로 그 잠정적 시효성에 대해서조차 의구심이 생긴다. 대중은 재현할 수 없는 존재론적 지위를 가지지만, 모두가 ‘말’을 할 수 있게 된 시대에 와서는 재현불가능성이라는 대중 개념의 논리적 기초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몰적인 대중의 웅성거림과 아우성이 특정한 매개자를 통해서만 체현됐다면, 분화된 대중들의 지저귐(twitter)은 시스템에 의해 데이터로 자동 기록되고 포스팅된다. 우리들 개개인이 포함되어 있는 대중들은 덩어리라는 양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유례가 없을 수준으로 분화되고 있다.

 

 

 


2. 소비자를 해방시키는 텍스트

 

단적으로 말해, ‘플랫폼’이라는 기업의 뉴타입이자 기술적 환경은 이상과 같은 변화를 소비문화에서뿐만 아니라 삶의 거의 모든 조건들에서 관철시키고 있다. 플랫폼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대량 생산과 대중 소비, 대중 사회와 대중 정치로 대변되던 신화적 언명들에 수정이 불가피하다고 부추기는 듯하다. GE나 지멘스 등은 산업데이터나 ICT 등 다양한 기술을 융합하는 산업 플랫폼을 통해 제품의 생산과정 자체를 서비스화하고 있고,[5] 우버나 에어비앤비 등은 자산 소유와 비용을 최소화하는 린 플랫폼을 통해 생산자와 소비자의 존재론적 순환을 가속화하고 있다.[6] 뿐만 아니라, 우리들 모두가 플랫폼으로 인한 소중 시대의 전면화를 경험하고 있다. 구글이나 페북처럼 이용자 데이터 알고리즘에 근거한 광고 플랫폼은 새로운 시대의 공론장 구실을 하고, 시빅 테크(civic tech)나 시빅 해킹 같은 전략적 활동들은 사회 혁신을 명목으로 정치적 시민성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행사하고자 한다. 정보자본주의가 됐든 인지자본주의가 됐든 플랫폼이라는 새로운 지평 위에서 우리의 역량은 해방을 목전에 두고 있는 것만 같다.


불과 십 수 년 전만 하더라도 작은 틈새처럼 보였던 것이 플랫폼 시대라 일컬어지는 요즘에 와서는 그 자체가 전부로 보일 정도로 큰 공간이 되었다. 그러나, 혹여 이것은 가뜩이나 낡은 것으로 여겨졌던 문화연구의 오래된 가정들이 더 이상은 현실을 설명할 수 없게 됐다는 모종의 이론적 한계상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과잉 제도화됐다거나, 비판이론에서 해석학으로 전락했다거나, 분과적 숙련성이 부족하다거나, … 그동안 문화연구에 많은 문제들이 제기되곤 했었다. 하지만 정말로 받아들여야 할 지적은 문화연구가 문화주의적 감상에 빠진 채 지구화나 통치성 등 자본주의적 정세 대응에 실패했었다는 사실에 있는 게 아닐까. 그리하여 종국에는 소비자본주의와 근친적 관계를 구성했다는 사실에 심각성이 있는 게 아닐까. 플랫폼이라는 또 하나의 정세는 벼랑 끝에 몰린 문화연구를 추락시키려 하는 것만 같다.


문화연구의 오랜 통념을 바꿀 때가 됐다. 이론 개조 프로젝트의 대상은 1990년대쯤 나타나서 오늘날 쇠퇴기를 구가하고 있는 문화연구의 이론적 통념으로 초점화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영국 현대문화연구소에서 비롯됐던 문화연구의 이론적 프레임을 초극해야 할 때가 무르익었다는 뜻이다. 문화를 생산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 정서구조를 지배하려는 사람과 지배에 순응·저항하는 사람, 그리고 경합(contestation)하는 사람, …. 한동안 이런 프레임이 유용할 때가 있긴 했다. 대중문화의 전유적 소비를 통해 생산자의 의도로부터 벗어나 수용자의 자율성과 능동성을 해명할 수 있으며, 나아가 권력관계에 저항할 수 있다는 변형된 승리 도식을 제시해줬기 때문이다.


