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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문화사회연구소

대중문화

덕후… 안여돼? 능력자?

딱히 ‘덕후’인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덕후를 옹호하는 건 더더욱 아니지만,
그래도 중요한 사람인 것만큼은 사실인 걸
by 김성윤 posted Aug 10, 2016 Views 471 Likes 1 Replie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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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덕후감』이란 책을 쓰고 나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에 하나가 이거였다. “덕후처럼 보이진 않으시네요.” 아마도 책 제목만 보고 저자 역시 덕후겠거니 짐작했을 텐데 생긴 게 딴판이었던 모양이다. 그때마다 반문하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곤 했다. ‘대체 덕후처럼 보이는 건 어떤 거죠?’

 

 

1.

 

1.jpg

 

지금은 잘 쓰이지 않지만 ‘안여돼’라는 말이 있었다. ‘안경 쓴 여드름 난 돼지’의 줄임말인데, 외모지상주의를 입증하는 대표적인 청소년 은어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이 말이 단지 안경을 착용하고 피부 트러블 있는 퉁퉁한 사람(주로 남성)만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안여돼에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시력이나 몸매 등 자기관리를 하지 못한다는 비아냥도 숨어 있다.

 

그리고 이 말은 아주 우연찮게도 전혀 다른 이미지와 만나기도 한다. 바로 오타쿠 또는 덕후다.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니 안구건조증은 기본이고 시력도 저하된다. 주로 앉아 있거나 누워 있다보니 디룩디룩 살만 찐다. 게다가 외부와 단절된 삶을 살다보니 정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할 것 같은 이미지까지 겹쳐 있다. 아마도 이런 선입견이 ‘오타쿠 = 안여돼’라는 신화적 등식을 만들어낸 게 아니었을까. 한 마디로 말해, 내가 안여돼가 아니란 사실에 사람들은 의외였던 모양이다.

 

 

2.

 

2.jpg

 

물론 사람들의 선입견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2008년 도쿄 구치소 사형집행장에서 기념비적인 일이 있었다. 사형 집행되는 거야 별반 특별할 게 없었지만, 그날의 주인공은 1980년대 후반의 여아 연쇄 유괴살인범 미야자키 쓰토무[1]였다. 정신분열과 해리성 인격 장애로 판정 받기도 했지만 미야자키 사건은 엄한 데로 불똥을 튀겼다. 4명의 여아를 살해했던 그의 집을 조사하자 우연찮게도 5천여개나 되는 비디오 테이프와 만화책이 있었다.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판단내렸다. ‘오타쿠는 위험하다.’

 

오타쿠(お宅, おたく)가 말 그대로 집에서 은둔하는 존재기만 했다면 다들 그냥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속으로야 한심하게 생각할지언정 적어도 남한테 피해 주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이 안여돼(?)에게 유아성애 성향이 있다거나 성도착증까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단지 꺼려지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에서 배척해야 할 존재가 되는 것이다.

 

 

3.

 

3.jpg

 

물론 한국에서 오타쿠 문화는 일본만큼 충격적으로 시작한 건 아니었다.[2] 하지만 서브컬처[3]에 대한 사회적 비하가 일반적이라는 게 특징적이긴 하다. 대개는 게임이 표적이 되곤 했다. 기성세대 관점에서 게임인즉 도박이고 중독 유발 물질이었기에, 그와 비슷한 클래스의 서브컬처 대다수가 사회적으로 하대받았던 게 사실이다.

 

게다가 2000년대 후반 들어 청소년들 사이에서 ‘중2병’이라는 새로운 조짐이 나타나기도 했다. 일반적인 사춘기와는 다르게 서브컬처식 세계관[4]으로 허세와 망상에 빠진 녀석들은 또래 내부에서조차 따돌림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가령, 이런 식이다. 우연히 스친 친구의 차가운 살갗에 흠칫 놀라며 묻는다. “혹시 너도 뱀파이어니?” 한 마디로 말해, 오타쿠는 정상인 취급을 받을 수가 없었다.[5]

 

 

4.

 

4.jpg

 

그런 가운데 오타쿠가 아니라 ‘덕후’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건 놀랄 만한 변화다. 원래는 인터넷에서 오타쿠를 조롱할 겸 언어유희를 섞어 ‘오덕후’라고 음차했던 것이 시작이었는데, 이후에는 이 말조차 줄여서 ‘오덕’ 또는 ‘덕후’라고 부르게 됐다.

