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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르네상스의 속사정 ― '알쓸신잡'으로 보는 인문학의 쓸모와 또 다른 위기

문학동네 92호(2017년 가을호)에 실렸던 글인데 팀블로그에도 포스팅합니다.
by 김성윤 posted Nov 26, 2017 Views 742 Lik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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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스타 PD 나영석이 유시민, 황교익, 김영하, 정재승과 손을 잡았다는 건 확실히 놀랄 만한 일이었다. 인문학이 엔터테인먼트의 한복판에 들어섰단 사실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다들 의아해했다. 대체 뭘 믿고 그런 모험을 한다는 건지. 물론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애초부터 나영석은 공중파에선 다룰 수 없는 포맷을 원했었고 그런 이유로 KBS를 떠나 케이블로 갔었으니까. 한물 간 노배우들과 떠나는 해외여행(<꽃보다 할배>), 몇 날 몇 일 죽어라 밥만 지어먹는 슬로우 라이프(<삼시세끼>), 과거 역전의 용사 갱생 프로젝트(<신서유기>)까지.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하 알쓸신잡)이라는 전혀 머리에 남지 않을 복잡한 제목의 프로그램도 그런 객기처럼 보였다.


물론, 보나마나 적잖은 화제를 일으키며 성공할 걸로 보이기도 했다. 단지 나영석 사단의 경험이나 유희열의 진행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모든 정황이 그랬다. <썰전>의 유시민과 <수요미식회>의 황교익은 이미 대중 스타 반열에 올라 있고, 김영하와 정재승도 그동안 <힐링캠프>나 각종 토크콘서트로 강연계를 휩쓸었던 바 있다. 더 말할 필요 있을까. 라인업 자체가 반칙인데 거기에 제작진 솜씨까지 깃들면 그걸로 사실상 게임 끝이다. 실패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 다만, 관건이라면 사람들의 입방아 정도였을 것이다. 필력과 화술 좋기로 이름 난 스타들이 나오니 그에 걸맞은 시청자들이 따라 다닐 테고 자연히 한 마디씩 하지 않겠나. 자연히 이 프로그램이 어떤 형식으로 어떤 내용을 담아낼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다 본 것처럼 또는 전해들은 것처럼, 프로그램은 재미있었고 패널 네 명의 입담은 구성졌으며 역시나 사람들은 말이 많았다. 프로그램 자체는 그동안 나영석 사단이 보여줬던 모든 것들의 종합선물세트였다. 여행, 먹방, 음악, 역사, 그리고 스토리텔링. 그러고 보면 언젠가 <1박2일>에서 유홍준이 답사 가이드를 했던 포맷의 확장판으로 봐도 될 것 같다. 어쩌면 그때쯤부터 인문학과 엔터테인먼트를 조우시킬 가능성을 염두에 뒀을 법한데, 사실상 그 당시 주인공은 <1박2일> 멤버가 아니라 유홍준이라는 ‘사람’ 냄새 나는 학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출연진들은 인문학 르네상스를 위한 어벤저스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굳이 끼워 맞추자면, 음식문화의 황교익, 문학적 상상력의 김영하, 과학인문학의 정재승, 역사의식의 유시민, 그리고 음악의 유희열.


우리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생각보다 많은 걸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른다. 소소하게 시즌2를 기다릴 수도 있고, 대개 그렇듯 유시민과 황교익의 아재스러움을 운운할 수도 있다. 물론 연예평론 수준 이상의 것들을 건드릴 수도 있다. 개념 갖춘 프로그램에 열광하며 탄생한 지식교양층을 자랑스러워할 수도 있고, 관점에 따라서는 남성 중심성이라든가 육체노동자들의 무관심 같은 것을 꼬집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는 답을 굳이 되뇔 게 아니라면 쉽사리 풀리지 않는 의문점 하나를 꺼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다 안나 까레니나의 법칙을 비롯한 인문학적 아포리즘들이 금요일 밤 프라임 타임에 전파를 타게 된 걸까. 어쩌다 인문학이 영광스럽게도 가장 인기 있는 콘텐츠 중 하나가 된 걸까. 그렇다면 인문학은 꽤 오랫동안의 위기이기를 그치고 부흥하고 있는 걸까. 우리는 또 다른 르네상스 시기라도 살고 있다는 걸까. 호기심 하나 던졌을 뿐인데, 어째선지 이야기가 길어질 조짐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인문학’의 연관 검색어 절대 다수가 ‘위기’와 관련됐었다는 사실을 알아챈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킬러 콘텐츠 중 하나로 등극한 마당에 그 시절을 망각했을 수도 있고 더러는 아예 기억이 없을 수도 있다. 오늘날 인문학의 옆자리는 살롱, 특강, 강좌, 최진기, 강사, 명언 등등이 대체하고 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여전히 ‘문송’(문과라서 죄송합니다), ‘인구론’(인문계 졸업생 90%가 논다) 같은 신조어들이 판을 치는 마당에 다른 쪽에선 인문학이 득세를 했으니 말이다. 확실한 건 이 양면성이 오늘날 인문학의 현실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인문학이 부흥 중인데 정작 인문학을 전공하면 망한다는 사실이다. 인문학도의 현재와 미래야 거론하기 시작하면 그 자체로 끝이 없으니 여기선 인문학 자체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도록 하자.