변형된 승리라고 해서 단순한 허위의식이란 뜻은 아니다. 다만, 지배자나 지배적 관계는 장기지속하는데 피지배자들끼리 또는 시청자·관객들끼리 승리했다고 자축하는 건 다소 난감한 일이다. 미디어 문화연구, 특히 대중문화연구가 정치적 무기력증에 빠진 건 필연적이었을지 모른다. 오늘날까지 반복되는 것처럼 도달할 수 있는 결말은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1) 피스크와 그의 계승자 젠킨스처럼 즐겁고 능동적 경험을 할 수 있으면 그뿐이라고 ‘대중주의적 자위’에 빠지거나, 2) 문화나 예술의 상대적 자율성이라는 맑스주의 문화연구의 준칙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하면서 ‘이론적 비관주의’를 자처하거나, 3) 그것도 아니면 대다수 문화연구자들이 그런 것처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공하기보다 해석학적 묘사에 치중하거나 사회공학에 복무하면서 ‘직업으로서의 학문’에 충실하거나.


오늘날 플랫폼이 몰아붙이고 있는 전통적 대중 형태의 해체는 의미심장한 사태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1) 각자가 원하는 취향에 따라 문화를 선택적으로 소비할 수 있으며, 2) 문화가 순환되는 장(場)에서 모든 사람들이 위계적 권력 관계로부터 벗어나 능동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 플랫폼에서는 이 둘 모두가 가능해진다. 알고리즘을 활용해 이용자 선호를 큐레이팅해주는 전자의 기능(선택적 소비)은 플랫폼을 통해 이뤄지는 ‘공유경제’를 규모의 공급경제에서 ‘규모의 수요경제’로 전환시키는 데 결정적이게끔 한다. 여기까지만 해도 여전히 경영학적 미래 비전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그에 반해 후자의 가능성(참여민주주의)은 상대적으로 문화연구의 오랜 덕목에 가깝다. 생산과 소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은 프로슈머 같이 제법 익숙한 미래 이미지이자 현재진행형 현상이다. 플랫폼이라는 공간에서는 모두가 소비자이며 누구나 생산자가 될 수 있다. 텍스트를 둘러싼 전장(戰場)의 환경이 완전히 재편된 것이다. 텍스트의 의미를 결정하는 전선이 무한히 유동적이게 된 세상, 즉 그동안 많은 문화연구자들이 꿈꿨던 문화민주주의의 세상이 아닌가.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이른바 포스트모던 국면 이래로) 저항적이고 문화민주적인 경험을 자극했던 덕목들이 대중문화의 지배적 코드들로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에 있다. 고다르풍의 예술영화에서나 있었을 법한 카메라 프레임 바깥을 보는 경험은 이제는 TV 시청에서도 아주 흔한 일이 되었다. 리얼리티뿐 아니라 거의 모든 예능 프로그램들이 이미 무대 이면을 주된 소재로 삼고 있다. 나영석, 김태호 같은 ‘연출’자들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와 ‘연기’자와 한 데 섞이기도 한다. 심지어 <무한도전>은 물론이고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들은 아예 시청자의 문자투표와 인터넷투표를 통해 내러티브의 종착지를 결정한다. 적잖은 좌파 이론가들이 ‘열린 예술작품’ 운운하면서 수용자들의 참여에 개방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게 언제였냐는 듯,  이 모든 요소들이 텍스트 안으로 내부화되었다.


피하주사기 모델의 대중문화론[7]이야 이미 고답적인 이야기가 됐지만, 최근에 이르러서는 지배와 저항이라는 전선조차 모호한 것이 되고 있다. 저항문화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상업적 지배문화가 되어 있고, 소비자이기만 한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제작과 유통 체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기도 한다. 101명이나 되는 아이돌 지망생이 ‘국민프로듀서님!’이라고 호명하는 순간, 우리는 시청자이면서 동시에 프로듀서가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한다. 과거의 프로듀서들처럼 어마어마한 권력을 누리는 것은 아닐지라도, 민주주의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독점된 권력을 나눠먹으며 같은 상품을 향유하는 이들과 더불어 기묘한 정치적 효능(과 더불어 더 강한 애착)을 느낄 수도 있다.