 

눈 여겨볼 것은 덕후라는 말이 가진 놀라운 포용성이다. 오늘날에는 아이돌팬을 위시로 해서 피규어 수집가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사람들을 덕후라고 부른다. 게다가 굳이 서브컬처에 국한되지도 않는다. 특정한 취향으로 문화적 활동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덕후로 불리는 기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수제맥주+덕후나 비틀즈+덕후는 물론, 클래식+덕후 같이 얼핏 보면 형용모순처럼 보이는 경우까지 나타났다. 덕후는 오타쿠와 마니아 사이의 모든 것들을 가리킬 수 있는 보편적 접미사가 되었다.

 

사정이 급반전된 데에는 몇 가지 배경이 있을 것이다. 추측해보자면, (일본에서 오타쿠 문화가 재조명됐던 것처럼) 덕후 문화 자체가 가진 경제적 파급력이 존중받게 된 점이 가장 클지 모른다. 흔히 말하듯 다품종 소량 생산 시대가 아니던가. 마케팅 담론도 많이 바뀌었다. 이제는 감정경제의 시대가 되었고, 따라서 브랜드 소비를 넘어 ‘러브마크’[6]를 소비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오타쿠 또는) 덕후야말로 문화산업의 새로운 국면에서 가장 적합한 주체적 형태가 아닐까.

 

확실히 사람들은 시대의 변화를 (명확히 언어화하지는 않더라도) 감각적으로나마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 ‘오타쿠→덕후’의 과정이 보여주듯, ‘덕질’(덕후 활동)을 건전한 취미 활동으로 인정할 정도로 사회적 시선이 많이 누그러졌다. 더러는 ‘덕업일치’[7]해서 사회생활을 하는 경우들도 있다. 개중에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성공한 덕후’들도 나타나곤 해서 덕후에 대해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편견을 지우는 데 공헌을 하기도 했다. 구설에나 오르던 덕후가 사회적으로 해방(?)된 것이다.

 

 

5.

 

5.jpg

 

심지어 전세가 역전되는 모양새다. 과거에는 일반인이 오타쿠를 비하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낮게는 안여돼급이었고 높게는 정신이상자급이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고 있다. 이제는 (적어도 문화산업 내에선) 덕후가 주도하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덕후야말로 정상이고 일반인이야말로 비정상 아닐까. 자신이 딱히 덕후가 아니라고 여겨진다면, 그건 자신이 변화하는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문화지체자란 뜻이 아닌가 말이다.

 

오타쿠 내지 중2병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동안, 그들은 자기들끼리 일반인을 두고 ‘닝겐’(人間) 또는 ‘머글’이라고 비아냥거리면서 정신승리를 하곤 했었다.[8] 현실 세계에서 이런 화법은 망상에 빠진 중2병 환자의 주절거림 따위에 불과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중2병 세계관이야말로 놀라울 정도의 스토리텔링을 자극하는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고, 그 어떤 취향도 없이 정상(?) 생활하는 사람들은 단지 기계처럼 살고 있을 뿐이다. 덕후의 감각을 쫓아올 수 없는 머글들, 불쌍한 건 누구인가. 한심하고 답답한 건 대체 누구란 말인가.

 

덕후란 오늘날을 살아가는 주체적 형태에 있어서 일종의 ‘문화적 우세종’(cultural dominant)이다. 물론 모두가 오타쿠처럼 서브컬처 캐릭터(의 특정 요소)를 ‘모에’[9]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모두가 덕후처럼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러브마크를 소비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문화컨텐츠를 소비하고 또 대중문화 텍스트를 독해하는 방식이 덕후들의 덕질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욱 더 그렇게 될 것이고 말이다.

 

 

6.

 

그렇다고 우리 모두가 덕후가 되자고 이야기하려는 건 절대 아니다. 어쩌면 우리들 중 누군가는 왜 하필 지금 시점에 덕후라는 담론이 무성해지고 있는지 궁금해 했을 수 있다. 불과 몇 년전만 하더라도 차별어린 시선으로 점철됐던 바로 그 오타쿠 담론이 말이다. 그렇다면 이 글이 변화하는 세상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세상이 계속 이런 식으로 굴러가는 이상, 덕후라는 언어는 더욱 더 보편화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꼭 그런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들의 삶의 패턴 자체가 점점 덕후들의 덕질 같은 요소를 가미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덕후감(?) 없이 앞으로는 정상적인 (또는 있어 보이는) 문화생활을 유지할 수 없게 될 것이니 말이다. 하다못해 <어벤저스> 같은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마블코믹스의 세계관과 그들의 속사정을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던가.