인문학의 위기는 끝난 걸까. 열풍이 불고 있으니까 적어도 유예라도 된 걸까. 현재 시점에서 말할 수 있는 건 위기에 관한 담론은 점차 소실 중이라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위기는 분명 존재하는데 위기가 표상되지 않는 아주 기가 막힌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절대적으로 비동시적이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이 상황의 귀결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분명 위기가 존재하는데 정작 그 위기를 어떤 상징으로도 부여잡을 수 없다면, 그야말로 위기가 아닐까. 아마도 혜안을 가지고 <알쓸신잡>을 그리고 인문학 열풍을 본 사람들이라면 이와 같은 추리에 성공했을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더 커지고 있다!’라고.


다른 시점에서 풀어보면 이런 이야기도 나올 수 있다.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수요는 넘쳐나는데 공급처는 제한적이고 다른 공급자들은 굶어죽기 직전 상태다. 인문학 ‘콘텐츠’ 시장의 독점과 대다수 인문학도들의 ‘프레카리아트’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체감하고 있는 인문학 열풍은 장기적으로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질 공산이 크다. 나락에 빠진 인문학도들은 우울(depression)해지고 실수요자로서 넘치는 물량을 감당할 수 없어서 판 자체는 공황(depression)에 빠진다. 그런데도 이와 같은 위기가 겉만 번지르르한 호황 덕에 신호조차로도 감지될 수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위기가 아니고 뭘까.


단순한 경제학적 농담이 아니다. 누군가는 인문학이 상품 세계 속으로 들어가 매매되고 있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느끼고, 그래선 인문정신을 회복하거나 구축할 수 없다고 푸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품화와 비인간화 같은 것들이 진정한 위기를 가리키는 말은 아닐지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상품 세계에 살고 있고 또 그런 한에서만 인문학을 소비할 수밖에 없으니까. 무슨 염세주의 같은 것이 아니다. 스승님께 직접 캔 나물이나 감자를 쥐어줄 게 아니라면, 이 상품 세계가 어떤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 심지어는 독점 같은 것도 너무 순진한 말일 수 있다. 그 정도는 인문사회과학 전공자로서 스타 강사들에게 느끼게 되는 상대적 박탈감으로부터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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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 텔레비전에 나오기까지

 

오늘날 인문학은 어떤 환대를 받고 있나. 환대를 받고 있단 사실을 알아채긴 쉬워도 어째서 그리고 어떻게 환대 받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다들 알다시피 텔레비전은 잘 나가는 것들을 끌어안는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하는 것도 사실은 그 전의 과정을 밟아야만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알쓸신잡>은 인문학 열풍의 어떤 정점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그 전부터 있어왔던 특정한 문화적 유행형식, 즉 인문학을 콘텐츠 구성요소로 가져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돌이켜 보면 <알쓸신잡>은 지나치게 오락적인 면이 있었다. 스타 강사들의 수다와 사생활을 리얼리티로 보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런데 그와 같은 오락성이야말로 인문학 열풍의 정점을 보여준다는 뜻이다. 엔터테인먼트가, 특히 나영석 사단이 아무하고나 손잡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계보를 추적해보자. <알쓸신잡>에서 오락적인 면을 한 꺼풀씩 벗기면, 가깝게는 대놓고 강연 프로그램을 표방하는 <어쩌다 어른>이라든가 버스킹 형식을 빌린 <말하는 대로> 같은 유사 강연 프로그램이 있어왔다. 특히 생물학적 나이와 지체된 사회학적 나이 사이에서 방황하는 40~50대의 토크쇼였던 <어쩌다 어른>이 강연 프로그램으로 변모한 일은 주목해볼 만하다. 신변잡기식의 흔한 토크쇼에 비하자면 설민석이 됐든 최진기가 됐든 인문학이 그만큼 경쟁력 있는 콘텐츠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일까. <김제동의 톡투유: 걱정 말아요 그대>나 <힐링 캠프>, 좀 더 멀리가면 <무릎팍 도사>에 이르기까지, 어느새 현대의 지식교양층들은 KBS1이나 EBS보다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에서 더 많은 걸 배우고 있다.


