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사단법인 문화사회연구소

산업/정책/운동

IMF 이후 문화정책의 변화와 전망

2017년 하반기 학술단체협의회 연합심포지움 "IMF 20년, 한국사회의 변화와 전망"에서 발표했던 원고입니다. 참고로 이 발표문의 일부는 지난봄 성공회대에서 열렸던 맑스코뮤날레 발표 원고에 기초해 있습니다. 어쨌든 발표를 위한 아이디어 정리 차원의 페이퍼이므로 인용을 금합니다.
by 김성윤 posted Nov 26, 2017 Views 680 Likes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Extra Form

1.jpg

 

 

1. IMF 효과

 

(1) IMF 이전 : ‘문화적인 것’의 모호성과 ‘정치의 문화화’

 

- 문화 개념과 지위의 불완전성 : 발전주의 시기 문화정책의 문제점을 꼽아보면 다음과 같은 쟁점들을 들 수 있다. 국풍81이나 이른바 3S정책에서도 알 수 있듯 ① 문화나 예술은 통치의 도구로 활용됐다. 심지어 문화정책뿐 아니라 민중운동 진영에서조차 문화를 선전과 동일화하고 있을 정도로 이와 같은 인식을 공유한 측면이 있다. 그런가 하면 문화 개념은 종종 ② 장르화된 상징적 표현의 형식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문화예술이 현실의 물질적 토대와 맺는 관련성을 간과하게 만들었고, 동시에 문화를 예술과 같은 자율적 상징체계로 이해하게끔 하는 데 기여했다. 그런 맥락에서 문화정책 역시 다분히 ③ 고급예술 중심적으로 편중됐다. 물론 신군부 들어 (엘리트뿐 아니라) 민중적 전통문화에 대한 제도적 포섭이 있긴 했지만, 이는 고급예술의 경계의 해체라기보다는 지배적 범주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높은 가치를 인정받게 됐다는 사실을 의미할 뿐이었다.


- 전체주의적 동원 : 따라서 예술지상주의와 예술의 도구화 사이의 내용적 차이는 불분명한 것이 된다. 예술을 추구하면 할수록 정치적 동원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은 군부개발독재 시대의 비극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시기에는 문화예술정책이란 것의 실체가 없었다고 보는 게 중론이기도 하다. 존재했던 것은 전체주의적 동원을 위한 기술들뿐이라는 것이다.


- 하위장르에 대한 규율 : 고급문화의 저편, 대중문화의 사정은 어땠을까. 문화를 굳이 예술에 등치시킬 게 아니라면, 1980년대까지의 문화정책은 ‘문화정책’으로 명문화되지 않는 주변화된 정책적 결정까지도 포함할 것이다. …. 문화예술정책의 지원과 통제를 받던 표현형식들이 시민들의 감각을 다루는 이데올로기적 장치의 일환이 됐던 반면, 대중문화에 대한 통제는 주로 시민들의 일상적 관심사와 행실을 규율하는 데에 초점이 있었다. 유희적 쾌락을 허용하면서도 미풍양속 같은 질서를 정립하는 통치적 균형 감각[1] 정도가 관건이었다.


- 불안정성 : 이런 맥락에서 과거의 문화정책은 구조기능주의적으로 말하자면 사회적 개인들의 잠재성을 관리하는 차원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개발독재 시기 문화예술이란 전체 정책적 우선순위에서는 다분히 부수적이고 부차적인 관심사였지만, 동시에 통치와 축적의 지속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관심사이기도 했다. 문화정책의 불안정성이란 단순히 그것이 주변적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축소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당시의 지배 체제가 그만큼 선진적이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어떤 정치 진형을 막론하고 ‘문화적인 것’을 이론적으로 규명하기 어려웠다는 점에서 연유했다고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1990년대 : 문화적 전환과 ‘문화의 경제화’

 

- 지속적 경제 위기와 산업구조 문제 : 1980년대 후반 3저호황은 유례없을 ‘문화의 시대’에 토대를 구축했다. 일찍부터 산업구조 개편에 대한 정책적 수요가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규율이 용이한 노동집약형 산업구조를 부차화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경제 위기의 조짐이 노출되고 문민시대의 새로운 통치 기반이 확립됨으로써 오랫동안의 빗장도 해체되기 시작했다.


- 굴뚝 없는 산업의 고부가가치 : 김영삼 정부하에서 <쥬라기 공원> 한 편과 현대자동차 1백만대를 등치시켰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전통적 제조업의 성장 동력으로서의 한계와 더불어 이른바 굴뚝 없는 산업의 중요성이 공식적으로 추인하는 상징적 언술이었기 때문이다. 문화산업은 기본이고, 금융·서비스·관광 같은 비물질적 부문들의 비중이 날로 커져간 것도 이 시기에 연원이 있다.


