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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문화사회연구소

정치사회

중산층의 그늘: 신화, 아비투스, 이데올로기

≪말과 활≫ 14호(2017 여름호)에 기고한 글
by 김성윤 posted Jul 15, 2017 Views 498 Lik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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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모순투성이다. 그런 한에서 대한민국은 굴러간다. 다음 표[1]를 보면 느끼는 바가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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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왼쪽은 소득과 자산에 따라 OECD 기준으로 나눈 계층들이고, 위쪽은 해당 조사의 응답자들 자기 판단에 따라 나눈 계층들이다. 쉽게 말해 왼쪽이 객관적 계층 위치라면, 위쪽은 주관적 계층 의식이라 할 수 있겠다. 이 그림은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는 것일까. 굉장한 괴리 현상이 특징적이다. 계층 ‘위치’와 무관한 계층 ‘의식’을 가진 경우가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중산층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망설일 수밖에 없다. 중산층이란 말은 너무나 많은 걸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기준에서 답해야 할지 모호하기 때문이다. 특정 기준을 선택하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적확한 것인지 자신하기 힘들다. OECD 기준에 의하면, (가구소득 기준으로) 중위소득의 50%에서 150% 사이면 중산층이고 그 아래위로 빈곤층과 상류층이 포진한다. 인구 비중으로 보면, 대략 상위 20%, 중간 60%, 하위 20%로 나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60%가 중산층이란 말인데 얼떨떨할 수밖에 없다. 평상시 생각들보다 훨씬 높은 수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객관적 지표상 중산층으로 분류된다 하더라도 당사자 개인적으로는 중산층이란 생각이 전혀 안 들 수도 있다. 국제 기준으로 눙칠 수 없는 한국만의 현실이 있을 것이고, 경제학적 차원으로 양화하기 힘든 사회문화적 삶의 질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객관과 주관의 불일치, 담론과 실제의 괴리 같은 현상 자체가 신기한 일은 아니다. 굳이 이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실재와 경험 그리고 표상과 현실이 언제나-이미 어긋나 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다만, 이 같은 괴리에 일정한 경향성이 나타난다는 사실에는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중산층에 대한 객관적 지표에 비해 주관적 체감이 크게 뒤떨어지는 현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OECD 기준을 따른다면 우리나라에서 중산층이 되려면 (4인 가구 기준으로) 월 가처분소득[2]이 354만원, 자산이 2억5천만원 정도가 돼야 한다. 그에 반해 국민들이 생각하기에는 월 가처분소득 500만원, 자산 7억8천만원이 중산층 진입의 기준점이 된다. 소득에서 150만원, 자산에서 무려 5억3천만원의 시각차가 있다는 이야기다. 몇 가지 시사점을 바로 얻을 수 있다. 중산층으로서 살려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적정 수준보다 더 많은 소비를 하면서 살아야 하고, 안정적일 뿐만 아니라 신규 소득을 창출할 수 있을 정도의 자산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격차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선진국 문턱에 진입하면서 우리 국민들의 눈높이가 높아져서? 과잉소비가 일상화돼서? 불로소득에 혈안이 돼서? 한마디로 속물주의가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어서? 물론 이런 의혹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더 풍요로운 삶에 대한 욕망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면, 사태를 다른 측면에서 이해할 필요도 있다. 중산층 신화를 단순한 촌극이나 비극 따위로 치부해서는 곤란하다는 이야기다.

 

 

1. 붕괴 이후의 중산층 신화

 