요는 이렇다. 이제 와서 대중문화를 통해 민주적 경험을 한다는 것 따위는 과거와 같은 가치로 여겨질 수 없다. 문화연구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이상적 문화 상황, 즉 열린 텍스트와 능동적 대중과 같은 오래된 신화는 비로소 현실화된 것일까. 얼마간 그렇기도 하고, 또 얼마간은 미심쩍은 부분이 남는다. ‘국민프로듀서님!’이라는 호명이 ‘오글’거리는 것은 사실 이 설정이 제공하는 개방성과 능동성의 의사(疑事)적 측면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대중문화를 전유하는 사람들은 텍스트의 개방성을 높임으로써 수용자들의 자율적이고 능동적 역량을 실현하고자 했었다. (비평가나 이론가들은 물론이고) 대중들 스스로도 텍스트 내의 인물 구도를 변경하거나 특정한 전개와 결말을 끌어내기 위해 (자신들만의 파생 텍스트를 만들거나) 생산자 집단에 사회적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었다. 이런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낡은 텍스트들은 소비자들로부터 선택을 받지 못한다. 가령, 일일드라마 여주인공에게 한복을 입힌 채 대가족의 아침상을 차리게끔 하는 연출은 더 이상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일이 되었다.


수용자들의 눈높이가 올라가는 시장 상황에 맞춰 문화산업은 상품의 질을 높임으로써 대응(response)을 할 수밖에 없다. 원래 문화적 대응이라는 용어는 지배문화에 대한 수용자 집단의 사회적 행위를 가리키기 위해서 사용되곤 했었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가 확인해왔던 사실 중 하나는 문화산업 역시 가변적인 대중적 정서구조에 다차원적인 대응을 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을 두고 수용자와 텍스트의 공진화(coevolution)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지배와 저항, 또는 경합이라는 정치학적 통념은 바로 이 지점으로부터 도전을 받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몇몇 트렌디한 문화콘텐츠들은 팬픽이나 팬아트로부터 영향을 받아 브로맨스 코드 같은 것들을 배치하고 있고, 심지어 텍스트 안에 대중들의 능동성을 전제로 하는 수행적이고 상호작용적인 요소들을 내부화하고 있다. 마치 버만 등이 일찍이 제시했던 모더니티의 용해적 비전이 재연되듯, 저항적이었던 것들이 지배적인 것 안에 내부화되어 견고해진다(‘견고한 모든 것이 대기 속으로 녹아버린다’).

 

 

 


3. 카카오제국에서의 문화적 삶

 

플랫폼에 문화정치적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플랫폼이 (단순히 기술 수준의 집적이란 맥락을 넘어) 이상과 같은 공진화 과정을 누적적으로 내재화한 결정체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카카오TV 사례를 검토하면서 이 문제를 좀 더 숙고해보도록 하자.[8] 플랫폼, 특히 미디어 플랫폼이 시장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활성화된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여기서 관건은 ‘상호작용에 참여하는 이용자’가 얼마나 많은가 하는 데 있다. 네트워크 효과는 참여자들의 숫자에 대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1명의 참여자가 있으면 노드의 최대치는 0개이고 2명이면 1개에 불과하다. 그러나 4명일 때는 6개, 12명일 때는 66개, 100명일 때는 4950개로 비선형적인 볼록성장 곡선을 그린다.[9] 투자자는 여기서 발생가능한 이벤트와 데이터에 상품가치를 가늠해보고 투자를 결정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더 많은 이용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을까. 비즈니스 초창기에 있는 플랫폼들은 대부분 ‘콘텐츠’를 가장 필수적인 항목으로 꼽곤 한다. 콘텐츠를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 그 콘텐츠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리고 콘텐츠들은 얼마나 효과적으로 큐레이팅되어 있는가.[10]

 