- 문화의 경제화 : 문화에 대한 재발견은 이전 시기와는 질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정치의 문화화’로 표현할 수 있는 군부 정권 시기와 다르게, 김영삼 정부부터는 ‘문화의 경제화’라는 양상이 지배적이게 됐기 때문이다. 문화가 예술지상주의 또는 (그와 무관치 않은) 정치적 도구로 격하됐던 게 이전 시기의 문제였다면, 이즈음부터 문화는 산업지상주의와 경제적 도구로의 방향성을 갖게 됐다.


- 문화적 전환 : 대략 1992년부터 이른바 ‘문화적 전환’이란 것이 한국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포스트’를 접두어로 하는 새로운 흐름은 예술 사조는 물론 철학적 세계관에도 변화가 일어났다는 증거였다. 이것이 일군의 문화운동 진영으로부터 제기됐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서 문화운동 진영은 크게 두 가지 이론적 과제를 갖고 있었다. 재래의 문화 개념을 청산할 것, 그리고 문화를 중심으로 세계를 재편할 것. ① 우선 곤란에 처한 문화 개념을 구조할 필요가 있었다. 전체주의적으로 전유되는 문화를 구원해내기 위해서라도 엘리트주의를 배척하고 일체의 위계구조를 해체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저급문화 취급 받던 영역은 대중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재규정되었으며, 문화는 사고와 표현의 정수(essence)만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나오는 일상적인 것’으로 재정의됐다. ② 문화적 전환의 요체는 세상의 문물을 문화적인 것으로, 또는 문화적인 것을 중심으로 본다는 데 있을 것이다. 문화가 삶의 총체적 양식으로 정의 내려지는 순간 (이전 시기의 위계가 무너지는 동시에) 세상에는 문화가 아닌 것이 없게 된다. 문화운동의 의제가 ‘문화적 권리’의 확장으로 표현되고 삶의 질 차원에서 논구되는 것도 이런 구도와 무관치 않다.


- 논리적 모순 : 이 두 가지 과제는 대안 사회를 위한 청사진처럼 제시되기도 했던 게 사실이지만, 그와 동시에 특정한 논리적 충돌을 내포하기도 한다. 문화를 삶의 총체적 양식으로 재정의하면서 ‘문화적 삶’을 요구하는 것 사이에는 묘한 긴장이 숨어 있다. 문자 그대로 하면 문화적 삶이란 ‘삶의 삶’이라는 일종의 동어반복이다. 이것은 단순한 말장난만은 아닐 수 있는데, 왜냐하면 문화에 대한 이해방식에서 재래의 위계설정을 평탄화했으면서, 결국에는 삶다운 삶과 삶답지 못한 삶이라는 또 다른 구분선을 재도입하기 때문이다. 문화가 아닌 것이 없게 된다는 말의 뜻이 이와 같다. 모든 것이 문화라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문화가 아닐 수 있다는 의미와도 통한다.


- 역사적 모순 : 1990년대 들어 문화의 시대라는 벨 에포크(belle époque)는 대중적으로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시기로 기억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당시의 문화적 전환이 문화의 경제화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지는 아직 해명되지 않은 영역이기도 하다. (표현의 자유에 관한 쟁점이 잔존하기는 했지만 상대적으로 개방된) 유희적 쾌락 속에서 틈입해들어오던 것은 문화의 경제화하는 또 다른 의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시기에 과제가 문화의 정치화로부터 탈출하는 것이었기에 문화의 경제화라는 쟁점은 상대적으로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축적 논리에서 문화가 (재생산 영역으로만 인식되기를 멈추고)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영역으로 승인되는 상황에서 문화의 시대가 개막한 것은 어떤 문제의 해결 또는 유예인 것과 동시에 새로운 문제의 시작을 알리는 전조였을 것이다.

 

(3) 붕괴 이후

 

- 문화산업진흥정책 : 외환위기의 여파는 내수 위축 문제를 야기했다. 사람들은 문화소비부터 줄이기 시작했다. 김영삼 정부 당시 말로만 전해지던 문화관광산업의 중요성은 김대중 정부에 이르러 본격화됐다. 1998년 문화체육부는 문화관광부로 개명·개편되고, 1999년에는 ‘문화관광의 진흥’이 5대 국정지표에 포함되는 한편, 영상물·게임·음악·방송·광고·출판 등 오늘날 우리가 ‘문화콘텐츠’라 부르는 부분들에 대한 진흥계획이 수립되기 시작했다. 경제사회개발 5개년 계획에 필적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문화산업진흥 5개년 계획’이 범국가적으로 추진된 것이었다.


- 잉여와 대리-보충 : 이 시기에 나타났던 질적인 변화에는 모순적 측면이 있었다. 일례로 문화 분야에 대한 지출을 줄여야 가계가 유지되지만, 문화와 같이 잉여로운 분야에 대한 지출이 늘어나야지만 내수 유지로 경제가 활성화되고 나아가 산업구조 변동이 촉진될 수 있다. 이런 틈새를 소비자 신용 제도가 메워준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어쨌든 이 시기에 문화적인 것의 경제화가 데리다식으로 일종의 대리-보충(supplément) 구실을 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부족(default) 상태를 만회하기 위한 대체적 시도가 의도치 않은 초과(excess) 상태를 초래하는 것이다.