앞선 표에서 어떤 위기를 읽어낼 수도 있다. 위기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중산층의 소외감이 크다. 객관적으로는 중산층에 해당하더라도 그들 중 절반 이상(54.9%)이 자신이 저소득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달리 말해, ‘중산층이 몰락하고 있다. 한국 경제에 적신호가 켜졌다.’ 둘째, 좀 더 사려 깊게 생각한다면, 중산층의 삶의 질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더 맞는 말 같다. 소득이나 재산이 어느 정도 있더라도 부를 체감할 수 없다는 건 그만큼 삶이 팍팍해서일 것이다. 시간도 여유도 없다는 방증이다. 고로, ‘중산층이 쓰러지고 있다. 한국 사회에 적신호가 켜졌다.’ 셋째, 그 와중에 고소득층 응답자는 2.6%만이 스스로를 고소득층이라 여기고 있다. 97.4%는 자신이 중산층 이하라고 답했다. 물론 상류층마저 삶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저소득층 응답자의 17.8%가 스스로를 중산층이라 여긴다는 점까지 감안한다면) 저 압도적인 수치들에 어떤 과잉이 숨어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그렇다. 저들 중 상당수가 자신의 삶을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중산층은 기만이다. 한국 문화에 적신호가 켜졌다.’

 

중산층은 내적인 토대가 무너져 있고 외적으로도 허위의식의 징표가 되고 있다. 중산층의 몰락, 심지어 고소득층에게서도 나타나는 ‘서민’의식의 만연 현상을 너그럽게 헤아리자면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 핵심어가 될 것이다. 고비용 사회, 불안정 노동, 자산 기반 사회, 취약한 사회 보장 등등. 실제로 이런 요인들이 중산층의 해체를 가속화하고 있다는 것쯤은 주지의 사실이다. 4인 가구가 4천5백만원에 달하는 연소득을 취하더라도 식구들이 제대로 먹고 살기 어려운 현실, 일자리의 질이 나락으로 떨어져 인간의 존엄마저 위협 받는 현실, 2억5천만원 정도의 자산 규모로는 전세보증금도 턱없는 현실, 자식 잘 키워서 덕 보는 것 말고는 안정적 노후를 설계하기 어려운 현실. 그러니 어지간한 수준으로는 (중산층이 아니라) 서민에 동일화하는 게 기이한 일만은 아닌 셈이다. 오히려 그렇게 살고 있는 주제에 중산층이라고 주장한다면 비웃음을 들어야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중산층 신화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서민주의 같은 것이 대체하고 있는 것일까. 문제는 중산층 신화가 전혀 다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근본적으로 따진다면, 이제야 제대로 된 꼴을 갖추게 된 것처럼 보인다. 가만히 생각해보자. 중산층이 자기 자신을 서민 또는 저소득층으로 동일화한다고 해서 서민 ‘신화’ 같은 게 만들어질 리 있을까. 신화 없이 살 수 없는 세계에서 중산층 신화는 중산층이 없어질 때 만들어진다.[3] 모든 신화가 그렇듯 신의 시대가 끝났을 때에야 신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처럼 말이다. 개인적 노력으로는 중산층 진입이 어려워지고 중산층 지위를 재생산하는 것마저 힘들어질 때야말로, 중산층이 하나의 신화적 표상으로 기능하는 게 아닐까. 요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신화는 생각 이상으로 중층적이다.

 

중산층이 얼마나 애증의 대상이 됐느냐 하면, 중산층으로의 동일화가 (중산층이 아니라) 고소득층의 몫으로 나타나기까지 하는 기현상으로 답을 대신할 수도 있다. 상류층이 중산층을 참칭한다? 흔한 분류법을 따라 계층을 9가지로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상상·상중·상하, 중상·중중·중하, 하상·하중·하하. 대략 상하층에 해당하는 이들이 그들 자신의 애매함(?)을 무기로 중산층을 표방할 때가 있다. ‘저 그렇게 돈 안 많아요.’라는 말을 겸손의 발로로 예단해선 곤란하다. 소득이나 자산이 적다는 판단은 계층 사다리에서 그들보다 높은 곳을 바라보는 한에서만 적절하기 때문이다. 우리들 대다수는 이런 제스처를 징징거림이나 기만이라 여길 것이다. 중산층의 탈을 쓰고 부리는 기만은 확실히 문제적이다. 중산층이 계층적으로 평균 지대를 의미한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예컨대 재산세, 상속세, 종부세 같은 쟁점이 있을 때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고소득층의 것으로 표현하는 것과 중산층의 것으로 재현하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번에는 자신이 중산층으로 살고 있다는 저소득층의 경우를 보자. 이 속 편한 사람들을 어떻게 봐야 할까. 안분지족하는 천성을 갖고 있어서일까. 엄청난 물가와 주거비 그리고 사교육비 등 대도시에나 있을 법한 사회경제적 압박에 시달리는 게 아니라면 상대적으로 적은 소득과 자산으로도 중산층 이미지의 삶을 충족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헛된 망상이라는 판단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저소득층이 스스로를 중산층에 동일화하고 있다면, 이는 중산층이란 언표가 또 다른 의미에서 신화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일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또는 프레카리아트(precariat)로서 격차가 점증하는 세계에 분노를 누적하기보다 중산층으로 계층이동을 꿈꾸거나 물화된 의식을 갖고 있다면 말이다.

