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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문화사회연구소

정치사회

꼰대의 이유

「꼰대의 이유 ― 어른이 불가능한 시대의 꼰대 담론」, ≪오늘의 문예비평≫, 2016년 가을호(102호)
by 김성윤 posted Aug 10, 2016 Views 1418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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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꼰대를 문제삼기

 

젊은 사람은 꼰대를 비난하고, 나이 든 사람은 젊은 사람들이 못마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꼰대가 되는 건 아닐까 근심스럽다. 최근 들어 부쩍 ‘꼰대’와 관련한 문의나 청탁을 받곤 한다. 오래 전부터 비속어로 사용돼왔던 말이지만 어느 순간 중요한 사회적 키워드가 되었다는 방증일 것이다.

 

꼰대에 대한 성찰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는 건 사실 의아한 일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게 우리 사회의 한편에선 피터팬이니 키덜트니 해서 성장하지 못하는 어른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엔 꼰대와 키덜트가 공존하고 있다는 뜻일까. 어쩌면 이건 꼰대가 몇 퍼센트고 키덜트가 몇 퍼센트라는 식의 인구학적 문제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가령 이런 식의 이율배반들을 떠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 피규어를 수집하는 꼰대, 걸그룹에 열광하는 가부장, 또는 아재 개그에 빠진 신세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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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존재론적 동요의 일종이라 볼 수 있을까. 어쨌든 어른됨에 대한 가치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일이 영 어색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이 또한 이상하긴 마찬가지다. 이미 어른이 된 사람들이 어른됨에 대해 궁금해 한다? 묘한 형용모순 아닌가. 아마도 다음의 둘 중 하나거나 둘 모두가 아닌까 싶다. 첫째는 어른들조차 자기가 누구인지 세상 이치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것이고, 둘째는 생물학적으로는 어른이되 사회학적으로는 어른이 안 된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의 역설이 발견되는데, 어른됨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그건 그만큼 자기 자신이 (사회학적으로) 성장하지 못했다는 반증이 되는 셈이다.

 

물론 이런 질문조차 떠올리지 못하면서 사는 기성세대도 (어쩌면 압도적으로) 많다. ‘난 내가 누구인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어’, ‘내가 어른이 아니면 누가 어른이겠어.’ 자기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의혹이 없다는 뜻일 텐데, 솔직히 말하자면 요즘같이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시대엔 자신감이 넘쳐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못미더운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세상이 이토록 변화무쌍한데 어느 한 곳에 박혀서 확신에 차 옴짝달싹하지 않는다면 그만큼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뜻이 아닐까.

 

요컨대,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스스로 어른스럽지 못한 게 아닐까 하고 염려하고 있다면 그것은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조짐이라고 말해두고 싶다. 시대가 유감스럽다보니 우리 모두 불안한 삶을 살고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 질문을 품기 시작한다면 나와 세상, 나와 타인 그리고 나와 나 자신의 관계가 자명하지 못하다는 감각으로 이어지게 되지 않을까. 또한 (좀 더 공격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질문이야말로 감각적 인지와 합리적 의심을 바탕으로 이 세계에서 싸워나갈 준비가 됐다는 증거가 아닐까. 스스로에 대해 의심하지 않으면 성장할 수도, 투쟁할 수도 없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우리는 꼰대를 둘러싼 담론적 사회 현상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어른들은 꼰대에 대한 성찰에 성공할 수 있을까, 그래서 진정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물론 고리타분한 생각으로 글을 쓸 생각은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이런 질문으로는 실패가 뻔하다고 본다. 강호의 도리가 땅에 떨어진 시대라고 하지만, 우리가 알던 ‘그’ 도리가 지금 시대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어쩌면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을 수 있다. 오늘날 애어른 할 것 없이 운운하는 꼰대 담론을 진정한 어른을 찾기 위한 과정으로만 한정하기는 곤란하다. 오히려 애들이라면 뭔가 쏟아낼 불평이 있다는 뜻이고, 어른들이라면 뭔가 불안한 심리에 휩싸여 있다는 뜻일 테니까 말이다. 우리의 문제화 방식은 전혀 다른 곳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2. 성찰의 시대?