- ‘창의한국’ : 지식기반경제라는 경제학적 가상이 국민경제를 자극하는 동안, 노무현 정부 시기였던 2004년 『창의한국』이라는 책이 간행됐다.[2] 이 책에서 고지하는 27대 추진 과제[3]는 대략적으로 ‘예술 대중화’, ‘사회적 정의 실현’, ‘현대적 민족정체성 확립’, ‘지역균형 발전’, ‘문화산업 고도화’, ‘국제적 문화 교류’, ‘삶의 질 확대’ 등과 같은 중범위적 의제들로 범주화될 수 있다. 몇몇 논란거리가 잠재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전까지만 해도 모호했던 문화정책이 비로소 실체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으로 평가된다. 


- 문화연구와 문화정책 : 외환위기 이후로 (은유적 의미에서) 붕괴됐던 세계가 빠른 속도로 복구될 수 있었던 데에는 국가뿐 아니라 시민사회의 기여가 컸다. 이즈음에 이르러 문화연구에서 문화정책을 하나의 의제로 삼기 시작했던 것이 중요했다. 문화운동의 의제는 정책적 개입을 통해 국가의 기능을 전환시키는 쪽으로 모아졌다. 국가는 진보적 시민사회의 전문적 역량을 필요로 했고, 붕괴된 세계를 복구하는 한편 전과는 다른 세계를 구축하고자 했던 시민사회는 상대적 자율성을 자신하면서 파트너십에 뛰어들었다. 적어도 문화운동진영에서 ‘창의한국’은 민간이 주도하는 문화정책의 시대가 절정에 달했음을 알리는 징표였다. (비록 정권이 재교체되면서 9년 동안의 반동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일련의 과정에서 정치의 문화화라는 해묵은 문제는 확실히 경감되었다. 


- 새로운 문제 : 그러나 국가권력에 대한 대항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그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한 문화의 경제화, 즉 시장권력의 대두를 어떻게 볼 것인지 등에 관한 문제는 종종 침묵에 부쳐졌다. ‘문화산업의 고도화’는 시장의 정상화 및 지속가능성을 의미했을 뿐, 시장에 대한 시민사회적 통제력 강화를 의미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잃어버린 9년 동안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사회적 삶의 현실은 문화운동 및 문화정책의 의제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환시켰다. 새로운 문제가 부상할 수밖에 없었는데, 예술가들의 경제적 생존이라든가 점점 더 희박해지는 문화적 향수권 같은 관심사가 중요한 과제들로 인식됐다. 

 


2. IMF 이후 문화정책의 쟁점


(1) 문화적 권리를 위한 공적 개입으로서 문화운동

 

IMF 구제금융을 거치고 문화의 시대라는 거품조차 꺼질 무렵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한쪽에선 하자센터가 발족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문화연대가 만들어졌다. 두 조직의 성격이 묘하게 달랐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하자센터가 수행적 과정을 통해 다른 주체를 만들고자 했다면, 문화연대는 상대적으로 인식적·감각적 운동을 통해 넓은 의미의 사회운동과 연계하는 문화적 실천에 강조점을 두었다. 어찌됐든 둘 모두 문화의 시대, 문화연구의 시대가 낳은 최종 결실이나 마찬가지였다. 1990년대가 문화이론과 문화연구를 통해 지적 작업에 몰두했던 시기라면, 2000년대는 그 방향이 문화기획과 문화정책으로 초점화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4]

 

이 둘 모두 이전 시기와는 질적으로 다른 문화운동이었다. 문예를 중심으로 하던 민중문화운동은 하자센터와 문화연대를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됐다. 우선 그 대상부터가 달랐다. 노동자민중이 아니라 시민-대중이었다.[5] 둘 모두 정치적 시민 주체를 생산하는 데 있어 문화적 경험이 결정적이라는 데에 뜻을 같이 했다. 실제로 하자센터의 주축이었던 조한혜정은 문화연대의 공동 발기인 중 한 명이었고, 두 단체의 활동가들은 활발히 교류하기도 했다. 예술중심적이던 문화를 일상으로 끄집어내려 한다는 점, 그럼으로써 문화를 정치의 선전도구로부터 구출해 그 자체로 해방적 경험의 또 다른 토대로 만들어내려 한다는 점에서 둘의 전략적 목표는 같았다.


