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사단법인 문화사회연구소

에세이

사과의 기술

by 이종찬 posted Oct 22, 2016 Views 161 Likes 0 Replies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Extra Form

박범신 사태.jpg

 

 

‘공감의 과잉 시대’ 운운하지만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그동안 살면서 직간접적으로 겪었던 사과의 장면들을 복기해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미안함의 표현에 미숙한 이들 혹은 미안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떠밀려 미안하다 말하는 이들의 수가 적지 않아 보이는 것이다. 말의 가장 바른 의미에서 '공감'(empathy)한다면 제대로,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기는 힘들지 않을까. ‘공감’이라는 말이 추상적으로 다가온다면 ‘타자(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이라 바꿔 표현해도 좋겠다.

 

잘못된, 따라서 하지 않으니만 못한 다음과 같은 사과의 장면들이 있을 것이다.

 

첫째, 사죄의 마음을 기어이 ‘유감’으로 표현하려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성실한 영어 학습자들이다. 영어 단어 ‘sorry’를 가지고 그들은 ‘미안하다’인지 ‘유감이다’인지를 섬세하게 준별한다. 그래서 종국에 가서는 '미안합니다'가 아니라 ‘정말 유감입니다.’를 선택한다. 그 빤히 보이는 욕망이 역겹고 추하다.

 

첫 번째의 경우가 주로 권력자들 혹은 여의도의 어떤 위정자들에게서 나타난다면 두 번째의 용례는 보다 대중적인 것이다.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지라 적잖은 피곤함을 유발한다. 그들은 자꾸 토를 단다. ‘내 본의는 그것이 아니었지만’ ‘그럴 의도가 없었지만’ ‘불쾌감을 주었다면’ 등등의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조건부(!) 사과를 하겠다는 것이다. 이게 사과인가. 고작해야 외부의 상황적 요인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사과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음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거나 또는 ‘피곤하니 이제 그만’ 식의 고압적인 태도에 다름 아니다. 차라리 그냥 ‘미안하다’ 한마디면 족하지 않을까.

 

이와 관련해서 한가지 조심스레 논해보고픈 상황이 있다. 사과는 고사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억울해서가 아니다. 당당해서도 아니다. 너무 미안해서다. '너무' 미안하면, 너무 미안해서 미안하다는 말조차 차마 입밖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게 옳지는 않겠지만, 내 경우엔 그런 적이 있다.

 

세 번째 사과의 사례는 불행히도 지금 우리 시대가 낳은 버전이다. 바로 ‘유체 이탈’. 사과를 해야 할 주체가 우주의 기운을 모아 유체를 이탈한 뒤 사과는커녕 ‘평가의 주체’로 거듭난다. 나아가 평가의 ‘가이드라인’을 은연중에 그렇지만 실은 노골적으로 흘려댄다. 그러므로 비록 요식적이나마 사과를 해야 할 상황에 놓이지도 않게 되는 기적의 논리가 도출된다.

 

은교를 사랑한 작가의 사과는 다소 진일보했다. 그는 다음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내 다정함의 표현이었지만 그것이 누군가에게 불쾌함이 되었다면”, “누군가 나로 인해 상처 받았다면”. 여기까지는 앞서 분류한 두 번째의 상황에 해당된다. 흥미로운 건 그 다음이다. 이후의 서술이 ‘창의적’이다. “그것은 내 불찰이며 자책하고 있다”. 추행 당한 당사자는 온데간데없다. 정말 미안했다면 피해 당사자에게 먼저 사과하고, 그러고 나서 자책했어야 하지 않을까. 사과의 문법은 3형식이다. ‘누가’ ‘누구에게’의 두 요소가 필히 존재하여야만 최소한의 문장으로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어는 있는데 목적어는 찾아볼 수 없는 형국. 이토록 섬세한 자기(에의) 배려.

 

최근 어느 티비 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을 ‘늙어서도 언제까지나 섹시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라고 밝힌 작가께 ‘섹시하다’라는 말의 수행적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찬찬히 생각해보실 것을 감히 권해드린다. 윤리적 판단의 영역(‘착하다’)마저 미적 판단(‘아름답다’)의 범주 안에 잠식당해버린 시대에 ‘섹시하다’라는 표현은 일단 그 자체로 상대방에게 세련된 칭찬으로 치장한 아주 고도의 여성혐오적 발언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냥 아주 간단히 말해도, ‘섹시함’은 ‘추행’의 과정과 좀 많이 다르다는 것을.

