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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의 기술

by 이종찬 posted Oct 22, 2016 Views 169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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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 사태.jpg

 

 

‘공감의 과잉 시대’ 운운하지만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그동안 살면서 직간접적으로 겪었던 사과의 장면들을 복기해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미안함의 표현에 미숙한 이들 혹은 미안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떠밀려 미안하다 말하는 이들의 수가 적지 않아 보이는 것이다. 말의 가장 바른 의미에서 '공감'(empathy)한다면 제대로,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기는 힘들지 않을까. ‘공감’이라는 말이 추상적으로 다가온다면 ‘타자(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이라 바꿔 표현해도 좋겠다.

 

잘못된, 따라서 하지 않으니만 못한 다음과 같은 사과의 장면들이 있을 것이다.

 

첫째, 사죄의 마음을 기어이 ‘유감’으로 표현하려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성실한 영어 학습자들이다. 영어 단어 ‘sorry’를 가지고 그들은 ‘미안하다’인지 ‘유감이다’인지를 섬세하게 준별한다. 그래서 종국에 가서는 '미안합니다'가 아니라 ‘정말 유감입니다.’를 선택한다. 그 빤히 보이는 욕망이 역겹고 추하다.

 

첫 번째의 경우가 주로 권력자들 혹은 여의도의 어떤 위정자들에게서 나타난다면 두 번째의 용례는 보다 대중적인 것이다.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지라 적잖은 피곤함을 유발한다. 그들은 자꾸 토를 단다. ‘내 본의는 그것이 아니었지만’ ‘그럴 의도가 없었지만’ ‘불쾌감을 주었다면’ 등등의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조건부(!) 사과를 하겠다는 것이다. 이게 사과인가. 고작해야 외부의 상황적 요인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사과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음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거나 또는 ‘피곤하니 이제 그만’ 식의 고압적인 태도에 다름 아니다. 차라리 그냥 ‘미안하다’ 한마디면 족하지 않을까.

 

이와 관련해서 한가지 조심스레 논해보고픈 상황이 있다. 사과는 고사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억울해서가 아니다. 당당해서도 아니다. 너무 미안해서다. '너무' 미안하면, 너무 미안해서 미안하다는 말조차 차마 입밖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게 옳지는 않겠지만, 내 경우엔 그런 적이 있다.

 

세 번째 사과의 사례는 불행히도 지금 우리 시대가 낳은 버전이다. 바로 ‘유체 이탈’. 사과를 해야 할 주체가 우주의 기운을 모아 유체를 이탈한 뒤 사과는커녕 ‘평가의 주체’로 거듭난다. 나아가 평가의 ‘가이드라인’을 은연중에 그렇지만 실은 노골적으로 흘려댄다. 그러므로 비록 요식적이나마 사과를 해야 할 상황에 놓이지도 않게 되는 기적의 논리가 도출된다.

 

은교를 사랑한 작가의 사과는 다소 진일보했다. 그는 다음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내 다정함의 표현이었지만 그것이 누군가에게 불쾌함이 되었다면”, “누군가 나로 인해 상처 받았다면”. 여기까지는 앞서 분류한 두 번째의 상황에 해당된다. 흥미로운 건 그 다음이다. 이후의 서술이 ‘창의적’이다. “그것은 내 불찰이며 자책하고 있다”. 추행 당한 당사자는 온데간데없다. 정말 미안했다면 피해 당사자에게 먼저 사과하고, 그러고 나서 자책했어야 하지 않을까. 사과의 문법은 3형식이다. ‘누가’ ‘누구에게’의 두 요소가 필히 존재하여야만 최소한의 문장으로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어는 있는데 목적어는 찾아볼 수 없는 형국. 이토록 섬세한 자기(에의) 배려.

 

최근 어느 티비 프로그램에 나와 자신을 ‘늙어서도 언제까지나 섹시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라고 밝힌 작가께 ‘섹시하다’라는 말의 수행적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찬찬히 생각해보실 것을 감히 권해드린다. 윤리적 판단의 영역(‘착하다’)마저 미적 판단(‘아름답다’)의 범주 안에 잠식당해버린 시대에 ‘섹시하다’라는 표현은 일단 그 자체로 상대방에게 세련된 칭찬으로 치장한 아주 고도의 여성혐오적 발언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냥 아주 간단히 말해도, ‘섹시함’은 ‘추행’의 과정과 좀 많이 다르다는 것을.

Who's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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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문화연구 집단 '문화사회연구소'에서 '문화연구자'로서보다는 '비판적 인문주의자'(critical humanist)로서의 정체성을 보다 강하게 자각하는 존재론적 긴장 혹은 모순에 빠져 있다. 아카데미즘적 글쓰기(논문)와 신변잡기식 수필, 그 중간 정도의 글쓰기 양식이라 할 '비평적 에세이'의 존재론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대학원 영문과에서 에드워드 사이드의 '휴머니즘' 개념을 방법론으로 삼아 한국계 미국인 작가들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민족(nation)으로서의 '코리안'에 대한 표상을 비교검토하는 학위논문을 (지지부진) 준비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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