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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빵!: '페미리볼버' 리뷰

by 이종찬 posted Jun 19, 2017 Views 400 Lik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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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같은 작품을 쓰지 말아 달라.”

 

페미리볼버 1.jpg

 

2016년 창작극 지원 사업 ‘작가의 방’ 프로그램에서 주최측인 국립극단이 참여 극작가들에게 주문한 내용이다. ‘권유’라 쓰고 ‘강제’라 읽는다. 실권자의 권유는 강제의 세련된 이름에 지나지 않는 법이다. 2013년 작 <개구리>는 박정희・박근혜 부녀를 풍자했다는 이유로 지난 박근혜 정부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태의 시발점이 된 작품이었다. 극작가 김슬기는 이 프로그램에 여성주의 극 <페미리볼버>를 출품했다가 최종 선정에서 탈락한다. 그런데 이 상황은 공분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차라리 실소를 유발한다. <페미리볼버>의 총구는 박정희・박근혜를 조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극은 “<개구리> 같은 작품”이 아니다. 그런데도 김슬기의 작품은 배제되었다. ‘페미리볼버 사태’는 원인과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인과 관계의 (희)비극이다.

 

비유컨대 박근혜 정부 문화(통제)정책의 기조는 ‘솔제니친적’이라기보다 ‘카프카적’이었다. 그 자신 피해 당사자이기도 했던 솔제니친의 인물들이 수용소로 끌려가는 이유는 명확했다. ‘겁도 없이’ 체제를 비판해서다. 그렇지만 카프카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체포되는 연유를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그들은 적어도 자신이 기억하는 한에서는 체제에 해가 되는 목소리를 낸 적도 없다. 그런데 도대체 왜? 공권력은 끝까지 그 이유에 대해 함구한다. 그리고 그것이 당사자를 거의 미치기 일보직전에까지 끌고 간다. 그들은 급기야 자기의 인생을 통째로 복기해내려는 노력에 매달린다. 이번 ‘페미리볼버 사태’에서 박근혜 정부는 정확히 이와 같은 의미에서 카프카적이었다.

 

페미리볼버 3.jpg

 

김슬기 작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야외 게릴라 공연의 형식으로 <페미리볼버>를 상연해 나가기로 결정한다. 그는 <페미리볼버>의 시놉시스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한국에선 김치녀 색출작전 명령이 떨어지고 ‘개념녀 만들기 세뇌 방송’이 매일 울려 퍼진다. 무수한 여자들이 김치녀로 낙인 찍혀 수용소에 끌려 들어온다. ‘여자들’은 목소리가 지워지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외친다. 그러나 기울어진 운동장의 우위에 선 ‘남성성’의 확성기 소리는 ‘여자들’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지운다. 여성 해방 단체 ‘김치녀 레볼루션’의 단원인 ‘작가 김슬기’는 숱한 여성들의 죽음 앞에 상복을 입고 페미니즘 연극을 만든다. 여러분이 보고 있는 이 공연은, ‘작가 김슬기’의 머릿속 악몽이다.”

 

<페미리볼버>의 등장인물들은 개별적 인격이 아니다. ‘남성성’과 ‘여자들’로 집합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남성성’(조훈희)은 확성기를 들고 끊임없이 주절거리고, 그것의 일방적 수신자인 ‘여자들’(권기하)은 말들의 홍수에 적나라하게 노출된다. 그런데 확성기에서 무차별적으로 배설되는 ‘남성성’의 말들은 끊임없는 ‘상투어’의 나열이다. 상투어. 진부하기 짝이 없는 말. 그것의 논리는 “여자들이 말이야!”로 일관되게 수렴된다. ‘여자들’은 부조리한 상황에 직면한 각자의 경험들을 속 깊숙이에서 피력하지만 ‘남성성’의 높은 데시벨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다. ‘남성성’의 말들이 상투어로 점철되어 있다면, ‘여자들’의 언어는 차라리 ‘목소리’에 가깝다. ‘목소리’는 수면 아래에 잠겨 있는, 말이 되지 못한 말이다. 제대로 분절되지 못한 말, 그래서 차라리 웅얼거림에 가까운 말. 반면 남성성의 ‘상투어’는 과잉이 되어 수면 위로 철철 흘러넘치고 있다.