 

애초에 꼰대라는 비속어는 늙은 거지를 뜻했지만,[1] 이 말이 본격적으로 교사 또는 담임교사를 가리키기 시작했던 것은 산업화가 한창이던 1960년대 후반부터였다.[2] 교사들을 ‘늙은 거지’에 준하는 존재로 폄하하려던 의도였지 싶다. 서구화, 근대화, 산업화, 개인화되어 가는 와중에 전통적 세계관으로 젊은 세대를 지도하고자 했던 기성세대에게 반감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교육 과정은 주로 학교에서 경험되었으며, 따라서 꼰대라는 말은 지극히 탈학교적 은어의 일부였던 셈이다. 애초 뜻 그대로 꼰대들에게선 배울 게 없었다.

 

나이 많은 사람이 더 많은 경험을 했을 것이란 가정, 따라서 연소자의 사고나 행동은 미숙하며 종종 오판이나 오류에 빠지기 쉽다는 인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요즘 애들은 버르장머리가 없다’는 말이 고대 동굴 벽화에도 있었다는 흔한 상식처럼, 연소자를 미숙하게 보는 관행은 가히 초역사적이라 할 만하다. 그런 점에서 1960~70년대 들어 꼰대를 비롯해 수많은 탈학교적 은어들이 탄생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 전에야 세세한 기록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이즈음에 이르러 기성세대가 가진 세계관을 부정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정보에 의하면) 역사상 거의 최초로 ‘우리가 어리석다고?’ 하는 식의 세대론적 질문이 똬리를 틀었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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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라는 말이 오늘날처럼 (교사나 부모뿐만 아니라) ‘고리타분한 연장자’ 따위를 뜻하게 된 건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이런 것이다. ‘나이가 많아 공경해야 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당신들이 살아왔던 세계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계는 질적으로 전혀 다르다. 누군가가 보기에 어리석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보기엔 꽤나 합리적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누군가가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누군가를 가르치려 들 때 나타나기 시작한다. ‘날 가르치려 들어? 니가 나에 대해 뭘 안다 그래? 알면 얼마나 잘 안다고 그래?’ 안타깝게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경험해보지 못한 건 잘 모르는 경향이 있다. 모르면 가만있기라도 하면 될 텐데, 답답한 마음에서인지 제 경험에 빗대 타인을 지레짐작함으로써 끝내 꼰대의 나락으로 떨어지고야 만다. 꼰대는 시대에 뒤떨어진 독선가들에 붙여준 별명이었다.

 

그 시기에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거쳤던 세대는 요즘 어떻게들 살고 있을까. 어쩌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올챙이 시절 생각 못하는 개구리 신세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누구도 반박하기 어려운 전형적인 꼰대로. 그렇지만 뭔가 새로운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은 성찰이란 걸 하고 살기도 한다. 단적으로 얼마 전 박원순 서울시장이 서울시립대 졸업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세대가 다른, 시대가 다른 저의 경험을 앞세워 지금 청년 여러분을 판단하지는 않았는지, 혹시 꼰대짓을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봅니다.”[3] 비록 유명인을 앞세우지 않더라도, 꼰대가 되지나 않을까 또는 이미 꼰대가 된 게 아닐까 염려하는 자의식들이 나타난 듯하다.

 

대개는 탈권위주의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더 성찰적인 듯하다. 특히 꼰대의 본산, 학교에서 이런 움직임이 나타나는 건 주목할 만하다. 소위 신세대나 86세대를 중심으로, 학생들과 어울리려는 일군의 교사들이 종종 보고되곤 한다.[4] 이들은 어린 세대와 커뮤니케이션에 능한 교사가 되고 싶은 자아-이상을 품으면서 꼰대로부터 제 스스로를 경계하곤 한다. 세대간 접촉이 잦은 직장도 예외일 수 없다. 드물긴 하지만 대리나 과장급에서 이런 비슷한 양상이 관찰된다.[5] 혹여나 ‘부장님’처럼 될까봐 염려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성찰들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교사는 ‘중2병’ 걸린 제자들을 보면서 울컥하는 걸 매번 참아야 한다. 중견급 사원은 자기 기준에 못 미치는 후배 직원을 보면서 직접적으로는 짜증을 참아야 하고, 나아가 ‘걔네들’ 또래 특유의 근무 태도나 생활 태도의 문제로 일반화하고 싶은 유혹을 견뎌내야만 한다. 이런 감정적 압박들을 견딘다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토록 싫어하던 부모나 어른들의 모습을 닮아가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도 여간 찜찜한 일이 아니다.