 

중산층의 자의식을 비롯해 오늘날 사회 현상들의 상당 부분이 중산층 붕괴와 맞물려 있다지만 이것이 중산층 신화의 붕괴 자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시금 말하지만 신화는 재편되거나 이제야 제 꼴을 갖추는 측면이 있다. 다시 중산층 당사자들로 돌아가보자. 분명 객관적 위치로서 중산층이 위협을 받고는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주술의 힘이 필요해진다. 중산층으로서의 삶을 누린다는 것은 어떤 걸까. 대강 이렇다고들 한다. 최소한 자기 집을 갖는 것, 자동차를 보유해서 집과 직장을 좀 더 자유롭게 고르고 활동 범위를 넓히는 것, 자녀의 미래를 위해 대학교육의 기회를 도와주는 것, 건강을 위해 더 나은 먹거리와 의료서비스를 감당하는 것, 퇴직 후에도 퇴직금이나 연금으로 금전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는 것, 충분한 휴식과 화목을 위해 가족 여행을 다니는 것 등등.[4]

 

그런 점에서 중산층적 삶이란 단순한 라이프스타일을 넘어 우리 시대에 작동하는 하나의 규범이기도 하다. 규범이 작동하지 않을 때 아노미가 나타나고, 약속된 풍요가 불가능할 때 이상 현상이 나타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다. 가령 몰락한 중산층은 자신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상회하는 과잉소비를 한다. 이때 중산층은 명백한 판타지다. 어떤 상류층은 규제나 조세를 회피하기 위해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주장한다. 이때 중산층은 다른 계층을 기만하는 술책이다. 또 어떤 중산층은 자신이 중산층이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기도 한다. 이때 중산층은 소외된 자의식이다. 굉장히 아이러니한 일이다. 중산층이 무너지자, 신화가 작동하고 사회 전체가 중산층을 욕망하게 된다는 것 말이다.

 

 

2. 정상가족과 ‘깨시민’ 코스프레

 

