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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문화사회연구소

산업/정책/운동

예술과 일상의 해후? ― 문화민주주의에서 사회적 예술까지

지난 토요일 맑스코뮤날레에서 발표했던 원고를 조금 더 손봐서 올린다. 아이디어 정리 차원의 진행 중 페이퍼이므로, 무단 인용을 금한다.
by 김성윤 posted May 15, 2017 Views 106 Lik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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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민중문화운동의 유산은 이렇다. 하나는 예술이 민중들의 삶과 연결된 것으로 제시됐다는 점, 다른 하나는 문화활동을 통해 어떤 식으로든 자기-전화의 계기가 있었고 적어도 그럴 의도를 갖고 있었다는 점에 있다. 문화예술이 감각을 다룬다는 점에서 기존의 감각을 낯설게 하고 나쁘지만 새로운 감각을 나누는 건 문예운동, 나아가 정치적 예술의 사명이었다.

물론 1990년대를 거치면서 이와 같은 전략은 굴절을 겪는다. 일부 민중문화는 상업문화 내로 진입했고, 이를 향유할 민중은 소비대중 속으로 사라졌다. 양면적인 의미를 지닌다. 예술이 다가가야 할 민중의 삶이 소비자본주의적으로 재편됐고, 반면 대중예술은 문화산업 논리에 따라 대중을 위안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예술과 문화 그리고 일상과 대중을 둘러싼 담론 지형은 빠르게 재편되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잔존해 있던 민중문화는 양식적 쇄신에 사실상 실패하면서 더 이상은 효력 있는 세계이미지와 세계관을 표현할 수 없었다.

만약 예술정치학이란 말이 가능하다면, 표적도 좌표도 없는 예술은 시대의 퇴행을 알리는 증거에 불과할 것이다. 그 이후 예술은 노동자·농민 대신 대중이라는 모호한 형상을 관객 삼았고, 소격효과 대신 임파워먼트, 물화 극복 대신 문화자본, 정치적인 것 대신 사회적인 것으로 좌표를 바꿨다. 예술-문화-일상-대중을 둘러싼 지적·정치적 기획의 전략과 목표가 전환된 것이다.

어떻게 바뀌고 또 어떤 효과로 이어지고 있는 걸까. 우리는 오늘날 우리의 삶이 1990년대의 정치적 실패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왜냐면 거의 모든 기원은 이때부터 심어졌기 때문이다.


문화의 시대, 대중의 시대

1990년대는 문화의 시대였다. 이것이 위기의 전조였음을 깨닫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흥청망청의 시대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샴페인 뚜껑을 너무 빨리 땄다고도 했다. 비도덕적 쾌락의 대가였을까. 문화가 때때로 사회적 금기를 건드리는 잠재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틀린 말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문화라는 출구가 없었으면 위기는 진작부터 찾아왔을지 모른다. 1980년대가 뜨거웠다면 1990년대는 시원했다. 아니, 그래야 했다. 한국자본주의는 소비주체를 필요로 했고 신세대든 X세대든 거기에 화답을 했으며, 그에 걸맞은 쿨한 자유주의적 태도가 당대의 청년들을 지배했다. 분명 어떤 토대 위에서 우리는 문화인이 되었다. 그럼으로써 그 토대는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애초에 문화가 인간의 사고와 표현의 정수를 의미했던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미학적 범주였다. 그런데 오늘날 문화라는 말에는 그보다 복잡한 것이 얽혔다. 대중문화는 문화가 아니란 말인가. 또 음주문화는 문화가 아니란 말인가. 1980년대 사회과학의 시대와 비교해서 1990년대를 문화의 시대였다고 회고하지만, 그것은 다른 어떤 분야에 비해 문화가 잘 나갔다는 뜻을 넘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문화의 시대에 벌어졌던 진짜 사건은 문화라는 말로 너무나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게 됐다는 데 있다.

나름의 의의가 있는 건 사실이다. 고귀했던 문화를 일상적 차원으로 재개념화한 것은 그 자체로 정치적 효과를 수반했다. 아직까지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를 양분하는 그런 몰상식한 사람은 더는 없을 것이다. 대신 문화는 헤게모니의 전장이 됐다. 윌리엄스의 전범을 따르자면, 지배적인 문화가 있으면 그에 도전하는 문화가 있고, 또 쇠락하는 문화가 있다. 그리고 노동자, 민중, 민족 등의 형상 대신에 ‘대중’이라는 형상이 문화의 주인공이 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 불충분하지만 그럼에도 언제든 쟁투에 나설 잠재력이 있는 형상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그동안 문화+예술을 둘러싼 가치 체계 자체도 전환되기에 이른다. 그 방향성은 크게 두세 가지다.