이즈음에야 문화적 권리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는 건 한국사회의 권리 담론구성체가 얼마나 후진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판단이 쉽지 않은 문제도 있다. 권리 담론이 제창되는 순간 운동은 제도나 정책에 말을 걸 수밖에 없으며 전능한(?) 국가가 무능(?)할수록 그런 요구를 하는 개인과 집단의 역할 비중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즉, IMF 이후의 문화운동은 예술에 대한 민주적 경험을 가능하게 한 대신, 또는 민주화된 예술의 경험을 가능하게 한 대신, 빠른 속도로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제도화의 길을 걷는다. 때마침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 시민사회의 전문적 역량을 필요로 했고, 때마침 문화연구는 실용화(하자센터)와 정책 개입(문화연대)의 전략을 모색 중이었다. 문화운동은 (문화연대를 주도했던) 강내희·심광현의 표현으로는 국가를 기능전환하고자 했던 것이었으며, 훗날 회고적으로 평가 받기로는 특수법인 형태 또는 연구용역 형태로 제도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새로운 운동의 등장으로 문화적 가치의 제고와 문화적 권리 실현이 이뤄졌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누구나가 보편적으로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현대 민주주의 질서에 문화적 가치와 권리의 언표를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각인시켜놓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관료행정과 경합하는 과정에서 또 때로는 그들 안에 들어감으로써 말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지점은 이들의 운동을 통해 문화민주화 또는 문화민주주의라는 가치가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적어도 두 가지 방향성을 내포한다. 하나는 (문화의 시대에 걸맞게) 예술을 끌어내려 일상의 차원으로 민간화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적 가치에 문화의 중요성을 기입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1990년대식 이론적 실천 또는 담론적 실천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효과를 창출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오늘날 (상당수 개별 예술가들에게는 여전히 낯선) 생활예술이니 일상창작이니 하는 말들을 접할 수 있는데, 이 같은 표현과 실천들은 2000년대 문화운동의 자장 속에서 나온 것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다. (여전히 지표화가 덜 되긴 했지만) 환경영향평가에 버금가는 문화영향평가 같은 제도 역시도 마찬가지다. 특별한 역사적 곡절을 겪지 않는 한, 문화적 권리의 수준은 높아지면 높아졌지 더 낮아질 가능성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고양되는 문화적 가치라는 것의 정치적 효과는 어떻게 가늠될 수 있을까. 시민들의 문화적 권리가 실현된다는 것과 그것의 효과라는 문제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더 많은 권리 실현이 정치적 주제임은 분명하지만, ‘그’ 문화적 권리라는 게 대체 무엇인지는 여전히 논쟁적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문화적 권리가 더 많은 소비문화의 향유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소비자주권운동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 문화적 권리가 문화산업의 정상화(투명성, 종다양성 등)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시장자유주의 운동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 문화적 권리가 문화적 자산의 공유재적 성격 강화를 의미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대중적 문화민족주의로 갈지, 부문화된 시민사회운동으로 갈지, 사회주의 이행 전략으로 갈지는 그 어떤 보증도 할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2000년대 이후 문화운동은 이 모든 것을 포괄하고자 했었다는 사실에 있다. 일례로 심광현은 문화연구를 ‘진공청소기’에 빗댄 적도 있었는데, 그것은 그만큼 다루지 않는 영역이 없다는 일종의 이론적 자부심의 발로였을지 모른다. 하물며 이것이 실천 운동 속으로 구체화되었으니 그 효과는 실제로도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그와 관련한 효과 중 하나는 보는 사람마다 문화운동에 대한 평가가 제각각이게 된다는 점에 있다. 누군가에게 이들의 운동은 소비자운동으로 폄훼되었고, 누군가에게는 시장에 영합하는 운동처럼 보였을 것이다. 또 누군가에는 도대체 어떤 식으로도 정체화할 수 없는 초인적인 운동처럼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여간해선 어떤 정치적 장소에도 빠지는 법이 드물었으니 말이다.


자연히 그 모든 성과에는 (단순히 국면적 특수성으로 핑계댈 수만은 없는) 일정한 오류가 포함되기도 했다. 국가의 기능전환이라든가 시장의 정상화 같은 전략적 목표는 지난 시기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인 동시에 또 다른 문제의 시작을 알린 것이기도 하다. 예술 표현과 문화기획 능력이라는 전문적 역량, 그리고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비전은 새로운 시대에 요구되는 질서와 불화를 일으키기보다는 선택적 친화성을 갖는 쪽에 가까웠다. 국가의 서비스화 추세 속에서 전문가들의 개입은 사회적 쓸모가 있었고, 마찬가지로 자기조정적 시장을 추구하는 쪽에서도 문화운동의 의제들은 경제외적 쓸모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운동이 체계에 개입할수록 행정적·재정적 지원 역시 불가피했다.