TV 밖은 더 뜨겁다. 150여개나 되는 독서토론 모임을 주관하는 ‘트레바리’에는 아직도 멤버십을 기다리는 사람이 잔뜩이고, 출퇴근길 지하철에선 스마트폰으로 ‘TED’ 삼매경에 빠진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누군가는 그래픽 노블을 논하고 누군가는 닝겐(人間)의 본성을 탐구하며 다른 누군가는 과학과 건축으로 세상을 보며 또 다른 누군가는 력사(歷史)를 종횡무진하며 현재를 성찰한다. 억압과 차별에 대한 성토는 기본이고, 금기시 여겼던 착취와 혁명의 문법을 슬그머니 익히기도 한다. 인문학 강좌는 어찌나 많은지 백화점에서 주민커뮤니티센터, 도서관과 시민대학에 이르기까지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렵다. 이쯤 되면 학부만 졸업하고 사회에 나간 인문학도들이 서러울 지경이다.


근 20년 동안의 위기가 언제 이렇게 열풍으로 반전된 것인지 단언하긴 어렵지만, 어렴풋이 2008~9년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몇몇 인사들이 토크콘서트를 열며 청년들의 아픈 마음을 달랬고, 이들 중 몇몇은 힐링 열풍에 힘입어 대중적인 스타 멘토가 되기도 했다. 실제적이든 상상적이든 멘토-멘티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더 많은 경험과 혜안, 즉 인문학적 소양 같은 것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때의 조짐은 비교적 자연스러웠던 측면이 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앞만 보고 달려온 걸까. 왜 우리는 근본적으로 성찰하지 못했던 걸까. 적어도 사람들은 궁금해 했던 것 같다. 쳇바퀴 같은 삶에 지친 직장인, 기능 중심적인 제도권 교육에 치를 떨게 된 학생들에게 무언가 근본적 회의가 솟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달리 말해, 신성불가침이었던 덕목, 효율성과 비용-편익이 사람들의 일상을 완전히 장악할 수는 없었던 셈이다.


시간을 거슬러 가보자. 1990년대 초반 인문학은 안팎으로 위기였다. 탈냉전과 문민정부라는 정세는 인문학의 좌표와 표적이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멀든 가깝든 점과 점이 있어야 나의 위치를 알 수 있을 텐데,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홀로 지배하는 세상이 오자 당시의 인문학은 해체나 구성 같은 언어 외에는 어떤 설명도 제공해주지 못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매끄럽게 변해버린 세상에서 할 말을 잃었던 것일까. 2000년대가 지나가는 동안에도 위기론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위기의식은 커져갔으며 그 누구도 뾰족한 답을 내놓은 적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가만히 있기만 했던 건 아니다. 실용적이고 분석적인 지식만을 요구하는 세상을 향해 쓴소리를 내놓기도 하고, 식민지적·분과적 지식 생산 체제에 빠져 대상도 없고 비판도 없는 학문이 돼버린 처지를 반성하기도 했다.


1990년대가 성찰의 시기였다면, 그에 반해 2000년대는 위기와 맞서 꿋꿋이 도전하는 시기로 볼 수 있다. 안팎으로부터 위기를 맞았던 인문학자들도 때마침 세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수유+너머’, ‘다중지성의 정원’, ‘지행네트워크’, ‘철학아카데미’ 등을 통해 인문학 강좌를 해오던 학술단체들이 서서히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저변을 넓혔다. 때마침 정부에서도 인문학 살리기에 나섰다. 명분이야 어쨌든 그만큼 인문학자들의 요구가 크고 무거웠다는 뜻일 것이다. 이에 발맞춰 제도권 인문학자들에게서도 영향이 나타났다. 수도권 지역의 인문학자들이 고담준론 논하는 데 그치는 동안, ‘서울공화국’에서 소외 받던 지역의 인문학자들은 주민들과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것을 오히려 반겼다. 지역 고유의 정서를 활성화하면서 주민들과 인문학적 대화를 나누는 것을 하나의 운동이자 인문학 자체로 여기면서 말이다.