 

끝으로, 한 가지 조언을 해주고 싶은 게 있다. 이 글을 다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덕후들(의 감각)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다면, 그냥 선입견에 근거해서 무작정 비난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자기는 뒤쳐진 사람으로 남게 될 뿐이다.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면, 이 세계가 변화하고 있는 흐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라고 말해주고 싶다. 누군가를 비판할 때는 동시에 그를 둘러싼 세계를 비판해야만 그나마 분석적이고 건전한 비판이 될 테니 말이다.

Notes

  1. 일본에서는 ‘미야자키’하면 지브리 스튜디오의 미야자키 하야오 다음으로 떠올릴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2. 2012년 신촌에서 대학생 살인사건이 있긴 했다. 오컬트 문화라고 해서, 일본 애니메이션 등의 신비주의적 세계관으로부터 시작해 실제로 사령을 추종하는 모임이 있었는데, 모임 내에서 갈등이 심각해지면서 살인사건으로까지 이어진 것이었다. 피해자는 여자친구를 이 모임에서 탈퇴시키려 했던 대학생이었고, 가해용의자들은 각각 15세 16세 18세의 중고등학생들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오타쿠 문화 중에서도 극단적인 경우에 속했고 모임 내부에서 벌어진 일이다보니 사회적 여파가 그렇게 크진 않았다.
  3. 오타쿠 문화와 관련하여 서브컬처라는 말은 주로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라이트노벨 등 하위의 대중예술 장르를 일컫는다.
  4. 서브컬처 작품들 중 주로 세카이계 경향과 맞물려 있다. 세카이계에 관해선 다음의 문서를 참조하라. https://ko.wikipedia.org/wiki/세카이계
  5. 그래서 대다수의 오타쿠는 ‘일코’(일반인 코스프레)라는 걸 한다. 코스프레는 만화 캐릭터의 코스튬을 현실에서도 흉내내는 2차 창작 공연 등을 가리키지만, 일코는 일상 생활에서 오타쿠라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일반인처럼 행동하는 걸 일컫는다.
  6. 브랜드 소비는 상품에 대한 높은 존중감에 준거하지만, 러브마크 소비는 거기에 더해 상품에 대한 높은 수준의 애정도를 포함한다. 일반적으로는 신비로움, 관능성, 친밀감 등이 러브마크의 구성요소로 손꼽힌다.
  7. 덕질을 자기 직업으로 연장한 경우를 일컫는다. 애니덕후가 성우가 된다거나 팬픽덕후가 작가가 되는 경우들이 대표적이다.
  8.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마법능력을 가진 이들이 일반 사람을 두고 머글이라고 부르면서 차별하거나 동정했던 것처럼 말이다.
  9. ‘싹틈’(萌え) 또는 ‘불타오름’(燃え)을 뜻하는 일본어로, 서브컬처 캐릭터 자체 또는 캐릭터의 특정 요소에 호감을 갖거나 열광하는 것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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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및 운영위원입니다. 주전공은 사회학을 하고 있고 최근에는 플랫폼 자본주의, 도시재생과 민주주의 등의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시간이 나는대로 연구소 홈페이지에 들러서 이용자 여러분들과 교감하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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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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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혁규 2016.08.11 09:40
    지인이 오타쿠 정체성을 연구하는 과정을 지켜보다 '오타쿠'라고 지칭하/되는 이들이 사회적 피해의식과 동시에 문화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는 묘한 느낌을 받았었는데(특히 지속적 덕밍아웃에서), 최근의 덕후 현상과 관련된 동일성(?)이겠군요. 근데 그러면서 들었던 궁금증이었는데, 어떻게 경제적 파급력을 가진 소비의 주체로서 조명되었을까라는 물음. 인과관계로 파악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 profile
    김성윤 2016.08.13 14:30
    문화적 우월감과 소비 주체 호명 과정의 상호관련성은 확실히 더 해명돼야 할 부분이 있을 듯해. 주체화 과정의 장치에 산업정책 같은 요소들도 있겠지만, 스스로를 고객님 또는 호갱님이라 자조 섞어 부르는 주관적 측면도 재밌을 듯해. 소비자 주체가 됨으로써 피해의식을 최소화할 수도 있고 나아가 소비자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능동적 위치를 확보하게 된다는 점 등등에서. 그러면 구조적 인과성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메커니즘의 윤곽을 어느 정도는 잡아나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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