결국 문화운동을 통해 신장하고자 했던 문화적 권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돌아오게 된다. 물론 여기서 더할 나위 없는 문화적 임파워먼트의 기회와 권리가 향유된 점은 분명한 공적이다. 그리고 그것 자체가 운동의 의제 중 하나였다는 점에서 그들의 목표 역시 일부분 성취된 것이며, 앞으로도 추동력을 받아야 할 부분 중 하나이다. 그렇지만 문화적 권리가 신장되는 과정에서 그 뒷문으로 국가의 통치화 또는 사회화라는 과정 또한 수반된다는 점, 그리고 국가로부터 시장의 탈착근화(그렇지만 지연되는 시민사회로의 착근화) 역시 뒤따른다는 점에 대해서는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혹시라도 문화적 경험은 현대 자본주의 체계와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달리 말해 스타일적으로 찬란한 경험을 함으로써 다른 주체가 생산된다 할지라도 정치적 주체의 생산은 한없이 지연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해서 실현되는 문화적 권리 자체라는 것도 재고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예술을 다양한 방식으로 민간화했던 것이 문화적인 것과 민주주의적 것의 결합으로 통용되긴 했지만, 이것이 문화 또는 예술을 통한 해방이라는 전망과 얼마나 부합하는 것인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이 부분에 대한 해명에 실패하는 한, 문화적 권리의 실현과 문화자본의 향유 사이에서는 이론적 구분 또한 실패할 수밖에 없다.

 

(2) 예술정책의 두 가지 방향 : 아방가르드 또는 착한 예술

 

시간을 훌쩍 넘어, 2009년 이른바 ‘한예종 사태’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문화와 예술 그리고 사회와 정치의 관계성을 염두에 둔다면 말이다. 그리고 한예종은 문화부 산하 직속 예술학교라는 점에서도 그 자체로 문화정책의 바로미터가 된다. 한예종 사태는 이명박 정부와 노무현 정부, 그리고 유인촌·신재민·박종원과 심광현·이동연·진중권·황지우 사이의 싸움으로 기억된다. 2009년 한예종 사태는 단순히 정치적 싸움이었을까. 누군가는 내쫓으려 했고, 누군가는 맞섰다. 예술계의 암투가 있었다고도 한다. 신생 국공립 예술대학의 질주에 대한 기성 사립 예술대학들의 질투 같은 것. 그래서 중앙대 연극학과 교수 출신 유인촌 장관을 등에 업고 한예종을 망가뜨리려 했다는 것. 예술 분야를 국가가 장악하려 한다는 비판도 나왔다. 파시즘이 연상됐을 것이다. 우파 정권이 예술을 장악하려 했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비판들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부족하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DJ-노무현 정부 때 한예종의 예술교육 정책 패러다임은 정치적으로 순수하게 중립적이었다는 뜻일 텐데, 그건 당사자들 입장에서도 동의하기 어려운 판단일 것이다. 한 마디로 헤게모니 싸움이었다. 단순히 예술계의 정치적 알력 다툼의 차원이라는 건 절대 아니다. 사태의 표면은 누가 근무에 태만했는지, 공금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따위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 사태를 전후로 해서 예술 자체에도 어떤 사건이 기록된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당시 황지우 총장을 중심으로 한예종에서는 (요즘이라면 융복합예술이라 불렀을) 미디어 아트에 대한 관심이 집중적이었다. 학교 자체의 예술 정책이었던 셈이다. 하이테크 미디어를 기반으로 해서 예술의 표현 방식을 극단점으로 몰고 가고자 했다. 또한 인터랙티브한 경험을 제공해서 관객·시청자·수용자의 미디어 리터러시를 끌어올리고자 했다. 영상 미학을 중심으로 예술의 다양한 표현 양식이 컨버전스되는 실험실이기도 했다. 여태껏 느껴보지 못했던 것이 튀어나왔고 여태껏 느껴왔던 것들이 동시에 낯설어졌다. 어쩌면 그것은 아방가르드 예술의 거의 유일한 정책적 실험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얼마 가지 않아 일련의 사태가 벌어졌다. 한예종의 예술 정책도 선회했다. 정권이 바뀌고 박종원 총장 체제에서 미디어 아트에 대한 투자는 멈췄다. 대신 찾아가는 예술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문화적 경험이 어려운 이른바 소외 계층, 취약 계층을 찾아가 음악을 연주하는 것. 혹은 그들과 함께 오케스트라를 연주하고 합창하는 것. 실험적 예술에서 착한 예술로 전환된 것이었다. 예술을 몰랐던 이들에게 예술을 안내하고, 예술의 수용과 활동이라는 미적 경험을 통해 존재론적 감각을 고양시키고자 했다. 상층계급 또는 중간계급의 전유물이나 마찬가지였던 예술과 문화자본은 이제 더 이상 그들만의 전유물이 아닐 수도 있게 됐다. 시간이 더 흐른다면 시민 모두가 평등한 문화자본을 보유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것은 저들이 의도치 않았던 예술 민주화의 효과를 (제한적이나마) 동반했다.