또 다른 모순은 중산층의 사회적 행위 수준에서 관찰할 수 있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오늘날이라면 중간계급이라 불렀을 사람들을 쁘띠부르주아라 폄훼했던 것이 육체노동자에 대한 괜한 고집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대개의 소시민이 그렇듯 부르주아에게 이끌리거나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할 수도 있는 그들의 모호한 위치성이 기회주의적 행동 양식으로 구조화되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는 것 같다.[5] 그러나 오늘날이 과거보다 더 고도화된 산업구조와 그에 상응하는 사회 질서를 갖추고 있다는 점, 따라서 그만큼 기회주의적 행동의 공간이 다양해지고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다는 점 정도가 다르다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안락한 주거환경을 꾀하고 보육과 먹거리에 신경 쓰며 가족 모임과 외식을 즐겨하고 치아교정과 사교육 등 자녀의 미래를 대비한다. 중산층 라이프스타일의 기준이 가족주의에 기대고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특히나 한국처럼 사회 보장이 전적으로 사적 책임으로 지워진 세계에서는 가족이 거의 유일한 친밀성과 연대성의 공간으로 기능한다. 그런데 친밀성과 연대성이라는 가치가 이러저러한 행동들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각각의 행동들에서 기회주의적 전략의 흔적을 찾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부동산으로 자산 증식을 꾀하고 유기농으로 보신하며 정상가족 코스프레를 즐기고 자녀에 투자해서 본인들의 미래를 대비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런 행동을 적당히 도덕적이고 미학적인 말로 순화시켜 자기 스스로를 기만하는 속물근성을 내비치는 것은 아닐까. 자녀의 미래를 위해 대학교육의 기회를 돕는 것이 중산층 부모의 규범처럼 여겨지긴 하지만, 이러한 규범적 행동이 자녀의 세속적 성공을 통해 노후에 대비하는 최종 보험이 된다는 사실을 완전히 회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풍요로운 생활에 대한 갈구 또한 마찬가지다. 평안한 삶의 바탕에 정상가족 판타지와 안락전체주의[6]의 위험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물론 이런 맥락으로 그들의 행동 전체를 싸잡아 비난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전략적 행동이 언제나 성공할 수는 없다는 점에 있다. 우리 사회의 구조는 그들의 기획이 온전히 성공하기를 기다리지도 내버려두지도 않는다. 중산층 라이프스타일이 사실상 상류층의 것으로 바뀌어버린 상황, 즉 중산층은 저소득층으로 내몰리고 그 자리는 또 다른 고소득층이 대체함으로써 중산층 문화의 상대적 위상이 상향조정된 상황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어떤 선의로 포장하든 그들의 가족주의 전략이 언제나 성공하리란 보장은 결코 없다. 부동산에 매여 하우스 푸어로 전락할 가능성, 자녀의 미래를 위해 기러기 뛰고 노래방 도우미 뛰다가 사실상 가족이 해체될 가능성 등등은 이미 얼마간 현실화되지 않았는가. 오늘날 같이 중산층의 두터움이 얄팍해지는 상황에서 그들의 생존 전략은 어느 순간 가장 어리석어 보이는 치킨게임의 일부가 돼버렸다. 때때로 어디선가 성공신화가 타전되어 오면서 자기 환멸이 지연되고 있을 뿐이다.

 

불안의 증폭은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양대 계급 사이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불안은 예비되어 있는 것이지만, 오늘날의 불안감은 남다른 점이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능했었던 삶이었기에, 그리고 내 주변의 누군가는 아직 경험하고 있는 삶이기에, 중산층 판타지를 온전히 버릴 수만은 없는 게 아닐까. 그런데다 하층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공존하는 것. 그런 것들이야말로 이들의 요동치는 사회심리를 설명하는 두세 가지 축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결정적으로, 고소득층이나 저소득층과 달리 중산층은 대물림되지 않는다. 아마도 이 사실이 가장 근본적일 것이다. “중산층의 불안은 바로 중산층 지위 유지의 어려움, 지위 이탈에 대한 두려움에서 발생한다. 또한 중산층 내부에서의 불평등과 갈등에서도 발생한다.” [7]

 

대물림을 위해선 결국 자녀 교육 같은 문제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야구장 패러독스 같은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앞 사람이 일어나서 응원을 시작하면 뒷좌석 관객도 어쩔 수 없이 일어나서 경기를 관람하게 된다는 역설. 사교육이 어떤 사회적 해악이 되는지를 알면서도 여기에 동참할 수밖에 없는 중산층 부모들의 상황을 설명하는 데 이만큼 적합한 표현도 드물 것이다. 어디 그뿐일까. 기꺼이 현금지급기를 자처하는 가부장, 모성애로 무장한 입시 매니저, 그리고 부동산에 대한 이들의 남다른 사랑. 여기서 인큐베이팅 되면서 평생을 부모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부채감에 시달려야 하는 자녀들은 정규직 취업을 위해 ‘노오력’하면서 자기 착취를 해야만 하는 부조리극을 완성시킨다. 이런 것들이 오늘날 중산층이 추구하는, 또는 가장 중산층적이라 표현될 수 있는 정상가족의 모습이 아닌가.