하나는 예술을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키치, 대중예술, 등등. 거기에 장르 확산을 빼먹을 수 없다. 그 전부터 연행으로 대변되는 민중문화운동이 있었지만, 1990년대의 장르 확산은 장르 다변화에 가까웠다. 문학뿐 아니라 무협지와 하이틴로맨스 그리고 팬픽 같은 것이 문화예술의 범주에 들어왔다. 시각영상 예술의 경계에는 TV드라마는 물론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자꾸만 침범해 들어왔다. 대중예술의 시대였다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공중에 떠 있던 예술은 지상으로 내려와 진짜 공중의 것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가운데 대중문화는 끌어올려졌다. 분명 천대 받던 것이었다. 직전만 해도 대중문화는 통치의 도구 였으며, 동시에 민중의 아편으로 취급 받았다. 그런가 하면 민족 전통문화의 혼을 갉아먹는 서구의 흉물이자 체신머리없는 딴따라 짓에 불과했다. 대중문화는 이데올로기의 다른 말이었으며, 또한 퇴폐향락의 대명사였다. 언제나 조절의 대상이었던 대중문화가 진중한 관심을 받게 된 건 주지의 사실처럼 서태지의 등장 때문이었다. 대중문화는 하나의 전장이 될 수 있었음을 가리켰다. (대중)문화를 통한 지배 외에도 오늘날 우리는 (대중)문화를 통한 저항을 상상할 수 있게 됐다. 기득권 세력에 대한 반항심, 성적 주체성에 대한 상상적 실험 등등.

이렇게 전통적 예술에 대한 대단위의 도전이 일어나는 동안, 문화라는 관념 자체도 지극히 일상적이고 사소한 경험적 맥락들로까지 확대된다. 상하의 위계를 무너뜨림으로써 이제는 문화 아닌 것이 없게 된다. 이것은 문화연구라는 학문 분야의 탄생과 더불어 정점에 이르렀다. 미학이 아니라 문화연구, 문학이 아니라 문화연구,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문화연구, 사회학이 아니라 문화연구였다. 비록 지금은 쇠락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이지만, 적어도 그 효과는 오래 지속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상을 매개로 한 문화와 예술의 조우는 한번 언명된 이상 좀처럼 되물릴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그렇게 해서 교양과 무질서, 문명과 야만, 예술과 문화산업 등등으로 이분화되었던 체계가 드디어 동등한 수준의 범주로 녹아들어갔다. 이것은 더 폭넓은 범주의 문화 개념으로 문화와 예술이 묶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전에도 문예라 일컬어지던 것이 있었지만, 문예의 문이 주로 문학을 의미하던 것으로 여전히 상위의 범주에서 상상되던 것이라면, 오늘날 문화예술이라는 표현은 생활양식으로서의 문화와 표현양식으로서의 예술이 동등한 지위에서 합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자, 이제부터 어떤 사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과학이 기능을 다루고, 철학이 개념을 다루고, 예술은 감각을 다룬다는 점을 상기하도록 하자. 즉, 예술과 일상의 해후는 우리를 둘러싼 감각의 지형이 재편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민주주의일까, 대중주의일까. 예술의 민주화일까, 문화의 전체화일까. 정치적 주체성을 고양하는 감각일까, 아니면 다른 그 어떤 주체성일까. 대체 문화의 시대 이래로 어떤 사건이 있어왔던 걸까.


문화적 권리를 위한 공적 개입(의 뒷문)

IMF 구제금융을 거치고 문화의 시대라는 거품조차 꺼질 무렵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자유주의 문화연구 진영에서 하자센터가 발족했고, 사회주의 문화연구에서는 문화연대가 만들어졌다. 물론 이런 구분은 실제적이라기보다는 편의적이다. 그렇지만 두 조직의 성격이 묘하게 달랐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하자센터가 수행적 과정을 통해 다른 주체를 만들고자 했다면, 문화연대는 상대적으로 인식적·감각적 운동을 통해 넓은 의미의 사회운동과 연계하는 문화적 실천에 강조점을 두었다. 어찌됐든 둘 모두 문화의 시대, 문화연구의 시대가 낳은 최종 결실이나 마찬가지였다. 1990년대가 문화이론과 문화연구를 통해 지적 작업에 몰두했던 시기라면, 2000년대는 그 방향이 문화기획과 문화정책으로 초점화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1]