자, 이제 판단을 내려보자. 이 두 정책 중 어느 것이 옳은 걸까. 융복합예술을 중심으로 하는 실험적 예술정책의 길이 옳다고 보는가. 하지만 그건 너무 엘리트 중심적인 발상 아닐까. 대중들이 이해할 수 없는 예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그리고 인터랙티브 경험을 하더라도 미디어 리터러시가 있는 중상계층 이상의 전유물에 불과한 게 아닐까. 좋다. 이 길이 아니라면 문화자본의 분배를 강조하는 착한 예술 정책의 길이 옳다고 보는가. 하지만 그건 너무 시혜적이고 고리타분한 발상일 수도 있다. 예술이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그런 건 차라리 이데올로기라고 불러야 하는 게 아닐까. 사람들을 현재에 자족하게 만드는 관념적 안녕만 제공하므로. 점점 더 헷갈릴 수밖에 없다. 좌파는 엘리트주의적이고 우파는 대중추수주의적이다.


그런 맥락에서 한예종 사태는 예술의 범주화에 따르는 두 가지 극단점을 동시에 도열시켰던 사건인 셈이다. 어쩌면 이것은 문화와 예술 그리고 공공성을 둘러싼 개념들이 한데 뒤섞인 난장판을 연상케 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둘 다 공공이든 공유든 공적인 것을 핵심적 가치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예술이 어떠해야 공적인 가치를 제대로 실현할 수 있는지에 관한 명확한 입장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대체 어떤 패러다임이 더 공적 가치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을까. 착한 예술이야말로 더 공적이지 않은가. 아니면, 아방가르드 예술이야말로 사적인 것을 더 횡단하고 있지 않은가.


자유주의적인 공공성 통념에 입각한다면, 박종원 체제의 예술 정책에 손을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과 예술을 향유하는 것이야말로 공적이지 않은가. 물론 한국사회에서 가장 비즈니스 프랜들리했던 시기에 이런 공적 예술이 등장했던 건 여전한 궁금증으로 남을 테지만. 어쨌든 이런 시각에서 황지우 체제의 예술 정책은 공적 자원을 가지고 자기들 하고 싶은 실험을 사사화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통념과 다른 공공성 관념에 입각한다면, 황지우 체제에 손을 들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공적인 것이란 이성을 가지고 주어진 동일성으로부터 용기 있게 이탈하는 것이라는 칸트식 용법을 택한다면 말이다. 그런 점에서 착한 예술은 나와 세계, 나와 타인, 나와 나 자신의 관계,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앙상블을 재생산하려는 술수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오히려 자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주어진 상태에 의문을 던지고 전혀 다른 감각을 제기하는 실험적 예술이야말로 공적인 것 같기도 하다.

 

(3) ‘사회적+예술’이라는 형용모순의 등장

 

오늘날 예술가들에게 떠도는 유령은 분명 사회주의에 준하는 그 무엇일 것이다. 대중예술의 시대를 거쳐 공공예술의 시대를 지나온 오늘날, 지금의 예술은 무척이나 사회적이다. 누군가는 관계 미학을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생활 예술을 이야기한다. 심지어 예술로 치료도 한다. 효능이야 어떻든 예술은 우리들의 삶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어오는 친숙한 그 무엇이 된다. 관계 자체가 예술의 대상이자 예술적 표현이 되고 있다.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사회의 위기를 떠들어대는 마당에 예술이 사회적 관계의 회복을 논한다는 건 꽤나 의미 있는 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적잖은 작가들이 그런 점에 문제의식을 갖고 잃어버린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해 진력을 다하는 모습은 어느새 낯설지 않은 일이 됐다.


어쩌면 이것은 한예종 사태를 통해 제기될 수 있었던 질문이 불과 10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재빠르게 봉합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지 않나 싶다. 앞서나갈 것이냐 내려갈 것이냐는 전통적 질문에 맞닥뜨린 상황에서 오늘날 예술계에서 부상하는 담론은 함께 나가자는 쪽을 택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함께하는 것이 앞으로 나가는 길이라는 논리가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예술과 문화가 뜻밖에도 바로 이 지점에서 해후하고 있다. 지금까지 오는 동안, 문화는 예술로부터 떨어져 나왔고 예술은 일상으로 끌려 내려졌는데, 문화적인 것이 처한 모종의 한계상황에서 하나의 해답이 내려진 것만 같다.


물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격세지감을 느낄 일일 수도 있다. 예술의 본령이 금기에 도전하고 금기를 넘어서는 것이라 한다면, 그 금기란 지극히 사회적인 것일 터이다. 사회적인 것이 일종의 선긋기와도 같은 것인 이상, 예술은 언제나 그 구획에 답답함을 호소하고 질문을 던져왔다. 물신과 주술의 허구성을 폭로하면서 말이다. 흔한 말마따나 신자유주의 때문일 수도 있고 지구적 금융 위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개인들이 고립되고 관계가 전만 못하다는 불만이 일종의 정치적 성격을 획득하고 있는 요즘이다. 그렇지만 사회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처럼 둔갑하고, 일상적이고 사회적인 예술이 우리 시대의 비판적이고 정치적인 예술로 등치된다는 점은 자못 불편할 일이기도 하다. 관계를 회복하고 공감능력을 갖추는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심지어 소셜 미디어를 통해 만들어지는 대화와 집합적 의례들이 예술 양식의 일부가 된다.


