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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문화사회연구소

에세이

공백의 사유와 촛불

"믿음은 무엇이 진실인지 알고 싶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실에게 있어 더 위험천만한 적은 거짓이 아니라 바로 확신이다.“
-니체-
by 김주환 posted Jan 02, 2017 Views 276 Lik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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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공화국이란 인지 및 믿음 체계의 파열

 

카프카의 소설 <심판>에서 요제프 K는 영문도 모른 채 엄숙한 재판정에 끌려와 심판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정의의 수호자로서 존경받아 마땅한 권위 있는 재판관 앞에 놓인 두꺼운 법전은 알고 보니 여성의 나체가 그려진 포르노그래피 잡지였다. 부조리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러한 일이 현재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한동안 당연시 여겨졌던 우리의 상식적 인지체계에 커다란 구멍이 나는 경험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헌법 1조와 2조가 밝히고 있듯 우리는 우리사회가 “민주공화국”이며, 그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믿고 있었다. 우리는 대통령이 “국민 앞에” 취임 선서에서 “엄숙히” 약속하듯 대통령은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 대통령으로서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는 국민의지의 대행자라고 생각했다. 최소한 대한민국처럼 어느정도 민주주의가 진전된 나라라면 대통령은 자의든 타의든 그와 같은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하는 의식이 있는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최근 벌어지고 있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스캔들은 그와 같은 우리의 인지 및 믿음체계를 산산이 깨뜨렸고, 그 배후에 있는 대한민국의 운영방식의 벌거벗은 실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어쩌면 더 나아가 그것은 근본적으로 민주주의는 국민주권의 원리와 지배의 원리를 일치시킬 수 있는 시스템이라는 명제의 허구성을, 민주주의의 불가능성을 드러냈다.

 

desert.GIF

 

 

실재라는 사막: 과학적 인식과 이데올로기적 인식, 사회의 재조직

 

 

우리가 유지해왔던 기존의 인지 및 믿음의 질서잡히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체계가 구멍이 나면, 그 인지 및 믿음의 체계가 은폐하고 있던 전의미 차원의 적대적이고 야수적이며 때로는 비루하고 추악하기도 한 실재의 참 모습이 드러난다. 영화 <메트릭스>에서 모피어스는 네오를, 그리고 어쩌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사막처럼 황량한 실재의 세계로 초대한다.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

 

 

우리는 기꺼이 이 환대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환대에 응하는 것이 바로 실재의 참모습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환대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무의미의 사막을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과 나무, 사금파리처럼 햇빛에 난반사되는 강의 잔물결과 푸르른 생명력으로 가득한 주관적 허구의 상상으로 채우는 것, 이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적 인식이다. 이데올로기는 실재의 참 모습을 대면하는 것이 끔찍하여 그것을 성급히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상상으로 매움으로써 상상의 허구적 질서와 조화를 도입한다. 예를 들어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적대라는 실재를 마주하기를 회피하고 적대의 자리를 국민, 통합, 연대 등의 언어로 대체하는 것, 이건희와 전태일 사이의 적대적 차이를 모른 채 하고 그 둘 모두를 법 앞에 평등한 대한민국 동일한 국민이라는 말로 우겨넣는 것이 이데올로기다. 우리의 인지 및 믿음체계에 난 구멍을 통해 드러나는 실재와 대면하기를 회피하고, 그 구멍을 상상으로 매우기 때문에 이데올로기는 공백이 없다. 공백이 없기 때문에 이데올로기는 천재적 사기꾼들이 그러하듯이 모든 것을 모순이 없는 것처럼 일목요연하게 설명한다. 예를 들어, “아틀라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다”라는 명제에서 이데올로기적 인식은 아틀라스가 어디에 발 딛고 있을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기 때문에, 그 명제를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atlas.GIF

 

반면 과학적 인식은 바로 그 구멍, 공백에 천착하여 자명성을 의문에 붙임으로써 가능해진다. 그 구멍을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상상으로 성급히 메우려는 것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끈질기고 치밀한 연구와 분석을 통해 과학적 개념을 생산하는, 이른바 과학적 노동을 통해 그 구멍에, 실재에 과학적 언어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과학적 인식의 과정이다. 그래서 맑스도 과학에 왕도는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때문에 과학은 공백을 자신의 대상으로 가지며, 공백은 과학적 인식이 작동하도록 하는 원인이 된다. 그 말은 곧 과학은 언제나 완벽한 인식을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공백이 사라지는 순간 그것은 과학이 자신의 대상을 상실한 것이므로 그것은 곧 과학적 인식의 죽음이고, 과학적 인식이 모든 것을 일목요연하게(정확히는 일목요연한 것처럼) 설명하는 이데올로기적 인식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과학적 인식은 섣불리 주관적 상상으로 그 공백을 메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질서와 조화의 언어를 도입하기를 꺼린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적 상징질서 속에서나 실재가 질서잡히고 조화로운 것으로 표상되지, 실재 그 자체는 결코 질서 잡힌 것도 조화로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때문에 과학적 인식은 보통 이른바 여론이라는 것과 대립된다. 맑스가 말하듯이 과학적 인식은 여론이라는 것과 거의 타협의 여지가 없다.