이 둘 모두 이전 시기와는 질적으로 다른 문화운동이었다. 문예를 중심으로 하던 민중문화운동은 하자센터와 문화연대를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됐다. 우선 그 대상부터가 달랐다. 노동자-민중이 아니라 시민-대중이었다.[2] 둘 모두 정치적 시민 주체를 생산하는 데 있어 문화적 경험이 결정적이라는 데에 뜻을 같이 했다. 실제로 하자센터의 주축이었던 조한혜정은 문화연대의 공동 발기인 중 한 명이었고, 두 단체의 활동가들은 서로 활발히 교류하기도 했다. 예술중심적이던 문화를 일상으로 끄집어내려 한다는 점, 그럼으로써 문화를 정치의 선전도구로부터 구출해 그 자체로 해방적 경험의 토대로 만들어내려 한다는 점에서 둘의 전략적 목표는 같았다.

이즈음에야 문화적 권리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는 건 한국사회의 권리 담론구성체가 얼마나 후진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판단이 쉽지 않은 문제도 있다. 권리 담론이 제창되는 순간 운동은 제도나 정책에 말을 걸 수밖에 없으며 전능한(?) 국가가 무능(?)할수록 그런 요구를 하는 개인과 집단의 역할 비중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즉, IMF 이후의 문화운동은 예술에 대한 민주적 경험을 가능하게 한 대신, 또는 민주화된 예술의 경험을 가능하게 한 대신, 빠른 속도로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제도화의 길을 걷는다. 때마침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 시민사회의 전문적 역량을 필요로 했고, 때마침 문화연구는 실용화(하자센터)와 정책 개입(문화연대)의 전략을 모색 중이었다. 문화운동은 (문화연대를 주도했던) 강내희·심광현의 표현으로는 국가를 기능전환하고자 했던 것이었으며, 훗날 회고적으로 평가 받기로는 특수법인 형태 또는 연구용역 형태로 제도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새로운 운동의 등장으로 문화적 가치의 제고와 문화적 권리 실현이 이뤄졌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누구나가 보편적으로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현대 민주주의 질서에 문화적 가치와 권리의 언표를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각인시켜놓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관료행정과 경합하는 과정에서 또 때로는 그들 안에 들어감으로써 말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지점은 이들의 운동을 통해 문화민주화 또는 문화민주주의라는 가치가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적어도 두 가지 방향성을 내포한다. 하나는 (문화의 시대에 걸맞게) 예술을 끌어내려 일상의 차원으로 민간화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적 가치에 문화의 중요성을 기입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1990년대식 이론적 실천 또는 담론적 실천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효과를 창출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오늘날 (상당수 개별 예술가들에게는 여전히 낯선) 생활예술이니 일상창작이니 하는 말들을 접할 수 있는데, 이 같은 표현과 실천들은 2000년대 문화운동의 자장 속에서 나온 것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다. (여전히 지표화가 덜 되긴 했지만) 환경영향평가에 버금가는 문화영향평가 같은 제도 역시도 마찬가지다. 특별한 역사적 곡절을 겪지 않는 한, 문화적 권리의 수준은 높아지면 높아졌지 더 낮아질 가능성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고양되는 문화적 가치라는 것의 정치적 효과는 어떻게 가늠될 수 있을까. 시민들의 문화적 권리가 실현된다는 것과 그것의 효과라는 문제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더 많은 권리 실현이 정치적 주제임은 분명하지만, ‘그’ 문화적 권리라는 게 대체 무엇인지는 여전히 논쟁적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문화적 권리가 더 많은 소비문화의 향유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소비자주권운동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 문화적 권리가 문화산업의 정상화(투명성, 종다양성 등)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시장자유주의 운동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 문화적 권리가 문화적 자산의 공유재적 성격 강화를 의미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대중적 문화민족주의로 갈지, 부문화된 시민사회운동으로 갈지, 사회주의 이행 전략으로 갈지는 그 어떤 보증도 할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2000년대 이후 문화운동은 (특히 문화연대는) 이 모든 것을 포괄했었다는 사실에 있다. 일례로 심광현은 문화연구를 ‘진공청소기’에 빗댄 적도 있었는데, 그것은 그만큼 다루지 않는 영역이 없다는 일종의 이론적 자부심의 발로였을지 모른다. 하물며 이것이 실천 운동 속으로 구체화되었으니 그 효과는 실제로도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그와 관련한 효과 중 하나는 보는 사람마다 문화운동에 대한 평가가 제각각이게 된다는 점에 있다. 누군가에게 이들의 운동은 소비자운동으로 폄훼되었고, 누군가에게는 시장에 영합하 는 운동처럼 보였을 것이다. 또 누군가에는 도대체 어떤 식으로도 정체화할 수 없는 초인적인 운동처럼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여간해선 어떤 정치적 장소에도 빠지는 법이 드물었으니 말이다.