그런 점에서 사회적인 것과 예술의 결합은 형용모순처럼 들린다. 어쩌면 이제까지의 역사적 경로를 통해 보자면, 실험적 예술과 착한 예술 사이의 극적인 절충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술과 일상이 해후하는 가장 최신 버전인 셈이다. 그 때문일까. 곳곳에서 이상한 징후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언제부턴가 예술도 노동이라는 언사가 뒤따르고, 예술가에게는 퍼실리테이터 또는 문화매개자라는 꼬리표가 달라붙었으며, 한쪽에서 파견 예술이 운위되는 동안 다른 한쪽에선 예술가들이 공공·준공공기관에 파견 나가기도 한다. 심지어 밴드 같은 동호회 활동이 생활예술, 생활문화 같은 칭호를 얻으며 정책적 지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것은 예술 자체에 근본적으로 구조 변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리는 걸까. 아니면 예술이 사회 내로 착근됐을 때 나타나는 이상 현상 같은 것일까. 때로는 시민사회적인 어떤 것이 물상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문화연구와 문화운동의 정치적 구호가 의도치 않게 현대자본주의의 지지대 구실을 해왔다는 비판을 모면할 수 있을까. 2009년 한예종 사태는 어떤 변곡점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1990년대 이래로 재조정되기 시작한 문화와 예술에 관한 통념이, 달리 말해 우리의 감각을 일깨우고 세계를 낯설게 만드는 운동이 어떤 한계 상황에 봉착했음을 알려주는 일종의 위기 신호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술의 정치적 성격이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정치가 사라진 시대에 예술은 사회적인 것으로부터 정치의 감각을 구제해낼 수 있을까. 또는, 문화적인 것 그 자체의 동요로부터 자신을 구출해낼 수 있을까.

 


3. 적폐와 새 판

 

- 앞으로의 두 가지 방향 : 정권이 또 한 번 바뀌면서 당분간 문화정책의 흐름은 두 가지로 나뉠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이른바 문화계에 똬리 튼 적폐를 청산하는 작업이고, 다른 하나는 이전과는 또 다를 정책적 기조를 확립하는 일이다.


- 적폐 청산 : 박근혜 정부 하에서 문화정책은 문화판이 소위 눈 먼 돈을 얼마나 쉽게 굴릴 수 있는 곳인지를 입증했다. 창조와 융성 같은 수사를 갖다 붙이면 개별 예술가들로서는 꿈도 못 꿀 어마어마한 돈들이 돌았다. 게다가 군부 정권에서나 있었을 일련의 사건들은 문화정책이 다시금 공보정책으로 퇴보했음을 알린 것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블랙리스트 사건은 검열을 비롯한 국가권력의 문제를 다시금 대두시켰다. 한 마디로 말해, 시계바늘이 거꾸로 돌아가 문화의 정치화라는 해묵은 의제가 되돌아온 것이다.


- 새 판 짜기, 또는 여전한 문제 : ‘창의한국’ 의제와 얼마나 변별될지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새 정부가 들어선 만큼 익숙한 듯 새로운 문화정책 패러다임이 모색되기도 할 것이다(예컨대 예술노동과 문화산업노동, 메이커컬처와 생활문화 같은 의제들이 추가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시계바늘을 제자리로 되돌려놓을 것인 만큼, 과거의 정치적 문제들이 되돌아올 공산도 커 보인다. 특히나 활발했던 세력 싸움에 비해 문화정책에 대한 문화정치적 비평이 거의 없었던 전례를 상기해본다면, 민관거버넌스를 둘러싼 쟁점(시민사회의 자율성과 역량 문제)이라든가 문화와 예술의 상업주의적 또는 사회학주의적 성격에 관한 쟁점 같은 것들은 여전히 불문에 부쳐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Notes

  1. 한편에서는 노동집약적 산업구조에 따라 금욕주의적 노동력을 생산·재생산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부당한 독재권력에 대한 초점을 회피하기 위해 탈정치적이고 유희적인 쾌락을 장려할 필요도 있었다.
  2. 이 책에서 제안된 문화 비전은 표제만 바뀌었을 뿐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도 그 기조가 유지되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3. 27대 추진과제는 다음과 같다. 1. 문화예술교육을 통한 문화역량 강화, 2. 학교체육 활성화를 통한 심신의 조화 발달, 3. 문화활동 증진과 여가문화의 질 향상, 4. 생활체육 활성화를 통한 국민 건강 증진, 5. 창의적인 청소년문화의 육성, 6. 양성평등 문화 확립, 7. 문화적인 노후생활 보장, 8. 사회적 취약계층의 문화권 신장, 9. 새 언어문화의 형성, 10. 열린 민족문화로 다가서는 문화정체성, 11. 문화유산의 보존과 전통의 현대적 계승, 12. 예술의 창조적 다양성 제고, 13. 스포츠의 시스템 개편과 지속적인 경기력 향상, 14. 문화산업의 고도화, 15. 관광산업의 전략적 육성, 16. 스포츠산업을 신 성장동력으로 육성, 17. 지역의 문화역량 제고, 18. 쾌적하고 하름다운 공강환경 조성, 19. 문화시설의 균형적 확충과 운영 활성화, 20. 국민에게 다가가는 문화정보체계 구축, 21. 지역문화의 역동적 특성화, 22. 농어촌의 문화환경 조성, 23. 신행정수도 문화기획, 24. 국가의 문화적 이미지 향상, 25. 국제교류 확대를 통한 문화다양성 증진, 26. 동북아 문화협력 강화, 27. 남북 문화교류 확대.
  4. 다른 한편, 이후의 문화연구는 대학원 과정을 통해 지적 체계를 제도화하는 길을 가기도 했다.
  5. 지금은 떼어냈지만 문화연대의 애초 이름은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였다.