 

우리의 익숙한 인지와 믿음의 체계에 파열의 구멍을 내는 공백의 경험, 실재를 대면할 수 있는 경험은 비단 인식론적 차원에서 이데올로기의 인식에서 진정한 과학적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실천적으로는 우리의 사회적 삶의 질서를 새롭게 재편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는 단지 진정한 과학적 인식의 확보를 통해서 새로운 사회조직화의 비전이 그려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인식론적 차원에 앞서 사회를 재조직하라는 실재의 운동이 기존의 체계를 파열시키고 공백을 만들어내는 바로 그 힘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부르주아적 자유, 평등, 박애의 허구성에 파열을 낸 1848년의 프롤레타리아의 봉기가 그러했으며, 한국 발전국가의 신화, 대한민국 국민은 하나라는 신화를 깨뜨린 전태일의 분신이 그러했다.

 

 

박근혜 퇴진 광화문 촛불대중

 

그렇다면 기존의 익숙했던 인지와 믿음의 체계가 파열되어 공백이 생기고 그 공백을 통해 실재를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때 우리는 두 가지를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기도 하다. 하나는 사회의 재조직화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인지와 믿음의 상징체계를 대체할 수 있는 과학적 인식을 획득하는 것이다.

 

우선 실재는 기존의 인지 및 믿음의 체계를 찢고 파열을 내는 파괴적 힘인 동시에 그것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는 구성적 힘이다. 박근혜 국정농단 스캔들로 표현되는 이 비루하고 반민주적인 실재의 힘은 분명히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부족하지만 민주주의 시스템으로 움직일 것이고, 대통령은 헌법과 국민의 생존과 권익의 수호자일 것이라는 우리의 기존의 인지 및 믿음 체계를 파열시켰고 새로운 사회 구성의 계기로 작동하고 있는 것임은 분명한 듯하다. 물론 그것은 실재의 또 다른 축인 국민주권적 봉기의 힘의 직용에 의해 추동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관건이 되는 광화문에 모인 국민주권적 봉기라는 실재의 힘이 새로운 사회의 구성적 힘이 되기 위해서는 그 전에 충분히 기존 사회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 파괴적이고 위험한 힘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광화문에 모인 국민주권적 봉기의 실재는 충분히 파괴적이고 위험한가? 몇 가지를 집어보자.

 

첫째, 국민주권적 봉기의 힘은 상징적 의미 이전의 실재로서 무엇이 법이고, 평화이며, 질서인지를 정의함으로써 새로운 상징질서와 의미체계를 구성하고 설립하는 힘이다. 따라서 그것은 기존의 상징체계의 언어인 합법/불법 또는 평화집회/폭력집회의 프레임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합법이냐 불법이냐, 평화냐 폭력이냐의 대당을 넘어 그것은 '초법'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어야 했고, 그것은 법, 평화, 질서의 틀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했다. 달리 말해, 광화문에 모인 국민주권적 봉기의 힘은 법, 평화, 질서의 이름을 통해서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국민주권이라는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실천의 정당성을 정립할 수 있어야 했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법, 평화, 질서의 내용을 구성해낼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광화문에 모인 국민주권적 힘은 기존 합법, 평화, 질서의 프레임에 갇힌 채 스스로의 운신의 폭을 좁혔고, 매우 유순하게 잘 길들여진 봉기(이것도 봉기라고 할 수 있다면), 야수성을 잃은 이빨빠진 사자, 철창살에 갇힌 맹수, 그래서 전혀 두렵지 않은 기이한 모습으로 전개되어 왔다. 

 

둘째, 명백한 국가폭력의 희생양이 된 한상균 민주노총위원장의 석방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광화문의 대중은 자신들의 순수한 민주적 요구에 정치적 색깔을 입히지 말라며 그 요구를 거부했다. 한상균 위원장의 구속과 그를 비롯한 민주노총에 대한 국가폭력의 문제가 촛불 대중들을 광화문으로 불러낸 대한민국의 부정의한 시스템이 무관한가? 촛불 대중들의 봉기는 정치적인 것이 아닌가? 순수한 봉기, 순수한 민주적 요구? 정치적인 것과 무관한 그런 것이 존재하는가? 도대체 촛불 대중이 겨냥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겨냥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비정치의 어떤 순수한 것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가? 