 

 

3. 어차피 문제: 좋은 어른이 되거나, 어른인 척하지 않거나

 

불행하게도 이런 류의 성찰들은 대개 실패하고 만다. 사실 더 깊은 고민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몇 가지 함정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종종 ‘꼰대가 아니라 진짜 어른이 되어야지’ 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바로 잡으려 한다. 그런데 바로 이 ‘좋은’ 생각이 가장 중대한 함정이다. 오래된 좋은 답은 새롭고 나쁜 질문보다 종종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이런 식의 규범적 문제의식은 자기 자신이 고리타분한 사람이라는 증거가 된다.

 

‘어른됨’이란 일종의 언어적 환상이 아닐까. 꼰대스럽지 않고 어른답다는 것 말이다. 주지하듯 ‘~스럽다’는 대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둘 중 하나인데, 어근 자체가 (‘개걸스럽게 먹는다’처럼) 비도덕적이거나 (‘여성스러운 남성’처럼) 지시대상과 어울리지 않는 경우이다. 반대로 ‘~답다’는 말은 주로 실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어근이 (‘그 친구 참 남자답네’처럼) 규범적으로 합당하거나 (‘아름답게 자신있게’처럼) 가치론적으로 조화로운 경우에 해당한다. 이처럼 어른됨이라는 말은 ‘어른다운 어른’이라는 어떤 규범과 맞물려 있다. 어른은 응당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당위론에서부터 모든 사고와 행동을 작동시킨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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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른됨의 규범을 동원하는 순간 두 가지 사달이 일어날 수 있다. 규범이란 일종의 선긋기와도 같은데 선을 긋고 나면 선 안쪽과 바깥쪽이 구분되는 것처럼, 일단 무언가 또는 누군가가 어른다워지게 되면 그와 동시에 다른 어떤 것은 어른스럽지 못한 것으로 획정되고야 만다. 그 효과는 최소 두 가지다. 먼저 1번. 꼰대스러운 것을 떨쳐내는 게 가능해진다. 물론 도식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현실에서는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어쨌든 꼰대를 경계하고자 했던 문제의식과 맞물려 있으므로 긍정적인 효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2번. 또 다른 효과는 어른다움이 범주화되는 바로 그 순간, 어른에 이르지 못한 미숙한 것들을 기준선 바깥으로 타자화시킨다는 점에 있다. 어른답지 못함의 목록에 어찌 꼰대스러운 것만 있을까. 어리숙하며 철없는, 즉 어린 것 역시 경계 대상이 되지 않겠는가.

 

결국 어른됨을 추구하면 할수록 우리는 애초의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꼴이 된다. ‘너희는 아직 어려’라는 꼰대적 시선을 말끔히 제거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예전의 꼰대들이 젊은 세대들을 어리석은 존재로 솎아내면서 사실상 군림하려 든 것과 다를 게 없다. 게다가 1970년대의 세계가 변화하던 속도에 비하자면 오늘날의 속도가 훨씬 더 정신없을 지경인데, 우리는 대체 어떤 권한으로 어른답지 못한 것, 정확하게 말해 젊은 세대의 경험과 그들이 표현하는 세계에 대한 반응을 함부로 예단할 수 있는 걸까. 그들로부터 세상에 대해 더 배우지는 못할망정 말이다. 요컨대, 어른답지 못한 걸 퇴행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와 동시에 어른답다는 것 역시 퇴행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을 뿐이다. 꼰대가 되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힘든 일이다.

 

성찰의 필연적 실패가 꼭 마음가짐 차원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볼 문제는 서두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성장이 지체된 세대가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것이 꼰대 담론을 이루는 몇 가지 배경 중 하나가 된다. 키덜트 현상 따위는 어른답지 못한 어른이 많다는 것, 즉 어른됨이라는 사회적 규범에 모자란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 된다. 이것은 구조적인 문제기도 하다. 평균 수명이 짧았던 시대에는 10대 시절에도 장군 소리 들었던 위인이 꽤나 있었던 반면, 오늘날 소년 영웅은 만화에서나 가능할 법한 이야기가 됐다. 단적으로 국회의원만 하더라도 정당 정치의 비즈니스를 위한 캐릭터가 아닌 이상 청년 의원은 좀처럼 등장하기 어렵지 않던가. 고령화 시대에 접어들수록 청(소)년층이 사회적 자원에 접근할 기회가 그만큼 제한되기 때문일 것이다.