 

가족 바깥으로 나가면 또 어떤가. 소시민적 삶의 결정타는 이른바 ‘깨시민’이라는 말에서 가장 극적으로 관찰된다. 정규적인 시민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세대가 깨시민으로 주체화되는 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나눔, 도움, 돌봄 등등 부르디외가 ‘문화적 선의’라 불렀던 중간계급 특유의 아비투스가 사회적 경제 같은 현대판 쁘띠부르주아적 사회주의의 밑바탕이 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일 것이다. 실제로 어느 통계를 보더라도 이들 만큼 빈민 구호와 자원봉사를 열심히 하는 계층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확실히 이들의 시민의식은 남다른 데가 있다. 부동산과 주식 차익거래에 혈안이 돼다가도 법정의 『무소유』를 읽으며 평안을 찾고, 자녀들에게 중산층 지위를 상속시키려 평생을 경주하면서도 약자를 돌볼 줄 알며, 어느 재벌이 해안가에 기름을 유출시키고 무책임으로 일관하고 있으면 기꺼이 뛰쳐나가 자기 손으로 기름을 닦아내는 사람들이니까.

 

그들은 중간에 있는 게 아니라 끝없이 왔다 갔다 한다. 자원봉사로 공동체에 이바지하면서도 집값과 주가를 끝없이 확인하면서 공동체를 파괴한다. 깨시민으로서 홈스쿨링이나 대안교육으로 자녀를 키우다가도 입시의 순간이 오기 시작하면 불안감에 휩싸인다. ‘너도 이제 공부 좀 해야 하지 않겠니?’ 어떤 순간이 도래했을 때 태도가 돌변하는 중산층의 모순성을 다른 누구도 아닌 중산층 자녀들이 간파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겠다. 하긴, 그들 자신도 부모에 대한 환멸과 부채감 사이에서 평생을 동요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그들은 대체적으로 절묘한 평형감을 유지하면서 버텨낸다. 예컨대, 적폐청산을 위해 문재인 팬덤의 일원이 되는 것과 문재인 테마주(株)에 열광하는 것 사이의 간극에서 부끄러움을 위한 여백은 어지간해선 허용되지 않는다. 이런 심리적 장치가 있다고 가정하지 않는 한 그들의 자기 확신과 평안한 정서 상태를 설명할 길은 없다.

 

 

3. 중산층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범주

 

중산층이란 말이 이데올로기적 표현 중 하나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것은 일종의 어둠상자와도 같아서 여러 선들이 얽혀 있어서 복잡하고, 바늘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더라도 눈에 보이는 것은 이미 거꾸러져 있어서 실제 사태에 대해선 오해하기 십상이다. 그러니 실타래를 풀고 뒤집어진 이미지를 되돌리는 것만으로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셈일지 모른다. 계급만으로 모든 현실을 설명해낼 수 없는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중산층이 계급적 현실을 지워내는 이데올로기적 언표라는 혐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까지 이야기했던 것처럼, 중산층이란 말을 접했을 때 자본가계급이나 노동자계급을 연상하기는 어렵다. 대신 상류층이나 빈곤층을 떠올리게 된다. 물론 장점은 있다. 임금 소득뿐 아니라 부동산과 주식을 비롯한 자산 포트폴리오, 그리고 개인이나 가족의 경제학적 전략 같은 사회경제적 문제를 두루 살펴볼 수 있다. 이런 문제들을 제외하고 오늘날의 현실을 설명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단점 또한 명확하다. 이 언어에서 계급 프레임이 제거된다는 건, 다른 말로 하자면, 계급투쟁을 위시로 하는 구조화된 적대의 계기를 모호하게 만든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정치가 과소화된다.