카카오TV의 콘텐츠 전략은 크게 두 가지 채널로 분류된다. 하나는 일반 ‘TV 채널’로 기성 미디어의 방송 프로그램 전체 다시보기 서비스와 부분적인 클립 영상 서비스를 제공하며, 다른 하나는 ‘PD 채널’로 ‘PD’라는 호칭을 가진 이용자들이 직접 콘텐츠를 제공하고 다른 일반 이용자들이 이를 시청하는 형태이다. 두 채널의 가장 대표적인 공통점은 실시간 상호작용에 있다. 같은 채널에 접속한 이용자들은 채팅창을 통해 프로그램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기도 하고, 때로는 PD와 대화하거나 그들에게 특별한 주문을 요청하기도 한다. 기성 미디어에는 없었던 동시적·집합적 커뮤니케이션은 물론, 제작자에게 직접적 요구를 전달하는 시청자들의 능동적 개입이 주된 특징인 셈이다. [11]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각 채널들을 통해 미디어 플랫폼이 어떤 문화적 조건들을 제공하는지에 관한 문제이다. 대다수의 미디어 플랫폼처럼 카카오TV 역시 전통적인 시청자 모델을 교란하는 효과를 동반한다. 1) TV 채널을 볼 때 이용자는 (과거보다는 좀 더 집합적인 방식으로) 시청자 정체성을 강하게 나타낸다. 물론 폭넓은 영상 선택권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대개의 경우엔 실시간 스포츠 방송이나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면서 전통적인 시청자 모델과 질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를 드러내진 않는다. 2) 그러나 PD 채널 이용자에게는 시청자로서의 길뿐 아니라 말 그대로 프로듀서로서의 길 또한 제시된다. 자신이 제작한 영상을 업로드하거나 실시간 방송을 송출하는 행위들은 미디어 생산의 능동적 경험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시각을 달리해서 보면, 이러한 지점들을 두고 플랫폼 자본주의가 대중들에게 요구하는 일종의 도덕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선택의 다양성 속에서 대중들은 미적 취향을 존중받을 수 있지만, 이것은 동시에 존중받을 수 있을 정도의 미적 취향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뜻하기도 한다. 나아가 텍스트의 생산과정에 개입하는 능동성의 기회구조가 개방되고 있는데, 이것 역시 오늘날 문화콘텐츠가 이용자의 적극적 참여를 필수 조건으로 삼는 한에서 생산된다는 역설적 사실을 가리킨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플랫폼 비즈니스 모델이 대중들의 자율성과 능동성을 제공하는 것인지, 거꾸로 플랫폼 자본주의가 대중들에게 자율성과 능동성을 새로운 규범으로 부과하려는 것인지는 점점 더 불분명한 문제가 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질문도 제기될 수 있다. (카카오드라이버 종사자들이 노동자인지 도급업자(contractor)인지 애매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디어 플랫폼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시청자일까, 프로듀서일까. 플랫폼의 예비적 현상으로서 미디어 융합 같은 현상들이 있었고 이것이 함의하는 능동적 대중 예찬론으로서 ‘컨버전스 컬처’ 같은 논의들이 있기는 했었다.[12] 그러나 플랫폼 위에서 발발하는 능동적 대중의 출현은 1) 그들의 소비자 주권 의식 및 문화민주주의적 요구뿐만 아니라, 2) 이들을 수용함으로써 거래비용과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수익성을 극대화하려는 문화산업 자본의 불가피한 선택, 3) 그리고 소비자의 경험과 감정 자체를 상품화하려는 새로운 마케팅 전략과 수익모델 등이 결합한 결과물로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구매력 계측이 불확실한 시장상황에서는 실체를 가진 어떤 상품을 판매해서 수익을 노리기보다는, 분화된 대중의 라이프스타일·습관·태도·신념·가치체계 등을 채집하고 분석하는 사이코그래픽스(psychographics), 나아가 이들의 자율적 흐름(flow)을 맥락화하는 인류학적 접근법 같이 자본 축적의 견실한 ‘토대’를 구축하는 작업이 더 현명한 선택으로 인정받는다.[13] 요컨대, 생산과 소비의 대립이 허물어지고 나아가 소비자-대중들의 이론적 지위가 동요하는 것은 지배와 피지배를 막론하고 모두가 바라는 결과인 셈이다.


소비자가 생산 과정 내부로 끌려 들어온 지금의 상황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어쩌면 우리는 과거 문화산업론의 쟁점들이 변증법적으로 진화하고 있는 양상을 목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첫째, ‘미학적 단순화’라는 문제는 카카오TV의 ‘스낵컬처’를 통해 재확인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대중들의 능동적이고도 확고한 취향에 의한 선택이란 관점에선 취향의 심미화 현상으로 재해석될 수도 있다. 일례로 유튜브는 롱 테일(long tail), 즉 이용자들의 취향과 성향에 맞는 콘텐츠와 상품 목록을 제공한다. 이것은 이용자들이 그동안 클릭했던 기록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서, 우리들의 선택 하나하나가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되어 알고리즘으로 처리되고 있음을 의미한다.[14] 다만, 이것이 오늘날 대중에게 이미 알고 있는 정보와 이미 갖고 있는 감각만을 재확인시키고 공고화해준다는 점에선 낙관론으로만 환원할 수 없는 복잡한 구도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분화된 대중의 취향체계를 반영한 롱 테일이 완벽에 가깝다는 것은 최적화된 서비스를 받는 대신 낯선 감각과 타자성의 기회를 놓친다는 의미와도 통한다.