확실히 인문학 위기론이 판을 쳤던 것에 비하자면 격세지감을 느낄 법한 요즘이다. 얼핏 보면 오늘날 우리는 인문학 과잉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건 인문학 르네상스를 추동하는 이 운동이 아래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2000년대 내내 인문학자들의 크고 작은 부흥 운동이 있었고, 어찌됐든 제 삶에서 나름대로 진정성을 추구하던 대중들의 열망과 만나면서 일련의 상업적 관계를 최소화한 채로 열풍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특히나 대중들이 원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설명을 바란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식이 어떤 식으로든 설명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에서, 인문학은 2000년대 후반 그와 같은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고자 했고 그에 걸맞은 사회적 역할을 수행했던 셈이다.


그러면 이대로 인문학은 행복한 결말로 이어져온 걸까. 이를테면 국가와 자본의 동학이 인문정신을 폐절시킬 때쯤 학계 주변부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난 이 움직임은 그 자체의 미덕들(인간성, 도덕성, 비판정신, 시민적 공공성 등)을 수호하면서 원하던 바를 얻을 수 있었을까. 물론 긍정적 신호가 없진 않다. 정확히 원한 만큼은 아니더라도 일부 성취는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신변잡기로 일관되던 텔레비전을 그나마 교양을 전파하는 매체로 조금씩 바꿔나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무한도전>에서 역사를 배우고 <알쓸신잡>에서 미래를 보게 되는 시청층에 있어선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사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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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있는 인문학

 

그러나 다른 질문도 가능하다. 사태를 긍정적으로만 보기에는 체계로 전유되는 과정이 눈에 너무 띄기 때문이다. 내가 소속된 연구소에서도 강좌 사업을 하는데 제법 성공을 거둔 강좌가 하나 있다. 질적 연구방법론 강의다. 질적 연구의 실증주의적 함정 때문에 여러 반론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넓은 의미에서 질적 연구방법론을 인간에 대한 탐구라고 했을 때 이 강좌의 성공은 고무적으로 생각해볼 법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 강좌의 수강생 절반 정도가 직장인들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논문을 쓰기 위해 해당 강좌를 듣는 게 아니라 직업 생활 때문에 이 강좌를 듣는다는 것이다. 물론 사정을 들어보면 주요 목적은 도구주의적이긴 하다. 사업을 수행할 때 사전 조사를 하거나 사후 정성평가를 할 때 인류학적 방법론이 중요한 참조점이 된다는 것이다. 어쨌든 인문학 열풍이 불더니 실제 생활에서도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온도차가 생긴 건가 싶었다.


실제로 놀랄 만한 일이 속출하고 있다. 구글에서 신규 채용자 6천명중 5천명을 인문학도로 뽑는가 하면, 이를 필두로 애플, IBM, 인텔 등 IT업계 전반에서 인류학과 심리학 분야 졸업자들을 대거 채용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도 오마이스쿨이 기업들과 제휴를 맺으며 직원들의 인문학 재교육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죽을 줄로만 알았던 인문학이 어느새 세계의 중심부에서도 적극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예전에는 인문학이 쓸모없는 학문이어서 냉대 받았다면, 외려 오늘날의 인문학은 가장 쓸모가 있는 학문으로 각광받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특기할 만한 것은 이러한 추세가 1990년대 인문학 위기론이 한창일 때 인문학자들이 제시하던 인문학의 살 길과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조동일은 당시를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학문 전체의 위기라 평가했는데, 이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인식을 경시하고 자연과학에서 유래한 분절적인 세계관이 판치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었다.[1] 그런데 그의 논지는 오늘날에 와서는 전혀 반대가 되고 있다. 전통적 인문학자들이 강단과 연구실에서 박혀 있는 동안, 세계의 동학은 어떻게든 수준 높은 인문적 교양을 요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인문학은 물론 학문 전체의 위기도 조만간 해소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융복합이니 통섭이니 해서 언제나 문제시되던 학문간 경계마저 허물어질 추세니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 같다.