Who's 이종찬

profile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문화연구 집단 '문화사회연구소'에서 '문화연구자'로서보다는 '비판적 인문주의자'(critical humanist)로서의 정체성을 보다 강하게 자각하는 존재론적 긴장 혹은 모순에 빠져 있다. 아카데미즘적 글쓰기(논문)와 신변잡기식 수필, 그 중간 정도의 글쓰기 양식이라 할 '비평적 에세이'의 존재론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대학원 영문과에서 에드워드 사이드의 '휴머니즘' 개념을 방법론으로 삼아 한국계 미국인 작가들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민족(nation)으로서의 '코리안'에 대한 표상을 비교검토하는 학위논문을 (지지부진) 준비중에 있다.
Atachment
첨부파일

팀 블로그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들의 연합 블로그입니다

  1. 정치사회
    profile

    박근혜 이후의 민주주의

    1. 지금 우리에게 당면한 선택지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하야, 탄핵, 그리고 거국내각.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박근혜 이후를 어떻게 구상할 것인가. 정상과 비정상의 싸움 이후는 어떻게 될까. 염치...
    Date2016.11.13 Category정치사회 By김성윤 Reply6
    "어 ㅅㅂ 뽑아야겠다." 이런 류의 댓글이 인터넷 서브컬처 문화에서의 소위 '드립' 차원에 국한되는 것일까, 아니면 실제 실행 단계로까지 나아가는 힘이 있을까. 그런 질문이 갑자기 떠오르네요. 현재로서는 가설적 ...
    Read More
  2. 정치사회
    profile

    '대국민 사과'라는 쇼의 역설

    2016년 11월 4일 오전 10시 27분, 실로 오랜만에 생방 사수를 위해 TV 앞에 앉았다. 일방향적인 TV 매체에 대해서 더 이상 호감을 갖지 않는 터라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실낱같은 기대를 가진 건 쇼가 시...
    Date2016.11.06 Category정치사회 By몰코
    Read More
  3. 대중문화
    profile

    이자혜 사건이 보여준 웹툰 장의 결함

    웹툰 장의 시끄러움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지나간 어떤 일에 대한 것이다. 한 웹툰 작가가 미성년 성폭행을 조장 및 방임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후에 그 작가에 대한 작품이 연재중인 사이트에서 ...
    Date2016.10.31 Category대중문화 By박범기 Reply3
    그렇다면 대중이 이용자가 아니라 독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인가요? 저자의 죽음이 '고전적 의미에서' 미학적 기준을 하향평준화시켰을지언정 그 변화로 인해 새로운 기회가 개방되었던 측면은 반복적으로 제기됐...
    언뜻 창작자의 인성을 거르는 시스템이 뒷받침되는 장이 있는지 떠올려봅니다. 최근 문학계와 예술계에서 이슈화되고 있는 다양한 일들이 그러한 시스템의 결과는 아닐 것 같습니다. 오히려 언급한 이용자의 특성이 ...
    20
    2016년에서 읽었더라도, 지금처럼 2018년에 읽어도 이 글은 수정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필자님은 웹툰장에서 반복적으로 문제가 생겨 시끄러운 것이, 전문가의 무관심(미확인)으로 인해 작가가 걸러지지 않아...
    Read More
  4. 대중문화
    profile

    유행 타는 문학, 새로운 문예지의 탄생

    작년 이맘때, 40년 가까이 이어오던 문예지의 구독자의 수가 채 백 명을 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적 있다. 출판 편집일을 하는 지인을 통해 들은 말이었다. 그 해 겨울, 그 문예지는 폐간 되었다. 당연한 귀결이었...
    Date2016.10.23 Category대중문화 By박범기
    Read More
  5. 에세이
    profile

    회의가 불러온 비관에 대처하기

    최근 운동 혹은 비판이 위기에 처한 것은 아닌가라는 주제에 대해 종종 대화를 하게 된다. ‘비판을 하다’라는 행위 자체에 대한 대중의 외면이, ‘운동의 가치’에 대한 대중의 비동의가, 운동...
    Date2016.10.23 Category에세이 By
    Read More
  6. 에세이
    profile

    사과의 기술

    ‘공감의 과잉 시대’ 운운하지만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그동안 살면서 직간접적으로 겪었던 사과의 장면들을 복기해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미안함의 표현에 미숙한 이들 혹은 미안하지 않지만 어쩔 수...
    Date2016.10.22 Category에세이 By이종찬
    Read More
Prev 1 2 3 4 5 6 7 8 9 10 ... 55 Next
/ 55

Recent Comment

Powered by Xpress Engine / Designed by Sketchbook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