둘째, ‘상업적 동질화’ 문제는 일부 성공적인 콘텐츠와 비즈니스 모델이 신규 진입자들에 의해 모방적으로 복제된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효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시장에서 생산과 제작에 참가하는 행위자들의 수가 전례 없을 정도로 폭증하고 있고, 불특정 다수의 다양한 미적 취향 역시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선 오히려 상업적 다변화 추세 역시 인정해야만 한다. 물론 플랫폼 자본과 콘텐츠 제공자 사이의 수익 배분 구조가 절대적으로 비대칭적인 상황에서 이와 같은 추세가 얼마나 지속가능할지에 관한 문제는 불투명하다. 오히려 지금의 국면은 플랫폼 자본이 문화적으로 자유로운 ‘프로듀서’들로부터 플랫폼-지대를 수취하면서 독점을 강화하는 문제를 통해 재조명될 필요도 있다.


셋째,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전혀 다른 양상 속에서 전개된다. 텍스트를 통한 이데올로기적 커뮤니케이션이 생산자에게서 소비자에게로 전달되는 것이 기존의 문제였다면, (그리고 이데올로기가 종식된 것이 아니라 한다면) 오늘날 생산자와 소비자의 구분이 소멸되는 상황에선 이데올로기의 소재지와 작동 방식 등은 질적으로 달라질 공산이 그만큼 커지게 된다. 게다가 현대의 문명적 질서에서 대중들이 기존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상투적인 것으로 여길 정도로 냉소적인 주체로 거듭난 시점에서는, 비판의 출발점 자체를 처음부터 다시 설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단적으로 말한다면, 플랫폼이 제공하는 참여민주주의적 기회는 오늘날 이데올로기가 지배집단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 스스로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새로운 사태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반지성적 ‘팩트’에 기반한 풍문 그리고 혐오를 부추기는 영상물 등등이 이미 충분히 대중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4. 양식화된 저항, 프라임(') 붙은 지배

 

미래 사회에 대한 전망은 언제나 불투명하다. 네트워크로 모든 것이 연결되고 인공지능이 고도화되는 추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인류를 평안케 할 것 같지만, 그런 약속들은 언제나 디스토피아적 전망과 결부되어 왔다. 호소다 마모루는 2009년작 <썸머 워즈>를 통해 (오늘날에는 플랫폼이라 불렀을) 가상 네트워크 OZ에 의해 통합된 세계를 보여주면서, 이것이 오작동을 일으킬 경우 시장의 사적 기능에서부터 정부의 공공 기능까지 세계 전체가 붕괴될 가능성을 제기했던 바 있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것은 스마트폰 등을 통해 인류의 모든 일상생활이 민영 플랫폼으로 통할되어 있는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의 일터와 생활터는 1인 미디어 시대의 행복한 약속과 달리 플랫폼에 의해 장악되어가고 있다. 우리의 삶은 낱낱이 기록되고 관리되며 또한 그런 상황 속에서 재생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시와 통제라는 반경제학적 언급들에 비해) 독점이란 말이 상대적으로 덜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그것도 문화산업에서 말이다. CJ로 대변되던 1990~2000년대 문화산업의 독점화 경향이 외부경제(external economies)를 내부화하는 수직계열화 양상으로 나타났다면, 카카오그룹처럼 신흥하는 문화산업의 독점화 경향은 (독점이란 말 자체를 대체하면서) 일체의 외부불경제(external diseconomies)를 내부화하는 기술적 융합과 플랫폼화 양상을 띤다. 일각에서는 정보자본주의 또는 인지자본주의 국면으로 다중(multitude)의 역량이 강화되어 조만간 자본의 한계가 드러날 것처럼 설파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사회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마저도 비즈니스 모델 안으로 편입되는 과정을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유경제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처럼 플랫폼 안에는 사회적 관계가 들어가 있으며, 컨버전스 컬처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처럼 그 안에는 문화적 자율성 또한 들어가 있다.