 

주관적인 차원에선 이들이 (거부당할 뿐만 아니라) 어른됨을 스스로 거부하는 측면도 있다. 이것은 매우 미묘한 문제다. 구조적으로 어른됨에 다다르기 어려운 운명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앞선 시대의 윤리를 불신하고 부정하는 계기들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아이돌의 이모팬이 된다는 건 억척스러워야만 하는 지금으로부터 소녀 시절의 감성을 소환한다는 뜻이고, 삼촌팬이 된다는 건 아버지 세대처럼 마초적으로 살지 않고 온정주의에 기반한 새로운 가부장 윤리를 따르겠다는 뜻을 포함한다.[6] 예컨대 영화 〈건축학개론〉에서부터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 이르는 복고 현상은 과거로 달아나려는 이들의 소망을 입증하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현재의 규범적 압박으로 작용하는 어른됨의 규범을 버거워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 시민이 된다는 것, 경제적으로 재산권자가 된다는 것, 사회적으로 존경 받을 만한 사람이 된다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에는 아마도 이러저러한 세부 내역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위시 리스트를 실현한다는 건 그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어쩌면 여우의 신포도처럼 자기기만의 계기가 섞이게 될 수도 있다. ‘어른 따위 되지 않겠어.’ 때로는 이런 계기들이 생물학적 연령대에 들러붙는 사회적 규범의 위선적 측면을 간파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치에 참여한다지만 결국 자기 이해관계랑 엮여 있는 거 아니야? 풍요로워져봤자 속물이 된다면 무슨 소용이겠어? 존중 받기 위해 가식적으로 살기보다는 차라리 미움 받을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닐까?’ 그럴 때 선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매력적인 선택지. ‘꼰대가 되느니 차라리 성장하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 구조적으로든 능동적으로든 성장이 지연되는 시대를 산다는 건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규범에 적응하든 거부하든 어른 세대는 언제나 성찰 중인데, 그럼에도 꼰대 소리를 피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어른인 척하지 않으려 해도 꼰대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원리적으로 봤을 때) 무엇보다도 어른이니 꼰대니 하는 문제는 결국 세대적 범주에 해당하기 때문에 관계론적일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서 제 아무리 혼자서 (좋은 어른이 되든 어른인 척하지 않든) 심신수련을 잘 한다고 하더라도, 남들이 그렇게 봐주지 않으면 별무소용일 뿐이다. 기성세대가 아닌 세대, 콕 집어 말해 청(소)년들로부터 꼰대가 아니라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단적으로 말해, 어른됨이라는 규범이 절대불변의 기준을 갖고 있을 리 없다. 꼰대라는 것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모든 것이 결국에는 다양한 사회적 상호작용과 앙상블 속에서 결정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위선적인 어른이 되지 않으려 해봤자 꼰대 소리를 안 들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혼자서 꼰대가 안 됐다고 정신승리 해봤자 다른 누군가가 당신을 꼰대라고 손가락질 하고 있다면 복잡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런 경우야말로 가장 꼰대스럽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꼰대가 되지 않는다는 건 어떻게 해도 어려운 일이다.

 

 

4. 하지만 전혀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걸

 

성찰을 시작한 이상, 결국 우리는 ‘꼰대’라고 발화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어도 알아야만 한다. 오늘날의 기성세대가 예전 어른들과 달리 ‘어른’이 되는 간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사정은 젊은 세대들 또한 마찬가지다. 기성세대가 살아왔던 성장기와 젊은 세대가 살고 있는 지금은 전혀 다르다. 왜 하필 요즘 들어 산업화시기보다 더 활발하게 꼰대 담론이 펼쳐지겠는가. 그만큼 세상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거듭 말하지만 오늘날은 산업화시기와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다. 세계가 변했다는 건 세계에 대한 감각도 달라진다는 의미이며, 그 과정에서 낡은 감각과 새로운 감각이 갈등을 일으키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꼰대 담론은 ‘문화 지체’ 현상에서 비롯된다.