물론 불온한 조짐이 없진 않다. 인문학을 넓은 의미에서 교양의 범주에 든다고 할 때 이 교양이 매우 기괴한 형태로 배치된 양상도 함께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엄 터너는 그의 저작에서 융합과 통섭 이후 교양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2] 지금 한국의 많은 대학이 그런 것처럼 인문학이 교양과목과 동일시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며 장차 나타날 가능성이 높은 문제기도 하다. 여기서 교양이 교양과목으로서의 교양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슨 말이냐면, 인문학이 교양과목으로 대체되는 것이 젊은 연구자들의 단기적 일자리 창출에는 도움을 주지만 궁극적으로는 전공자의 숫자 감소를 유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교양과목에 박사과정은 어울리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이때 교육되는 교양이란 결국 경영학이든 공학이든 다른 전공 분야의 하위 교양으로 이식될 뿐이어서 학문으로서의 품질조차 보증할 수 없는 처지가 될 수 있다.


쓸모없음의 쓸모라는 아주 잠깐 동안의 역설도 여기서 마침표를 찍을 수밖에 없다. 융합되고 통섭되는 인문학이 다른 학문들과 대칭적으로 합체될 것이란 보증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여전히 거기에는 쓸모 있는 인문학과 쓸모없는 인문학의 경계 내지 위계가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렇다. 앞으로 우리가 밀의 공리주의와 칸트의 도덕의무론을 배우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안드로이드폰을 살 것이냐 아니면 아이폰을 살 것이냐는 문제를 따지기 위함이다. 우리 시대가 가정하는 소비자란 단순히 비용-편익에 따라 합리적 선택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때때로 자기파괴적일 수도 있고 도덕적 감정에 지배될 수도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인문학의 전략적 보호와 육성은 기술적 운영체제만큼이나 도덕적 운영체제(moral operating system)를 통솔하고자 하는 이해관계 위에서 전개될 수밖에 없다. [3]

 

굴지의 IT기업들이 인문학도 채용을 홍보하면서 실제로는 주로 인류학 전공자나 심리학 전공자를 채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문사철은 왜 안 되는가. 그들은 여전히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 딱 교양적인 수준에서만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굳이 그 학문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어느 책 제목처럼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정도라든가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 정도만 익히면 그뿐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거의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거대 플랫폼 기업이 제국화하고 있다고 했을 때, 거기서 우리들 개개인의 동작과 동선 등등은 낱낱이 트래킹되어 맞춤형 서비스와 콘텐츠를 위한 알고리즘 체계에 기록된다. 그때 우리의 신체는 데이터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할 텐데, 여기서 쓸모 있는 지식이란 무엇이겠는가. 바로 인간 행동, 정확히 말해 데이터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 기여할 쓸모 있는 학문 논리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는 과거와 굉장히 이질적인 세계를 살게 되는 셈이다. 한때 세계를 호령하던 인문학이 일전에는 상아탑에 갇혀 쓸모없는 존재로 낙인찍히더니, 이제는 세상 밖으로 다시 나와 매끄러운 플랫폼 위에서 죽은 지식을 헌납하며 살아갈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인문학은 경제학과 진정으로 화해했다기보다는 인간학적인 요소를 탈취 당한 채 경제학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과거의 인적 자본이나 인적 자원처럼 추상적 언어와 제스처를 통해 스며들어가는 게 아니라, 도덕성이나 인간성처럼 인문학에선 거의 실체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것을 빼앗기면서 말이다.


심지어 오늘날 우리는 특정한 교양인이 되기를 끊임없이 재촉 당하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 무언가 알아야 하고 행해야 하는 사회다. 이때 우리가 갖춰야 할 교양이란 단순한 에티켓을 넘어선다. 그토록 원했던 총체적 인간의 회복이란 게 마치 이와 같다는 식으로 문사철을 배우고 생활코딩을 따라하며 생활문화예술도 틈틈이 익힌다. 4차산업혁명의 허와 실을 간파하고 미래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 오늘날 인문학 르네상스가 가리키는 바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은가. 위기 이래로 그토록 염원했던 미래 이미지가 마치 오늘날에 와서야 실행되고 있는 듯하다. 확실히 우리에겐 작금의 현실을 이해하고 표현할 언어가 부족한 것 같다. 그동안 비실용적이라고 냉대 받던 인문학이 실용성을 인정 받을 기회를 보자마자 융합이니 통섭이니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던 탓일까. 인문학의 비실용성과 길들여지지 않는 성격을 찬미하던 기억이 점점 희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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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이라는 취약점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접해봤음직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형도 쉬운 글을 쓰고 대중적인 강연을 했으면 좋겠어요.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너무 지들끼리만 놀아서 문제라니까요.” 우리나라 대중들의 반지성주의로 맞불을 놓긴 했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역시나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다. 정작 사람들의 호감을 살 법한 글을 쓰거나 말을 한다는 건 언제나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역시 <알쓸신잡>을 보면서 감탄을 연발했다. 어떤 때는 잘 모르던 것을 짚어주고 또 어떤 때는 어렴풋하던 걸 말해주니 속이 시원한 면도 있었다. 학자들이 학회 네트워크에서 주고받을 법한 고급정보(“영업 비밀”)까지 흘려주기도 하니 때때로 통쾌하기도 했었다.