‘체계가 생활세계를 식민화한다’는 테제는 기업의 뉴타입으로서 플랫폼을 통해 ‘체계와 생활세계가 통합되어간다’는 말로 바꿔야 할지 모른다. 플랫폼이란 기술 그 자체에 머무르지 않는다. 정보의 생산자들이 경제학적 교환과 인간학적 교류를 행하는 장소로서 플랫폼은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문제를 제기할 뿐 아니라, 권력을 둘러싼 게임이 횡행하는 정치의 새로운 영토를 가리키기 때문이다.[15] 예컨대 미디어 플랫폼의 롱 테일이 결국에는 이용자들의 선택 하나하나가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되어 알고리즘으로 처리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말이다. 플랫폼은 우리들의 수행성에 근거해 작동하며 또 진화한다. 우리의 행위는 커뮤니케이션 자체를 넘어 플랫폼이란 무대 위에서 상연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적 행위가 되고 있는 것이다. 플랫폼은 기존 시장을 독점할 뿐만 아니라 그 바깥조차도 시장으로 만들면서 독점화하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우리는 두 번째의 아도르노 국면을 살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신’문화산업이라고 해야 할까. 마케팅 분야에서 종종 관찰되는 소중이나 분중 같은 신조어들이 예사롭지 않은 것 역시 그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문화산업 시대의 수용자들의 주체 형태를 연상하는 데 있어 가장 유용한 참조점이자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입구이기 때문이다. 소중을 위시로 한 새로운 대중 형태와 플랫폼 자본주의가 조우하는 지점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얼마간 신화적이었던 교조적 아이디어를 정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지배적인 것은 그것이 지배계급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지배적인 게 아니라, 피지배계급의 보편성 때문에 지배적이게 된다. 한국 문화이론계에서 상식처럼 통용됐던 지배와 저항의 이항대립은 점점 무의미한 것이 되고 있다. 오늘날 문화산업은 피지배자들의 능동적이고 민주적인 참여라는 가상을 조건으로 해서만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문화이론, 적어도 문화연구는 자본의 동학을 읽어내면서 사회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을 삼켜버리는 시장권력을 비판하는 기획으로 전화해야 한다. 그동안 문화연구는 국가권력을 비판하는 데 있어선 꽤 유용한 지적 도구를 제공해왔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국가가 통치화 및 사회화될 때,[16]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플랫폼이라는 정치경제학적으로 변화된 조건 위에서 자유와 해방의 스펙터클로 상연될 때, 문화연구는 국가권력뿐 아니라 시장권력에 대해서도 비판을 해낼 수 있을까. 나아가 플랫폼 안으로 흡수되고 있는 사회권력에 대해서도 비판을 수행할 수 있을까. 적어도 지금까지의 이론적 틀에선 가능성의 조짐은 쉽사리 발견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문화연구가 아니라 문화비판이어야 한다. 다만 이 비판은 우리가 알던 비판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 지배의 상대어가 순응 내지 저항이란 도식은 순진한 사고방식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저항 대신에 참여나 활동 또는 임파워먼트 같이 온갖 연성화된 말을 붙여도 마찬가지다. 전술했던 것처럼, 지배는 우리가 알던 지배가 더 이상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참여와 저항 따위의 외부적인 것들을 내부화한, 일종의 프라임(') 붙은 지배, 즉 변증법적으로 진화한 ‘메타적 지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배적인 것들에 저항하라. 그리하면 더 지배적이게 될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 가장 긴급한 것은 구조에 대한 비판의 전통을 회복시키는 일일 수도 있다. 행위에 상대적인 언어로서 구조도 아니고, 아비투스니 구조화니 중범위적 용어들과 함께 배열시킬 수 있는 구조도 아닌, ‘구조 이상의 구조’로서 제 스스로 재구조화의 동학을 내장한 ‘메타구조’에 관한 문제설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어째서 우리는 플랫폼 위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됐는가, 어떻게 해서 우리의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행위와 상호작용은 기업의 시장가치로 환산되는가, 어떤 연유로 저항적인 것처럼 보이는 제스처들마저 지배와 축적의 논리 안으로 복속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어째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자유롭고 창조적이며 심지어 저항적일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가.


그런 까닭에, 새로운 비판 프로젝트에는 주체성에 대한 비판 역시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어느 평론가가 말했던 바와 같이, ‘이제 대중과 싸우는 일이 진보다.’[17] 이 말은 모순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대중이 바보여서 그들과 싸워 계몽시켜야 한다는 고답적인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고도화된 자본주의에 살면서 어느 나라보다 고학력을 자랑하는 한국의 분화된 대중들에게 계몽주의적 처방이 가당키나 할까. 문제는 전혀 다른 차원에 있다. 표적도 좌표도, 그 모든 대의가 사라진 시대에 양식화된 저항 정도의 시민성에 자족하면서 점차적으로 속물화·동물화되는 주체성에 대해 사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우리 자신과도 싸워야 한다.

