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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방백과 지문이 되는 삶: '해지'(이명우 작/연출) 단평

by 이종찬 posted Jun 20, 2017 Views 70 Lik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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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배우 출신 어느 노부부의 집. 아내가 남편에게 살가운 농을 던진다.

 

“내 목소리 들려? 방백이라 안 들리는 줄 알았지.”

 

“내가 보여? 지문이라 안 보이는 줄 알았지.”

 

여기엔 일종의 반전이 있다. 그러나 결코 강박으로서가 아닌, 서사의 착취로서가 아닌 반전. 아내는 실제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존재다. 왜? 그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오래전 아내를 떠나보냈다.

 

아내와 사별한 남편은 끊임없는 환청과 환시에 시달린다. 독거노인으로 쓸쓸히 사는 노인을 옆집에 사는 중년 여성이 살뜰히 챙기곤 하는데, 심지어 면전에서 여성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와중에도 그는 상대의 말과 행동을 잘 듣지 못하고 잘 보지 못한다. 집중하지 못한다. 사별한 아내는 그런 그를 위해, 그냥, 그 자신, 방백과 지문의 존재가 되어버린다.

 

‘다시 묻기’.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에두르기’. “밥을 못 먹은 게 아니라 배가 안 고파서 안 먹은 거요.”

 

그리고 ‘거리 두기’. “그렇게 일일이 나를 챙기지 않아도 돼요.”

 

다시 한번, 누군가의 방백과 지문이 되어버리는 삶.

 

지난 토요일 미아리고개예술극장. 관람 도중 극을 따라잡지 못하고 잠시 넋을 잃었던 것 같다.

 

연극 페스티벌 ‘화학작용’의 출품작인 이명우 작/연출의 <해지>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존재가 누군가에게 방백이 되고 지문이 되는 극이다.

 

* 지난주 토요일 도종환 문체부 장관이 깜짝 방문하여 <해지>를 보고 갔다고 들었다. 과연, 그는 출세작 <접시꽃 당신>에서 아내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목전에 두고 이런 문장을 쓴 적이 있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Who's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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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문화연구 집단 '문화사회연구소'에서 '문화연구자'로서보다는 '비판적 인문주의자'(critical humanist)로서의 정체성을 보다 강하게 자각하는 존재론적 긴장 혹은 모순에 빠져 있다. 아카데미즘적 글쓰기(논문)와 신변잡기식 수필, 그 중간 정도의 글쓰기 양식이라 할 '비평적 에세이'의 존재론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대학원 영문과에서 에드워드 사이드의 '휴머니즘' 개념을 방법론으로 삼아 한국계 미국인 작가들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민족(nation)으로서의 '코리안'에 대한 표상을 비교검토하는 학위논문을 (지지부진) 준비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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