 

힐난이 뒤따르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밥 먹듯 야근을 하면서도 해고의 불안에 시달려야 하는 노동자와, 부모가 물려준 건물에서 나오는 임대료로 무위도식하는 이를 똑같이 연소득이 7천만원이라는 이유로 같은 집단에 넣어야 하겠는가? 도무지 이 둘을 똑같이 ‘중산층’이라고 부름으로써 우리가 얻게 되는 경제분석상의 이점이나 세상에 대한 깨달음이 무엇인가?”[8] (경제학이나 사회학과 달리) 정치학에서 중간계급을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갈등을 완충하는 집단’으로 이해해왔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그들은 가능성을 가진 집단이고 그 자체로 사회적 공간인 셈이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정치 안정과 사회 영역의 민주화에 기여하는 점이 작지 않은 게 사실일 수는 있다. ‘중민’(중산층+민중) 같은 신조어가 있는 것처럼, 이들이 어떤 정치적 선택을 해왔느냐에 따라 한국 현대사의 풍경이 달라졌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한국의 사회변동을 추동했던 게 정말 이들이었을까. 전태일 없이? 노동자대투쟁 없이?

 

어떤 것들이 구조적으로 배제되고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단순히 빈곤층이 도태된다거나 상류층이 빠져나간다거나 하는 문제에 머무르는 차원이 아니다. 계층구조는 부단히 변화하지만 계급관계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중산층이라는 언어가 하층민들에게는 도피처를, 상류층에는 핑계거리가 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도록 하자. 그렇다면 중산층이라는 부유하는 기표는 누군가에게는 계급적 불만을 순치시키는 장치가 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계급 적대를 은폐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나아가 중산층이란 언표 자체가 계급 관계를 지워낸다는 점을 떠올리도록 하자. 결국 우리 모두는 어떤 언어의 장벽 같은 것을 세우고 그 뒤로 숨어버리고 있는 게 아닐까. 중립과 중도 따위가 지고지순한 가치처럼 떠받들어지는 세계에서 중간‘계급’이 상대적으로 과소화된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타인에 의해 계급으로 표상되지도 않지만 스스로를 계급으로 드러내지도 않는 중간계급의 주체성은 그래서 더욱 모호하다. 물론 중간계급이 특정 사회구성체의 윤리 의식을 나타내는 바로미터 기능을 한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들이 시민사회의 중추가 된다는 점 또한 마찬가지다. 정치를 헤게모니 투쟁으로 생각한다면, 그래서 지적·도덕적 리더십의 경합이 결정적이라고 여긴다면, 중간계급의 윤리 의식은 때때로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정치의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는 점 또한 명확하다. 윤리 자체가 정치의 전부를 대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요즘 주적(?)이 되곤 하는 ‘기득권 세력’이란 말의 한계가 대표적이다. 20년 남짓한 경험 속에서 기득권에 대한 분노가 누적되어 온 점을 감안한다면, 지배-엘리트 계층을 표적으로 삼는 언술과 관행이 정치적 행동의 중요한 돌파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비교적 자명하다. 우리는 이 세계에서 살아가야만 하고 또 싸워야 하니까. 그러나 세계의 문제를 부정부패와 탐욕에 의한 것이라 설정하는 것 그리고 결코 화해될 수 없는 계급적대에 의한 것이라 설정하는 것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지구적 금융위기는 월스트리트의 탐욕 때문이었나. 그렇다면 메인스트리트는 탐욕하지 않았었단 말인가. 아, 탐욕도 정도껏 하란 말인가. 그럼 탐욕 자체가 문제는 아니란 이야기인가.

 

윤리가 정치의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바로 이런 맥락 때문이다. 탐욕을 없애면 세계는 평화로워질까. 탐욕 부리는 자들을 끌어내리면 세계는 달라지는 걸까. 아니, 탐욕을 없앤다는 것 자체가 가능한 걸까. 중간계급의 리버럴한 성향은 합리성과 모종의 규범성을 통해 정치를 중지시키려 한다.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화하고 몰상식한 것을 상식적인 것으로 바꿔내기. 마키아벨리적 정치를 끝내고 플라톤적인 정치를 실현하기. 그들은 이상적인 상황, 즉 규범적 균형에 도달함으로써 위기가 재연되지 않는 것쯤에 만족하려는 것 같다. 우리는 중간계급이 어느 경우에 진보적이게 되는지를 누누이 들어왔던 바 있다. 이를테면 독재나 부패 같은 예외상황(?)이 노골적일 때 중간계급은 진보적이다. 그러나 이들이 어느 경우에 보수적이게 되는지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은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오늘날 점점 더 명확해지는 사실은 축적과 통치가 합리성에 의해 가동된다면 이들은 충분히 보수적이게 된다는 것이다. 중간계급의 쁘띠부르주아적 양면성은 다른 계급들이 보기엔 불편부당한 것이지만 적어도 그들 내면에서는 일관된 체계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지 않고서야 부끄러움을 피할 길이 없지 않을까.