Notes

  1. 임진모, “대중가요가 있긴 한가”, ≪경향신문≫, 2015년 7월 11일자.
  2. 이동연은 199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문화집단들이 세대, 스타일, 디지털, 소비 등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적 코드를 관통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던 바 있다. 이동연, 『문화부족의 사회 ― 히피에서 폐인까지』, 책세상, 2005.
  3. 藤岡和賀夫, 『さよなら、大衆。―感性時代をどう読むか』, PHP硏究所, 1984; 博報堂生活総合研究所, 『「分衆」の誕生―ニューピープルをつかむ市場戦略とは』, 日本経済新聞社, 1985(하꾸호도생활종합연구소, 최병선 옮김, 『분중의 탄생』, 21세기북스, 1988). 참고로, 앨빈 토플러 역시 『제3의 물결』(1980)에서 미디어의 탈대중화(de-massifying) 추세에 관해 언급했던 바 있다. 그에 따르면, 미디어의 탈대중화는 인간정신의 탈대중화를 견인한다.
  4. 브랜드 소비는 상품에 대한 높은 ‘존중감’에 준거하지만, 러브마크 소비는 거기에 더해 상품에 대한 높은 수준의 ‘애정도’를 포함한다. http://www.lovemarks.com/learn/about (2017년 10월 20일 검색)
  5. Nick Srnicek, Platform Capitalism, Polity Press, 2017. 특히 2장 참조.
  6. 개인들의 위상이 게스트와 호스트,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의 경계를 횡단하는 현상을 ‘양면 네트워크 효과’라 부른다. 마셜 밴 앨스타인 외, 이현경 옮김, 『플랫폼 레볼루션 ―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지배할 플랫폼 비즈니스 모든 것』, 부키, 2017. 60쪽.
  7. 대중매체가 마치 주사바늘처럼 수용자에게 메시지를 주입한다는 이론.
  8. 카카오TV의 전신이었던 다음팟TV는 (동영상 재생 프로그램과 실시간 방송 기능이 통합된 장점을 제외한다면) 네이버 V앱이나 아프리카TV, 나아가 유튜브 등에 비해 업계 후발주자에 가까웠다. 그러나 2014년 다음과 카카오가 합병하면서 기술적 융합이 동반되었고 자연히 미디어 플랫폼 시장에 지각 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음의 포털 사이트 기능과 카카오의 모바일 플랫폼이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면서 전무후무한 거대 플랫폼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이는 기성 TV의 보조적 기능을 맡던 곰TV 모델과 실시간 상호작용으로 호응을 받던 아프리카TV 모델을 결합한 것이었다.
  9. 마셜 밴 앨스타인 외, 앞의 책. 59쪽.
  10. 그런 까닭에 대다수 플랫폼들은 초기의 대량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콘텐츠 매입에 총력을 기울인다.
  11. 또 하나의 공통점은 모든 채널, 모든 영상에 광고가 삽입된다는 사실이다. 카카오TV 이용자들은 광고를 통해 콘텐츠 이용의 대가를 지불하는 셈인데, 여기서 발생한 수익의 일부는 콘텐츠 제공자들에게 배분된다. 광고 수익은 카카오 미디어 플랫폼의 콘텐츠 수익 전체를 관장하는 비즈스테이션(Biz Station)을 통해 할당되는데,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배분 비율은 유튜브에 비해 약간 적은 수준 정도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2. 오늘날 문화예술정책에서 언급되는 융복합 문화예술과 구별하기 위하여 컨버전스 컬처라는 원음을 그대로 표기하도록 한다. 젠킨스는 컨버전스 컬처를 미디어 융합과 대중들의 참여문화, 그리고 그들의 집합지성이 복합되어 창출되는 것으로 본다. 헨리 젠킨스, 김정희원·김동신 옮김, 『컨버전스 컬처 ― 올드 미디어와 뉴 미디어의 충돌』, 비즈앤비즈, 2008.
  13. 여기서 데이터가 가장 근본적인 단위로 구실하는 점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데이터 사회에 관해서는 『문화과학』 87호(2016년 가을호)의 특집 글들을 참조할 것.
  14. 필립 M. 나폴리, 백영민 외 옮김, 『수용자 진화 ― 신기술과 미디어 수용자의 변화』, 나남출판, 2013.
  15. Joss Hands, ‘Introduction: Politics, power and ‘platformativity’’, Culture Machine, vol 14, pp. 1-9.
  16. 서동진, 「알튀세르와 푸코의 부재하는 대화: 정치적 유물론의 분기」, 에티엔 발리바르 외, 『알튀세르 효과』, 그린비, 2011.
  17. 함돈균, ‘이제 ‘대중’과 싸우는 일이 진보다 ― ‘네티즌-대중’은 중요한 정치적 현상으로 인식돼야’, ≪한겨레 21≫, 674호, 2007년 8월 20일.