Who's 김성윤

profile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및 운영위원입니다. 주전공은 사회학을 하고 있고 최근에는 플랫폼 자본주의, 도시재생과 민주주의 등의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시간이 나는대로 연구소 홈페이지에 들러서 이용자 여러분들과 교감하도록 하겠습니다. :)
Atachment
첨부파일

팀 블로그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들의 연합 블로그입니다

  1. profile

    해명되지 않는 ‘포획’과 ‘저항’

    사회적 경제에 대한 믿음은 지속될 수 있을까. 국내 사회과학계에서 사회적 경제 담론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한 것은 노무현 정부 당시인 2000년대 중반쯤이다(김준환, 2004; 한상진, 2004; 황덕순, 2004a; 황덕...
    Date2017.12.09 Category By김성윤 Reply4 Votes1
    김주
    역시 김성윤소장님의 이론적 날카로움이 빛을 내는 분석입니다. 저 스스로 이 책을 쓸 때 느꼈던 일정한 이론적 긴장과 혼란 그리고 이 책의 문제의식과 여러 부족한 점들을 보완하고자 다른 구도로 한국의 사회적 경...
    저는 두 분의 논전 혹은 의견교환을 보며 행복해 하는 중입니다
    Read More
  2. 이론/논문
    profile

    플랫폼과 ‘소중’ : 생산과 소비의 경합이라는 낡은 신화의 한계상황

    “‘빅뱅’의 ‘뱅뱅뱅’처럼 히트곡은 지금도 쏟아져 나옵니다. 하지만 과연 그 곡들이 대중적 히트곡일까요. 옛날 히트곡은 여러 세대와 계층이 아는 소위 전 국민 히트송이었죠. 지금은 특정 세대와 집단 사이의, 그들...
    Date2017.11.28 Category이론/논문 By김성윤
    Read More
  3. 산업/정책/운동
    profile

    IMF 이후 문화정책의 변화와 전망

    1. IMF 효과 (1) IMF 이전 : ‘문화적인 것’의 모호성과 ‘정치의 문화화’ - 문화 개념과 지위의 불완전성 : 발전주의 시기 문화정책의 문제점을 꼽아보면 다음과 같은 쟁점들을 들 수 있다. 국풍81이나 이른바 3S정책...
    Date2017.11.26 Category산업/정책/운동 By김성윤
    Read More
  4. 대중문화
    profile

    팬덤, ‘머글’들은 모르는 공동체

    어떤 차이 1999년. H.O.T.의 문희준과 베이비복스의 간미연 사이에 연애 루머가 돌았다. 그러자 문희준의 일부 극성팬들이 간미연과 베이비복스에 협박 편지를 보내는 등 테러(에 가까운 행위)를 감행했다. 당시 편지...
    Date2017.11.26 Category대중문화 By김성윤
    Read More
  5. 대중문화
    profile

    인문학 르네상스의 속사정 ― '알쓸신잡'으로 보는 인문학의 쓸모와 또 다른 위기

    르네상스? 스타 PD 나영석이 유시민, 황교익, 김영하, 정재승과 손을 잡았다는 건 확실히 놀랄 만한 일이었다. 인문학이 엔터테인먼트의 한복판에 들어섰단 사실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다들 의아해했다. 대체 ...
    Date2017.11.26 Category대중문화 By김성윤 Reply2
    ps
    구글링중에 우연히 들리게 되었습니다.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Read More
  6. 정치사회
    profile

    중산층의 그늘: 신화, 아비투스, 이데올로기

    우리의 삶은 모순투성이다. 그런 한에서 대한민국은 굴러간다. 다음 표[1]를 보면 느끼는 바가 생길 것이다. 표 왼쪽은 소득과 자산에 따라 OECD 기준으로 나눈 계층들이고, 위쪽은 해당 조사의 응답자들 자기 판단에...
    Date2017.07.15 Category정치사회 By김성윤 Reply3
    읽었음!
    Read More
Prev 1 2 3 4 5 6 7 8 9 10 ... 55 Next
/ 55

Powered by Xpress Engine / Designed by Sketchbook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