사실 이 프로그램 하나만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는 건 다소 김빠지는 일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각박하게 흘러가는 세월에 대한 아재들의 통탄처럼 보이기도 하고, KBS1의 명사와 다니는 지역 맛집과 명소의 예능 버전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프로그램을 통해 오랫동안 남는 건 ‘나도 저기 가면 저거 먹어봐야지’ 하는 생각 정도고, 정작 거기서 오갔던 고담‘잡’론은 ‘신비’하게도 몇 일 가지 않고 사라진다. 고작해야 논란이 됐던 젠트리피케이션 이야기나 혼밥의 자폐적 성격 그리고 몇몇 박물관의 의미 정도. 하긴, 아무리 좋은 강의를 듣더라도 강의를 준비하는 선생만큼 많이 배우는 학생은 드문 법이다.


그에 반해 인문학과 엔터테인먼트의 융합이란 주제를 논한다는 건 상대적으로 첨예한 문제일 수는 있다. 애호가 입장에서야 더할 나위 없는 시청각 교재를 얻은 셈이지만, <어쩌다 어른>의 최신 강의를 듣든 <김제동의 톡투유>를 듣든 상투적인 교훈과 감정 이외에 무언가 내가 변화되는 경험을 한다는 건 어지간한 코드 접속이 아닌 이상 거의 희박한 일이다. 그러니까 오락성의 정도 문제를 떠나 거기서 인문학적인 어떤 것을 끄집어내는 건 극히 드문 경우라는 것이다. 대개는 인문학을 인간과 인간성에 관한 학문이라고 정의 내린다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문학을 인간적인 것에 대한 고민 같은 것쯤으로 가둬둘 필요는 없다고 본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인간성이 본질적이란 믿음에 대해선 엄청난 논란이 뒤따를 뿐이니까.


단적으로 말해, 인문학+엔터테인먼트에서 자기경화(硬化)의 계기는 넘쳐날지언정 자기전화의 계기는 결코 준비되어 있지 않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엔터테인먼트에서 자아의 과거-현재-미래의 연속적 관계를 끊어버리고 서로를 낯설게 할 경험을 제공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인문학+엔터테인먼트는 그래서 ‘인문학의 통섭’만큼이나 형용모순에 가까운 법이다. 인문학은 금기를 건드리지만 엔터테인먼트는 질문을 거둬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와 나 사이의 관계가 강연이든 콘서트든 그것을 접한 뒤 서로 이어지고 확고해진다면, 그래서 그런 경험이 총체적 인간으로서의 체험으로 오인되어 인문학의 세례 덕으로 생각된다면, 그것은 인문학의 위기를 가리키는 명백한 징표가 될 뿐이다. 그때의 인문학이란 흔히 말하듯 개념 있어보일지언정 힐링 담론의 일부가 되거나 미래에 대한 공포를 조장해서 현재의 자신을 다독이는 감정경제의 상품 그 이상이 되기 힘들다.


인문학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 문제에 관해서라면 이미 지겹도록 접해봤을 터이다. 초점을 거기에 두기 시작하면 우리는 원점으로 돌아오게 될 뿐이다. 문화산업의 ‘흡인력’이라든가 ‘문화자본화’ 같이 오래 묵은 답변도 없다. 이들 중 하나면 대중문화비평이 가능했던 시대가 있었을 정도니까. 그러나 원인을 알고 있음에도 병증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건 처방이 잘못됐거나 진단 자체가 고루해서 그런 것일 수 있다. 물론 불행히도 아직 우리에겐 사태를 전혀 다르게 진단할 만한 언어가 없다. 그렇다면 아예 관점을 전환해 인문학을 문제 삼아보는 건 어떨까. 그토록 고귀한 언어처럼 들리는 인문학을.