Who's 김성윤

profile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및 운영위원입니다. 주전공은 사회학을 하고 있고 최근에는 플랫폼 자본주의, 도시재생과 민주주의 등의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시간이 나는대로 연구소 홈페이지에 들러서 이용자 여러분들과 교감하도록 하겠습니다. :)

팀 블로그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들의 연합 블로그입니다

  1. profile

    해명되지 않는 ‘포획’과 ‘저항’

    사회적 경제에 대한 믿음은 지속될 수 있을까. 국내 사회과학계에서 사회적 경제 담론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한 것은 노무현 정부 당시인 2000년대 중반쯤이다(김준환, 2004; 한상진, 2004; 황덕순, 2004a; 황덕...
    Date2017.12.09 Category By김성윤 Reply4 Votes1
    김주
    역시 김성윤소장님의 이론적 날카로움이 빛을 내는 분석입니다. 저 스스로 이 책을 쓸 때 느꼈던 일정한 이론적 긴장과 혼란 그리고 이 책의 문제의식과 여러 부족한 점들을 보완하고자 다른 구도로 한국의 사회적 경...
    저는 두 분의 논전 혹은 의견교환을 보며 행복해 하는 중입니다
    Read More
  2. 이론/논문
    profile

    플랫폼과 ‘소중’ : 생산과 소비의 경합이라는 낡은 신화의 한계상황

    “‘빅뱅’의 ‘뱅뱅뱅’처럼 히트곡은 지금도 쏟아져 나옵니다. 하지만 과연 그 곡들이 대중적 히트곡일까요. 옛날 히트곡은 여러 세대와 계층이 아는 소위 전 국민 히트송이었죠. 지금은 특정 세대와 집단 사이의, 그들...
    Date2017.11.28 Category이론/논문 By김성윤
    Read More
  3. 산업/정책/운동
    profile

    IMF 이후 문화정책의 변화와 전망

    1. IMF 효과 (1) IMF 이전 : ‘문화적인 것’의 모호성과 ‘정치의 문화화’ - 문화 개념과 지위의 불완전성 : 발전주의 시기 문화정책의 문제점을 꼽아보면 다음과 같은 쟁점들을 들 수 있다. 국풍81이나 이른바 3S정책...
    Date2017.11.26 Category산업/정책/운동 By김성윤
    Read More
  4. 대중문화
    profile

    팬덤, ‘머글’들은 모르는 공동체

    어떤 차이 1999년. H.O.T.의 문희준과 베이비복스의 간미연 사이에 연애 루머가 돌았다. 그러자 문희준의 일부 극성팬들이 간미연과 베이비복스에 협박 편지를 보내는 등 테러(에 가까운 행위)를 감행했다. 당시 편지...
    Date2017.11.26 Category대중문화 By김성윤
    Read More
  5. 대중문화
    profile

    인문학 르네상스의 속사정 ― '알쓸신잡'으로 보는 인문학의 쓸모와 또 다른 위기

    르네상스? 스타 PD 나영석이 유시민, 황교익, 김영하, 정재승과 손을 잡았다는 건 확실히 놀랄 만한 일이었다. 인문학이 엔터테인먼트의 한복판에 들어섰단 사실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다들 의아해했다. 대체 ...
    Date2017.11.26 Category대중문화 By김성윤 Reply2
    ps
    구글링중에 우연히 들리게 되었습니다.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Read More
  6. 정치사회
    profile

    중산층의 그늘: 신화, 아비투스, 이데올로기

    우리의 삶은 모순투성이다. 그런 한에서 대한민국은 굴러간다. 다음 표[1]를 보면 느끼는 바가 생길 것이다. 표 왼쪽은 소득과 자산에 따라 OECD 기준으로 나눈 계층들이고, 위쪽은 해당 조사의 응답자들 자기 판단에...
    Date2017.07.15 Category정치사회 By김성윤 Reply3
    읽었음!
    Read More
Prev 1 2 3 4 5 6 7 8 9 10 ... 55 Next
/ 55

Powered by Xpress Engine / Designed by Sketchbook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