 

하다못해 세계화 국면이 대표적이다. 과거에는 민족주의에 기반해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동류의식을 경험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민족이라는 표상이 역사학적으로도 생물학적으로도 부정 당하는 오늘날에는 소소한 사교적 네트워크를 제외한다면 사회적이고 공적인 경험을 한다는 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쉽게 말해, 구성원들을 엮어두던 집합 표상이 묘연해진 만큼, 자기 자신을 공동체에 근거 두기보다는 개별적인 존재로 상상하는 게 더 상식적인 세상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민족주의 이후만 문제겠는가. 신자유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것들도 세상을 바꿔놓았다. 그들의 파멸적 효과야 어떻든 과거의 폭력적이던 국가 권력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뒷짐을 지고 있으며, 그와 같은 가상적 조건들 위에서 우리는 좀 더 대중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체험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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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세상에선 과거처럼 연령주의에 근거한 권위 따위는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젊은 세대가 경험하는 인간관계 패턴 자체가 기본적으로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전통적 예의범절을 갖춘 민족이 아니라 글로벌한 에티켓으로 무장한 세계시민이 된다는 건 커뮤니케이션 자체를 수평적으로 평탄화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일상적으로도 가정에서든 학교에서든 상대적으로 상냥한(?) 대우를 받고 자란 세대에게 권위주의적인 관계성과 예절머리를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단 젊은 세대뿐만 아니라 사실은 우리 모두가 이미 탈권위주의라는 규범을 거쳐 온 세계를 살고 있지 않은가. 한 마디로 말해, 어느 시점에서부턴가 어른들이 살아왔던 세계는 붕괴되어 있었다.

 

세계를 살아내는 윤리적 문법 자체가 달라져야만 한다. 이런 세계에서 과거 시절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더 이상 유효할 수가 없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한다. 그런데도 피하지 말라고 한다면 그건 꼰대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반대로 청춘이어서 아픈 거다. 그런데도 참으라고 한다면 그건 꼰대다.’ ‘소유욕을 줄여야 한다? 절대 빈곤의 시대와 달리 상대적 빈곤의 시대에서 소유욕은 최저 욕망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참으라고 한다면 그건 꼰대다.’

 

기성세대가 살던 시대엔 욕심을 줄이고 아픔마저도 즐기면 사회적 생존이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시대엔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욕심을 줄이면 이미 가진 자들이 자원을 독식할 뿐이고 아픔을 즐겨봤자 돌아오는 건 신용불량에 통원치료 신세일 뿐이다. 한 마디로 어른들이 알려주는 대로 살았다간 호구되기 십상이다. 어쩌면 구(舊)세계의 문법이 깡그리 망가지지 않은 게 문제의 씨앗일 수도 있다. 적어도 패기 넘치는(?) 청(소)년들이 본다면 말이다.[7]

 

그 와중에 진보 꼰대는 이러기도 한다. ‘세상 힘든 거 다 안다. 어른으로서 책임을 통감한다. 그래도 역사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젊은이들이 들고 일어나야 한다. 너희들이 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러면 당장 어떤 반응이 돌아올 것 같은가. 당연히 냉소다. ‘젠장, 지들이 망쳐놓은 세상을 왜 우리더러 책임지라는 거야?’ 공적인 경험을 향유할 수 없는 세상은 이토록 매섭다. 결국, 그런 세상을 만들어놓고 미사여구로 꼬드겨봤자 반감만 살 뿐이다. 도전하라 해놓고 실상은 인턴이니 열정페이니 하면서 착취하고 있지 않은가. 의심이라도 사지 않으면 다행이다. 혹여 진짜로 세상에 도전이라도 할라치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여기에 어울릴 법한 한 대목이 있다. “거 봐, 아까는 도전하라고 훈계하더니 내가 막상 도전하니까 안 받아주잖아.”[8]

 

그들은 꼰대들의 일장연설을 들을 바엔 차라리 악명 높은(?) 자기계발서나 읽는 게 낫겠다고 푸념하곤 한다. 꼰대들의 대표적인 레퍼토리는 대개 ‘내가 해봐서 아는데…’로 시작한다. 수천만원의 학자금 대출에 간당간당한 시급을 받으며 일하는 청년에게 잘 알지도 못하면서 훈계질을 서슴지 않는다. 진보 꼰대들은 착취 시스템을 멈추고 거리로 나가라고 선동하는데, 그렇다고 그들이 적절한 일자리를 책임져주는 것도 아니다. ‘우리도 다 안다. 어차피 이 시대엔 더 이상 (사람이든 나라경제든) 성장할 수 없다는 것쯤은.’ 그렇다보니 IMF 구제금융 이전의 좋았던 시절은 즐길 대로 다 즐겨놓고 이제 와서 사다리 걷어차는 것 마냥 자기들더러 참고 견디라며 스스로 책임지라는 식의 이야기는 불편부당할 수밖에 없다. 자꾸 이런 식으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면 요즘 유행하는 혐오의 감정이 북받칠 수도 있다. 아니, 이미 시작된 것 같기도 하다. 개. 저. 씨.