인문학이 하나의 완결적 논리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런 생각이 가능할 수도 있다(완결적이라면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어쩌면 인문학의 가장 큰 취약점은 그것이 바탕하고 있는 인간성(그리고 도덕성)이라는 덕목일 것이다. 물론 역사적 경험에 비춰보건대 그동안 인간성이란 덕목은 강력한 무기였다. 이 언어를 통해 자연에서 벗어나 사회적 질서를 이룰 수 있었고, 또 이 언어 하에서 자유와 평등을 두고 다툴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인간성은 하나의 해결책이자 동시에 문젯거리였다. 인간이란 범주가 논란의 연속이었단 사실은 주지하는 바와 같으며, 뿐만 아니라 태곳적부터 기원하는 특유의 본질주의적이고 규범주의적 속성 때문에 화해불가능한 문제들을 봉합해버리는 이론적·정치적 곤란들을 초래하곤 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대다수 인문주의자들에 따르면, 우리는 사람이니까 어울려야 하고 사람이니까 나눠야 한다. 바로 이때 인문학은 부득불 종교의 형식을 취한다. 근거는 한결같다. 우리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때로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많은 사실들에 눈을 감고 침묵해야 한다.


그러나 달리 말하자면, 그런 한에서 인문학은 하나도 위험하지 않게 된다. 군사정권이 됐든 유사-독재정권이 됐든 표적이 명확한 때에 인간성은 그 자체로 비인간에 대한 도전을 끌어내는 효과적인 추동체였다. 반면,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지금 시대에, 그것도 좌우를 막론하고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외에는 이렇다 할 대안이 없는 시대에 인간성은 더 이상 아무 것도 의미할 수 없는 텅 빈 기표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인간성을 무기로 우리가 분노할 수 있는 표적은 갑질하는 상류층이나 유아 성폭행범처럼 염치없다고 여겨지는 대상들 위를 떠다닐 뿐이다. 교양머리 없는 아줌마, 가르치려 드는 꼰대, 싸가지 없는 10대, 시대를 착각한 노인, 그리고 온갖 적폐들. 인간성에 의지하는 한 인문학이 할 일은 (통찰은 물론 분석이나 해석이 아니라) 감정 표출밖에 없는 것 같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는가?!’


인문학이 생명력을 가지는 시점은 바로 이런 추세와 더불어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을 놓지 않는 놀라운 감각에 있을 것이다. 즉, ‘어떻게 인문학이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의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과학으로서 개개인들의 사이코그래피(psychography)와 유동하는 플로(flow)를 측량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인문학은 뉴미디어 문화산업의 시중을 들고 있는 게 아닐까. 인문학은 잠깐은 영화롭되 언젠가는 지나갈 문화콘텐츠 형식으로 흡수된 게 아닐까. 이런 상황에서 유(類)적 본질을 찾는 것만으로 인문주의자들은 만족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어지간해선 즉답이 어려운 의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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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라 말할 수 없는 위기

 

한 가지 응답이 있다면 그것은 ‘출구가 없는 세계에서 그나마 어떤 다른 코드 정도는 각인시킬 수 있지 않겠냐’는 반문일 것이다. 예컨대, 모두가 향토 맛집 탐방을 다닐 때 김영하가 파스타 투어를 다니고, 모두가 지역 명소를 찾을 때 정재승이 가장 ‘힙’한 장소를 찾으며, 모두가 자기 견해를 유지한 채 따지고 들 때 유시민은 생각을 고쳐먹고 토론을 이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우린 그저 제작진이 편집한 영상만을 봤을 뿐이니, 이보다 더 심오한 코드들도 있었을지 모른다. 어쨌든 우리가 <알쓸신잡>을 비롯한 인문학 관련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이들로부터 모든 걸 다 배우거나 알았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그들은 그들 각자의 방식으로 고군분투했을 것이고, 또 시청자들은 매회 에피소드를 챙겨보며 그들 나름대로의 입장에서 어떤 전율 같은 걸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런 반론들이 뒤따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 하나하나에 재반론을 붙여보면서 마무리를 갈음하도록 하겠다.