자연히 그 모든 성과에는 (단순히 국면적 특수성으로 핑계댈 수만은 없는) 일정한 오류가 포함되기도 했다. 국가의 기능전환이라든가 시장의 정상화 같은 전략적 목표는 지난 시기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인 동시에 또 다른 문제의 시작을 알린 것이기도 하다. 예술 표현과 문화기획 능력이라는 전문적 역량, 그리고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비전은 새로운 시대에 요구되는 질서와 불화를 일으키기보다는 선택적 친화성을 갖는 쪽에 가까웠다. 국가의 서비스화 추세 속에서 전문가들의 개입은 사회적 쓸모가 있었고, 마찬가지로 자기조정적 시장을 추구하는 쪽에서도 문화운동의 의제들은 경제외적 쓸모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운동이 체계에 개입할수록 행정적·재정적 지원 역시 불가피했다.

결국 문화운동을 통해 신장하고자 했던 문화적 권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돌아오게 된다. 물론 여기서 더할 나위 없는 문화적 임파워먼트의 기회와 권리가 향유된 점은 분명한 공적이다. 그리고 그것 자체가 운동의 의제 중 하나였다는 점에서 그들의 목표 역시 일부분 성취된 것이며, 앞으로도 추동력을 받아야 할 부분 중 하나이다. 그렇지만 문화적 권리가 신장되는 과정에서 그 뒷문으로 국가의 통치화 또는 사회화라는 과정 또한 수반된다는 점, 그리고 국가로부터 시장의 탈착근화(그렇지만 지연되는 시민사회로의 착근화) 역시 뒤따른다는 점에 대해서는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혹시라도 문화적 경험은 현대 자본주의 체계와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달리 말해 스타일적으로 찬란한 경험을 함으로써 다른 주체가 생산된다 할지라도 정치적 주체의 생산은 한없이 지연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해서 실현되는 문화적 권리 자체라는 것도 재고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예술을 다양한 방식으로 민간화했던 것이 문화적인 것과 민주주의적 것의 결합으로 얼마간 통용되긴 했지만, 이것이 문화 또는 예술을 통한 해방이라는 전망과 얼마나 부합하는 것인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이 부분에 대한 해명에 실패하는 한, 문화적 권리의 실현과 문화자본의 향유 사이에서는 이론적 구분 또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징후적 사건으로서 한예종 사태: 아방가르드 또는 착한 예술