 

셋째, 광화문은 공론장이나 광장이라기보다는 거대한 극장에 가깝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효순이 미선이 촛불시위 때나 광우병 촛불시위 때는 이른바 지도부의 지도에 따라 움직이거나 중앙 무대의 연사들의 연설이 중심이지 않았다. 심지어 효순이 미선이 촛불시위에서는 '깃발 내려!'라는 구호가 나왔었고, 중앙 무대 연단을 치우라는 요구도 나왔었다. 당시 여러 소규모 집단들은 서툴지만 나름대로 작은 발언대를 만들고 누구든 나와 발언하는 식의 아고라가 만들어졌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때문에 당시에는 ‘아고라의 부활’ 같은 표현들이 당시의 시위 문화를 특징짓는 상투적 표현으로 언급되곤 했는데, 이번에는 그와 같은 표현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촛불 군중들은 광화문에 나와 토론하고 발언하는 공중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중앙 무대의 커다란 스크린의 스펙터클을 바라보고 공연을 즐기고 소비하는 관객으로 존재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넷째, 마치 어떤 잘 만들어진 한국 영화가 이번에 1000만 관객을 넘을지가 초미의 관심이 되듯, 어느 순간 이번 집회에 100만이 모일지, 120만이 모일지, 150만이 모일지, 총합 1000만을 돌파할지 말지 하는 집회 참여 인원수 자체가 집회의 내용보다 중요한 쟁점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96년 12월 26일 새벽 김영삼 정권 신한국당의 이른바 ‘노동법 날치기’ 파동으로 한 달 여 간 진행된 총파업 때, 내 경험과 기억에 따르면, 서울 중앙에 모인 시위대의 숫자는 가장 많을 때라도 집회측 추산 10만을 결코 넘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위의 영향력은 엄청났고, 급기야 김영삼정권을 식물정권으로 만들어버렸다. 지금은 그때의 10배, 20배 이상이 모이는 집회인데 무엇을 바꾸고 있는가? 몇 백만이 모이는 집회에서 한명도 연행된 시민이 없다는 점, 폭력이 없고, 집회 후 쓰레기 없다는 것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게 자랑할만한 대단한 일인가? 지나친 호들갑은 아닌가? 도대체 무슨 실질적 변화를 만들었는가?

 

이상의 거친 인상들을 종합할 때 나의 관점에서 지금의 광화문 촛불 집회는 새로운 사회의 재구성을 위한 충분한 상상력이 발휘되고 다양한 의견들이 토론되고 유통되는 내용적 성취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질서잡히고 스스로 잘 관리되는 아름다운 스펙터클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회의를 떨칠 수 없다. 그것은 기존의 인지와 믿음의 상징체계를 깨뜨리기보다는 그 체계의 프레임에 종속되어 스스로를 통제, 관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그것은 기존의 상징체계를 깨뜨리더라도 어디까지나 형식적 민주주의 일반의 불가능성을 노출시키는데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현정권의 상징체계만을 깨뜨리는 정도에서 그치고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논자들은 촛불에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성급히 긍정성을 부여한다. ‘성숙한 시민의식’, ‘질서’, ‘평화’, ‘비폭력’, '집단지성' 등등. 이 용어들은 바로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언어들이다. 나는 여전히 이러한 표현들이 촛불의 실제 모습에 대해 대면하는 것을 회피하고 그것을 주관적 상상적 기대로 섣불리 대체하는 이데올로기의 한 양상이라고 본다. 밤에 몇 백 만이 모여 촛불을 드는 엄청난 규모의 아름다운 스펙터클 속에서, 좀처럼 촛불의 상상력이 박근혜와 최순실의 독특한 관계, 평범하지 않은 가족배경과 성장과정으로 인한 박근혜의 평범하지 않은 정신상태 따위의 지엽말단적인 정치 드라마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아직 촛불이 이데올로기적 인식과 단절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음을, 아직 과학적 인식의 시간이 도래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알고보니 박근혜가 최순실의 꼭두각시였다는 막장드라마를 넘어 최순실을 내세워 박근혜를 조종한 것이 삼성 같은 재벌이었다는 인식, 국민을 개 돼지로 알고, 국민 생명을 우습게 여기며, 공과 사를 구분하는 능력의 부재 같은 것들이 사실 박근혜정권에서만 나타나는 비정상적 현상이 아니라 최소한 수십년 동안 기득권을 누려온 한국 보수세력들의 문화 속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사고 구조라는 인식, 이 국정농단의 사태가 박근혜 개인의 가족사나 성장배경에서 연유한 심리구조의 문제라기보다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구조적 문제라는 인식에까지, 그리고 더 많은 근본적인 문제제기에 대한 인식들로까지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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