 

우리는 <페미리볼버>를 ‘목소리 극’(voices of play)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혐오(misogyny) 시대를 살아가는 ‘남성성’의 상투어들과, 살아내는 ‘여자들’의 목소리, 양자를 취합한 결과물로서의 극. 다만 우리 시대의 그 어두운 말들을 수집하기 위해 ‘참여관찰’ 같은 거창한 인류학적 방법론까지 동원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미 우리 각자의 일상이, 주변이 ‘여혐’의 생활권이다.

 

그런데 여혐에 대한 반응으로 다음과 같이 발끈하는 남성들이 있다. “나를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하다니!”, “모든 남성들이 다 그런 건 아니야. 나는 그런 남자가 아니야.” 이와 같은 부류의 남성들이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일반화의 오류’를 거론한다. 여성주의 진영의 언어들이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싸잡아 설명하는 일반화의 오류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명예 남성’들은 결정적으로 나무와 숲을 구분하지 못하는 근시안이다. 페미니즘은 구조와 시스템 차원으로서의 여혐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들 남성은 ‘나는 그렇지 않다’는 좁은 프레임에 갇혀 허우적대고 있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혐’하는 남성이 아니다.”라는 말과 ‘기울어진 운동장으로서의 여혐 사회’는 얼마든지 양립 가능하다. 이들 남성들은 ‘범주의 오류’에 빠져 있다.

 

<페미리볼버>가 ‘남성성’과 ‘여자들’이라는 집합명(集合名)으로서의 캐릭터 전략을 택한 이유는 아마도 작가가 개인의 차원에 국한될 수 없는 집합적 목소리들을 강조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페미리볼버>는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문제를 표현하고 있는 ‘정치적’인 극이다. 다만 여기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널리 알려진 명제를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나’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너’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결코 ‘나’를 지우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에서 출발하여 ‘우리’의 차원으로 확장해나가야 한다는 말일 뿐이다.

 

페미리볼버 2.jpg

 

김슬기는 자신이 속한 페미니스트 공연팀 ‘젠더리볼버’(권기하, 조훈희, 김슬기 소속)를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재기발랄한 문장을 썼다. “페미니즘으로 빵 빵 빵 빵 빵 빵!” 이 유쾌하기 그지없는 구호는 <페미리볼버>의 주제의식과도 직접적으로 이어지는데, 이제 중요한 마지막 질문을 던질 시간이다. ‘작가 김슬기’의 손에 연발 권총(리볼버)이 쥐어진다. 그렇다. 마침내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빵빵빵’(페미리볼버) 할 시간이 왔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 그녀의 리볼버가 최종적으로 겨누고 있는 과녁은 어디인가? 우리는 그것이 수용소를 통치하고 있는 ‘남성성’이라고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극이 끝나고 난 뒤 우리는 우리가 틀렸음을 깨닫게 된다. 스포일러가 될 것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자세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페미리볼버’는 원한(르상티망)의 탄환을 품지 않는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혐오의 무한 연쇄로 환원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페미리볼버’는 쉬워 보이지만, 그 쉬움 때문에 종국에는 어느 쪽 할 것 없이 모두가 필패해버리고 마는 길을 가지 않는다. ‘페미리볼버’는 오히려 ‘젠더 전쟁’의 악무한(惡無限)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비장의 무기가 된다. <페미리볼버>는 ‘작가 김슬기’의 리볼버가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또한, 역시, 해방의 무기였음을 신선한 지적 쾌감을 빌어 우리에게 이해시키고 있다.

Who's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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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문화연구 집단 '문화사회연구소'에서 '문화연구자'로서보다는 '비판적 인문주의자'(critical humanist)로서의 정체성을 보다 강하게 자각하는 존재론적 긴장 혹은 모순에 빠져 있다. 아카데미즘적 글쓰기(논문)와 신변잡기식 수필, 그 중간 정도의 글쓰기 양식이라 할 '비평적 에세이'의 존재론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대학원 영문과에서 에드워드 사이드의 '휴머니즘' 개념을 방법론으로 삼아 한국계 미국인 작가들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민족(nation)으로서의 '코리안'에 대한 표상을 비교검토하는 학위논문을 (지지부진) 준비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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