우선, 쓸데없는 잡학사전이라곤 하지만 적어도 한두 가지는 건질 게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요소들만으로 인문학과 연예산업의 만남이 의미하는 바를 얼마나 해명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런 식이면 막장드라마에서도 비평적으로 뭔가 얻을 건 있다. 40대 이상 여성의 불안심리나 성적 판타지 같은 것들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에 대한 분석적 가치가 있는 논점들이 있다손 치더라도, 이 작품들이 시청자나 관객에게 어떤 체험을 제공하느냐는 성격이 전혀 다른 문제에 해당한다. 물론 수용자 개개인이 각기 다른 현실을 살고 있기에 간혹 누군가는 우연찮게 자기전화할 계기를 가질 수도 있겠지만, 텍스트 자체가 그럴 공간을 열어두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다른 차원이 된다.


다음으로, 인문학의 위기를 운운하던 시절에 비하자면 그래도 좋아진 점이 없지 않을지 모른다. 어쨌든 과거 엄혹했던(?) 시절에 비하자면 인문학이 대중들과 더 가까워진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런 만큼 사회가 한층 더 성숙해질 기미가 보인다든가 하는 것은 억측에 불과하다. 예컨대 현재 불고 있는 인문학 열풍에서 상품 소비적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 정리가 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공부하러 도서관이 아니라 카페에 가는 시대다. 깨달음을 얻으러 책을 읽거나 선생을 찾는 게 아니라 TV를 켜거나 다시보기를 클릭한다. 이건 마치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지 않고 토렌트로 다운 받아보거나 아니면 <출발 비디오 여행>으로 예고편을 보는 것과 흡사한 이야기 같다. 어쨌든 인문학이 더 좋아진다고 생각한다면 더 많은 해명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끝으로, 인문학이 엔터테인먼트와 조우해서 서로 공진화한다는 데서 미덕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엔터테인먼트가 새로운 콘텐츠 전략을 수립하고 인문학이 출구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만나게 된 건 이미 아는 바와 같다. 그런데 오늘날의 흐름에서 적어도 두 가지 정도는 더 염려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이 둘이 과연 평등하게 만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출연자와 제작진이야 서로 평등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인문학과 엔터테인먼트의 만남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을 넘어서는 차원의 문제다. 다른 하나는 인문학과 엔터테인먼트가 만남으로써 어떤 효과가 발생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인문정신의 대중적 확산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뉴미디어 문화산업 내로의 식민화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물론, 이 같은 재반론들에도 불구하고 이들 프로그램이 시청자들에게 어떤 감각적이거나 경험적인 각인을 남겼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문학+엔터테인먼트에 대한 체험이 어떤 사람에게는 새로울 게 없고 차라리 오락거리로서의 만족도가 컸을 것이라면, 다른 사람들에게 이 체험은 전혀 다른 맥락으로도 작용했을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이야말로 오늘날 인문학이 결코 식민화될 수 없는 보루로서 가장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는 영역 아니던가. 그러나 이 역시도 인문학의 운명을 낙관하게 할 만한 응답은 아닌 것 같다. 축적되는 감각과 경험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재구성되든, 괴랄 맞은 열풍과 더불어 인문학은 더 이상 예전 같은 식으로는 표상될 수 없는 또 다른 위기 상태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쓸모가 생겼다는 들뜬 마음에 그 누구도 판세가 바뀌는 걸 눈여겨보지 못했던 것 같다.

Notes

  1. ≪한겨레≫, 「한국 인문학의 쟁점 (1) 한국 인문학의 위기 다시'사람다운 삶'을 생각하자」, 1996년 10월 15일.
  2. Graeme Turner, What's Become of Cultural Studies?, Sage, 2012. 특히 4장 참조.
  3. ≪한겨레≫, 「구글은 왜 인문학도 5천명을 뽑을까」, 2011년 5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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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및 운영위원입니다. 주전공은 사회학을 하고 있고 최근에는 플랫폼 자본주의, 도시재생과 민주주의 등의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시간이 나는대로 연구소 홈페이지에 들러서 이용자 여러분들과 교감하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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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2'
  • ps
    psyseon 2017.12.13 05:33
    구글링중에 우연히 들리게 되었습니다.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profile
    김성윤 2017.12.13 11:47
    네ㅎㅎ 부족한 글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종종 들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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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s
    구글링중에 우연히 들리게 되었습니다.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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