시간을 훌쩍 넘어, 2009년 이른바 한예종 사태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문화와 예술 그리고 사회와 정치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한예종 사태는 이명박 정부와 노무현 정부, 그리고 유인촌·신재민·박종원과 심광현·이동연·진중권·황지우 사이의 싸움으로 기억된다. 2009년 한예종 사태는 단순히 정치적 싸움이었을까. 누군가는 내쫓으려 했고, 누군가는 맞섰다. 예술계의 암투가 있었다고도 한다. 신생 국공립 예술대학의 질주에 대한 기성 사립 예술대학들의 질투 같은 것. 그래서 중앙대 연극학과 교수 출신 유인촌 장관을 등에 업고 한예종을 망가뜨리려 했다는 것. 예술 분야를 국가가 장악하려 한다는 비판도 나왔다. 파시즘이 연상됐을 것이다. 우파 정권이 예술을 장악하려 했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비판들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부족하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DJ-노무현 정부 때 한예종의 예술교육 정책 패러다임은 정치적으로 순수하게 중립적이었다는 뜻일 텐데, 그건 당사자들 입장에서도 동의하기 어려운 판단일 것이다. 한 마디로 헤게모니 싸움이었다. 단순히 예술계의 정치적 알력 다툼의 차원이라는 건 절대 아니다. 사태의 표면은 누가 근무에 태만했는지, 공금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따위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 사태를 전후로 해서 예술 자체에도 어떤 사건이 기록된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당시 황지우 총장을 중심으로 한예종에서는 미디어 아트에 대한 관심이 집중적이었다. 학교 자체의 예술정책이었던 셈이다. 하이테크 미디어를 기반으로 해서 예술의 표현 방식을 극단점으로 몰고 가고자 했다. 또한 인터랙티브한 경험을 제공해서 관객·시청자·수용자의 미디어 리터러시를 끌어올리고자 했다. 영상 미학을 중심으로 예술의 다양한 표현 양식이 컨버전스되는 실험실이기도 했다. 여태껏 느껴보지 못했던 것이 튀어나왔고 여태껏 느껴왔던 것들이 동시에 낯설어졌다. 어쩌면 그것은 아방가르드 예술의 마지막 실험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일련의 사태가 벌어졌다. 한예종의 예술 정책도 선회했다. 박종원 총장 체제에서 미디어 아트에 대한 투자는 멈췄다. 그렇지만 예술의 전략화 자체가 중지된 것은 아니었다. 대신 찾아가는 예술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문화적 경험이 어려운 이른바 소외 계층, 취약 계층을 찾아가 음악을 연주하는 것. 혹은 그들과 함께 오케스트라를 연주하고 합창하는 것. 실험적 예술에서 착한 예술로 전환된 것이었다. 예술을 몰랐던 이들에게 예술을 안내하고, 예술의 수용과 활동이라는 미적 경험을 통해 존재론적 감각을 고양시키고자 했다 ― 물론 좋게 본다면. 상층계급 또는 중간계급의 전유물이나 마찬가지였던 예술과 문화자본은 이제 더 이상 그들만의 전유물이 아닐 수도 있게 됐다. 시간이 더 흐른다면 시민 모두가 평등한 문화자본을 보유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것은 저들이 의도치 않았던 예술 민주화의 효과를 (제한적이나마) 동반했다.

자, 이제 판단을 내려보자. 이 두 정책 중 어느 것이 옳은 걸까. 미디어 아트를 중심으로 하는 실험적 예술정책의 길이 옳다고 보는가. 하지만 그건 너무 엘리트 중심적인 발상 아닐까. 대중들이 이해할 수 없는 예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그리고 인터랙티브 경험을 하더라도 미디어 리터러시가 있는 중상계층 이상의 전유물에 불과한 게 아닐까. 좋다. 이 길이 아니라면 문화자본의 분배를 강조하는 착한 예술 정책의 길이 옳다고 보는가. 하지만 그건 너무 시혜적이고 고리타분한 발상일 수도 있다. 예술이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그런 건 차라리 이데올로기라고 불러야 하는 게 아 닐까. 사람들을 현재에 자족하게 만드는 관념적 안녕만 제공하므로. 점점 더 헷갈릴 수밖에 없다. 좌파는 엘리트주의적이고 우파는 대중추수주의적이다.

그런 맥락에서 한예종 사태는 예술의 범주화에 따르는 두 가지 극단점을 동시에 도열시켰던 사건인 셈이다. 어쩌면 이것은 문화와 예술 그리고 공공성을 둘러싼 개념들이 한데 뒤섞인 난장판을 연상케 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둘 다 공공이든 공유든 공적인 것을 핵심적 가치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예술이 어떠해야 공적인 가치를 제대로 실현할 수 있는지에 관한 명확한 입장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어떤 패러다임이 더 공적 가치에 부합한다고 보는가. 착한 예술이야말로 더 공적이지 않은가. 아니면, 아방가르드 예술이야말로 사적인 것에 더 반하지 않은가.

자유주의적인 공공성 통념에 입각한다면, 박종원 체제의 예술 정책에 손을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과 예술을 향유하는 것이야말로 공적이지 않은가. 물론 한국사회에서 가장 비즈니스 프랜들리했던 시기에 이런 공적 예술이 등장했던 건 여전한 궁금증으로 남을 테지만. 어쨌든 이런 시각에서 황지우 체제의 예술 정책은 공적 자원을 가지고 자기들 하고 싶은 실험을 사사화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반면, 다른 공공성 관념에 입각한다면, 황지우 체제에 손을 들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공적인 것이란 이성을 가지고 주어진 동일성으로부터 용기 있게 이탈하는 것이라는 칸트식 용법을 택한다면 말이다. 그런 점에서 착한 예술은 나와 세계, 나와 타인, 나와 나 자신의 관계,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앙상블을 재생산하려는 술수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사회적 예술이라는 절충