 

중간계급의 정치적 주체성에 관해 한 가지 해명되지 않은 영역이 있긴 하다. 마르크스가 쁘띠부르주아 사회주의라 명명했던 것, 즉 이들 중 일부는 종종 사회주의적 전망을 가지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자유주의만으로 이데올로기적 무장을 하고 있다면야 공적 생활과 사적 생활의 불일치를 판별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적폐 청산을 외치다가도 정작 집으로 돌아와선 자녀 사교육에 열 올리면서 자기-전화 따위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을 두지 않는 야누스 같은 속물스러움을 지적하면 될 테니까. 그런데 여기에 사회주의적 의념이 들러붙게 되면 사정이 복잡해진다. 실제로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중간계급의 일원들은 얼마든지 어디서든 만날 수 있다. 홉스적 자연상태 직전으로 치달은 세계를 공동체주의적으로 구조해내려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사회와 공동체를 향한 전망이 포용적 성격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정치적 전망은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정확히 말해 헷갈릴 수 있다. 무엇보다도 ‘사회적’이라는 표제어가 함의하는 정치적 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사회 정의에 바탕을 둔 수정된 자유주의가 오늘날 사회적 경제, 마을공동체 운동, 그리고 도시재생 등등에 밑바탕이 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일 것이다. 이들은 사회주의와 자유주의가 모순을 일으킬 하등의 이유가 없다 주장하면서 정세에 따라 좌파와 우파를 넘나드는 유연성을 강조한다. 사회적 자유주의 바람은 민주당의 집권과 함께 당분간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될 공산이 커 보인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담론이 그대로 현실화된다는 보장은 없으며, 정의를 내세우는 윤리적 담론 자체도 중간계급 리버럴들이 구상하는 정치학적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자유와 정의, 자유시장경제과 호혜성, 그리고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라는 전망. 여기서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경합(contestation)하기보다는 적당히 타협하면서 다른 정치에 대한 가능성을 사실상 탈쟁론화(decontestation)하고 있다는 논점을 잃어선 안 된다. 단적으로 계급투쟁의 장이 ‘고용게임’의 링으로 변모했던 게 지난 십수년간의 일이었다면,[9] 이제부터 우리는 윤리와 역량을 아우르는 혁신활동가나 혁신적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의 노동자성을 지우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10] 이런 식으로 중간계급이 주도하는 정치적 전망들은 모든 도드라지는 것들을 평탄하게 만든다. 그들의 평안을 위해서, 그리고 그들 자신이 표상하는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서.

 

 

오늘날 사회비평을 한다는 것은 점점 더 중간계급, 또는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인 중산층에 대한 비평과 동일화되고 있다. 누군가는 현대 자본주의가 파국에 임박했다고 경고한다. 오늘날 우리가 경제학적으로나 윤리학적으로 공황 상태에 직면하고 있다면, 거기에는 구매력이자 시민으로서 중산층의 몰락이 증거가 될 것이다. 누군가는 인간성이 나락에 떨어지고 있다고 혀를 찬다. 오늘날 우리가 주어진 길에 안주하는 ‘동물의 길’과 스타일적으로만 체계에 냉소하는 ‘속물의 길’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다면, 그것은 중간계급이 처한 현실을 가리키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 누군가는 시장이 불러일으키는 사회성에 대한 파멸적 효과를 비판한다. 오늘날 우리가 헬조선을 만들어내는 뿌리 깊은 몰상식과 적폐에 분노하고 있다면, 윤리의 담지자로서 중간계급의 시민성이 가장 큰 무기가 될 것이다.