오늘날 예술가들에게 떠도는 유령은 분명 사회주의에 준하는 그 무엇일 것이다. 대중예술의 시대를 거쳐 공공예술의 시대를 경유했고, 지금의 예술은 무척이나 사회적이다. 누군가는 관계 미학을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생활 예술을 이야기한다. 심지어 예술로 치료도 한다. 그렇다. 효능이야 어떻든 예술은 우리들의 삶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어오는 친숙한 그 무엇이 된다. 관계 자체가 예술의 대상이자 예술적 표현이 되고 있다.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사회의 위기를 떠들어대는 마당에 예술이 사회적 관계의 회복을 논한다는 건 꽤나 의미 있는 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적잖은 작가들이 그런 점에 문제의식을 갖고 잃어버린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해 진력을 다하는 모습은 어느새 낯설지 않은 일이 됐다.

어쩌면 이것은 한예종 사태를 통해 제기될 수 있었던 질문이 불과 10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재빠르게 봉합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지 않나 싶다. 앞서나갈 것이냐 내려갈 것이냐는 전통적 질문이 되돌아온 상황에서 오늘날 예술계에서 부상하는 담론은 함께 나가자는 쪽을 택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함께하는 것이 앞으로 나가는 길이라는 주술적 논리가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예술과 문화가 해후하고 있다면 뜻밖에도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 지금까지 오는 동안, 문화는 예술로부터 떨어져 나왔고 예술은 일상으로 끌어져 내렸으며 모종의 한계상황에서 하나의 해답이 내려진 것만 같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격세지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술의 본령이 금기에 도전하고 금기를 넘어서는 것이라 한다면, 그 금기란 지극히 사회적인 것일 터이다. 사회적인 것이란 일종의 선긋기와도 같은 것인 이상, 예술은 언제나 그 구획에 답답함을 호소하고 질문을 던져왔다. 물신과 주술의 허구성을 폭로하면서. 신자유주의 때문일 수도 있고 지구적 금융 위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개인들이 고립되고 관계가 전만 못하다는 불만이 일종의 정치적 성격을 획득하고 있는 요즘이다. 그렇지만 사회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처럼 둔갑하고, 사회적인 예술이 우리 시대의 비판적이고 정치적인 예술로 등치된다는 점은 자못 불편할 일이기도 하다. 관계를 회복하고 공감능력을 갖추는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만들어지는 대화와 집합적 의례들이 예술 양식의 일부가 된다.

그런 점에서 사회적인 것과 예술의 결합은 또 하나의 형용모순처럼 들린다. 어쩌면 이제까지의 역사적 경로를 통해 보자면, 실험적 예술과 착한 예술 사이의 극적인 절충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술과 일상이 해후하는 가장 최신 버전인 셈이다. 그 때문일까. 곳곳에서 이상한 징후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언제부턴가 예술도 노동이라는 언사가 뒤따르고, 예술가에게는 퍼실리테이터 또는 문화매개자라는 꼬리표가 달라 붙었으며, 한쪽에서 파견 미술이 운위되는 동안 다른 한쪽에선 예술가들이 공공·준공공기관에 파견 나가기도 한다. 이것은 예술 자체에 근본적으로 구조 변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리는 걸까. 아니면 예술이 사회 내로 착근됐을 때 나타나는 이상 현상 같은 것일까. 때로는 시민사회적인 어떤 것이 물상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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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구와 문화운동의 정치적 구호가 의도치 않게 현대자본주의의 지지대 구실을 해왔다는 비난을 모면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2009년 한예종 사태는 어떤 변곡점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1990년대 이래로 재조정되기 시작한 문화와 예술에 관한 통념이, 달리 말해 우리의 감각을 일깨우고 세계를 낯설게 만드는 운동이 어떤 한계 상황에 봉착했음을 알려주는 일종의 위기 신호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술의 정치적 성격이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정치가 사라진 시대에 예술은 사회적인 것으로부터 정치의 감각을 구제해낼 수 있을까.

Notes

  1. 다른 한편, 이후의 문화연구는 대학원 과정을 통해 지적 체계를 제도화하는 길을 가기도 했다.
  2. 지금은 떼어냈지만 문화연대의 애초 이름은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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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및 운영위원입니다. 주전공은 사회학을 하고 있고 최근에는 플랫폼 자본주의, 도시재생과 민주주의 등의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시간이 나는대로 연구소 홈페이지에 들러서 이용자 여러분들과 교감하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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