 

그런데 진정한 아이러니는 이런 설정이 자리를 잡을수록 사회 세계를 구조하려는 상상력도 부득불 중간계급 편향으로 이뤄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부패하고 무능한 기득권 세력을 표적으로 삼으면서 공유와 공생 등등을 새로운 좌표로 내세운다. 정치가 나아갈 길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면서 말이다. 어쩌면 그들의 약속과 바람대로 우리 시대를 점철하는 증오의 감정을 감축하고 자연상태를 순치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가져야 할 정치적 상상력의 한도가 팬덤화 양상으로부터 시작해서 친밀성의 정치, 소통의 정치, 상생의 정치 따위로 머물게 되는 것에 과연 만족할 수 있는지 또한 묻지 않을 수 없다. 중간계급에 드리워진 그늘 아래서 우리 모두가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Notes

  1. 현대경제연구원, 「현안과 과제: OECD 기준 중산층과 체감 중산층의 괴리」, 『이슈리포트』 13-41, 2013년 8월 26일자.
  2. 경상소득에서 비소비지출(세금, 4대보험료, 이자비용, 이전지출)을 뺀 소득이다. 소비 지출이나 저축 등으로 처분 가능한 소득이라 보면 된다.
  3. “현재와 미래 삶의 안정성 희구에서 중산층은 우리 사회 성공적 삶의 표상이다. 중산층 신화는 현재 중산층의 삶과 미래에 대한 기대에서, 그리고 과거 산업화의 경험에 만들어졌다. 그런데 중산층 형성이 신화가 되는 것은 그러한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현실을 뜻한다. 즉 중산층이 몰락하는 시기에 신화는 더욱 부각된다.” 조권중·최지원, 『중산층: 흔들리는 신화』, 서울연구원, 2016, 30쪽.
  4. 이은우·박동렬, 『중산층 실태분석과 육성 방안』, UUP, 2013.
  5. “현대 문명이 충분히 발달한 나라에서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부르주아 사회의 보완적인 일부로서 스스로를 쇄신하는 새로운 소부르주아 계급이 형성돼왔다. 하지만 이 계급의 구성원들은 경쟁 행위로 인해 줄곧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하고 있다.”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권혁 옮김, 『공산당 선언』, 돋을새김, 2010, 72쪽.
  6. 안락을 위해서라면 어떤 정치경제적 폐해도 묵인·동조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후지타 쇼조, 이순애 편, 『전체주의 시대의 경험』, 창비, 2014.
  7. 조권중·최지원, 앞의 책, 32쪽.
  8. 김공회, 「경제본질 보려면 ‘중산층’보다 ‘중간계급’ 개념을」, 『한겨레』(2015. 12. 15.)
  9. 김경근, 「구조조정 이후 현대자동차 작업장체제의 변화에 대한 고찰 - 고용게임을 중심으로」, 『현장에서 미래를』, 125호, 2006.
  10. 류연미, 「삶의 양식으로서의 청년 활동: ‘서울시청년허브’ 활동가의 실천과 서사」, 학술단체협의회 연합심포지움 자료집, 2016년 5월 27일; 김성윤, 「‘사회적인 것’의 이데올로기적 지형 : 사회적 경제와 공동체 논리의 역사적 과정과 담론적 질서」,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7; 김은지, 「‘혁신적 시민성’의 의미형성과 제도화 - 희망제작소와 서울 혁신파크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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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및 운영위원입니다. 주전공은 사회학을 하고 있고 최근에는 플랫폼 자본주의, 도시재생과 민주주의 등의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시간이 나는대로 연구소 홈페이지에 들러서 이용자 여러분들과 교감하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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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3'
  • profile
    재은 2017.08.08 19:05
    읽었음!
  • profile
    김성윤 2017.08.10 13:43
    읽었구나! 전공자 앞에서 부끄..
  • profile
    재은 2017.08.11 19:27
    전공자라 나설 만큼 제대로 아는 게 없어서 부끄...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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