 

기성세대가 무슨 말이라도 거는 즉시 바로 꼰대가 돼버릴 수 있다.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의 어떤 훈계도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와중에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게 뭔지 아는가. 꼰대라고 꾸짖고 다니는 젊은 세대의 목소리마저도 모호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들 개개인을 일반화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세대 전체적으로 봤을 때 어른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그들 자신에 대한 어른들의 태도만큼) 이중적이다. 그들은 어른들이 자기 삶에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뭘 안다고 그래?’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쩌면 유례가 없을 정도로, 믿을 만한 멘토가 필요하다며 어른들을 압박하기도 한다. ‘누군가 삶의 좌표를 일러줬으면 좋겠어.’

 

좋은 어른이 되고 싶은 기성세대로선 답답할 것이다.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추라는 이야기일까. ‘참견은 하지 않되 의지처가 되어주세요.’ 하지만 젊은 세대의 이중적 요구를 단순히 병리적이라고 예단해선 곤란하다. 그런 심리는 꼰대는 되기 싫으면서 어른 노릇하고 싶어 하는 이율배반만큼만 이상할 뿐이기 때문이다. 집에서든 사회에서든 세대 갈등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위로가 될 이야기일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그건 우리 모두 모순적인 생각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일 것이다. 혼돈의 시대에 맞부딪치면 사는 한, 그리고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는 한, 우리는 자기 자신이 뭘 원하고 있는지 알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사태일 뿐이다.

 

 

5. 사실, 진짜 문제: 꼰대짓과 꼴통

 

그렇다고 우리 모두 꼰대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서 아무런 소득 없이 글을 맺으려는 건 결코 아니다. 무엇이 꼰대인지, 그리고 꼰대로서의 운명을 피하기가 어째서 어려운지를 설명하는 사이에 놓쳐버린 중요한 논점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논점은 인류학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 좀 더 경험적인 관찰과 숙고가 필요한 부분이긴 한데, 어쨌든 결론을 대신해 직관적인 수준에서 가설이라도 내놓자면 대강 이렇다. 이제는 (인격적 존재를 가리키는) 꼰대보다는 (특정 행위를 문제삼는) ‘꼰대짓’이 중요해지고 있다. 그리고 꼰대 또는 꼰대짓이 문제시되면 될수록 그로부터 파생하여 대립하는 ‘꼴통’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일단 짐작으로는, 이 두 가지 논점을 간과해버린다면 우리 시대의 꼰대 담론은 별다른 교훈도 없이 세대간 문화 전쟁의 지표 정도로만 머물지도 모른다.

 

꼰대라는 말이 담임에서 교사 전체로, 부모(주로 아버지)에서 기성세대 일반으로 확장되는 사이에 놀라워할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젊은 세대들의 꼰대 담론이 단지 세대 차이 나는 어른들만 문제 삼는 게 아니라, 학과나 동아리의 선배 심지어는 친구들한테까지도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선배도 꼰대고, 친구도 꼰대다.’ 아무리 비속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수십 년 동안의 용례가 있는데 꼰대라는 말이 어른이 아닌 사람들까지도 겨냥한다는 건 형용모순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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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이들이 새로 발명한, 또는 조합해낸 말이 바로 꼰대짓(꼰대질)이다. 젊은 세대가 생각하는 꼰대짓이란 다음 두 가지 정도로 이해된다. 첫째, 남을 가르치려 들면서 자기 생각을 강요하는 행위다. ‘내가 그랬으니까 너도 그럴 거야’로 시작해 대개는 ‘나처럼 되라고! 내가 옳다고! 날 인정하라고!’로 귀결하곤 한다. 그들이 학교에서 속류적으로 배웠던 계몽주의니 절대주의니 하는 것들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응용된다. ‘나는 알고 너는 모른다’는 전제는 ‘내가 진리’라는 논리를 바탕에 두고 있고 결국 ‘나를 믿고 따르라’는 상명하복식 명령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꼰대가 되고 있는 어른들 입장에서도 앞선 시대에도 있었던 것으로 딱히 낯선 사고방식만은 아닐 것이다.

 

둘째, 사실 이 부분이 새롭다면 새로운 부분인데, 상대방의 (대개는 좋은) 기분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를 이르기도 한다. 이를테면 지인의 생일을 맞아 모두가 축하하는 자리에서 누군가 잔뜩 염세적으로 이런 말을 한다. “나도 생일 축하해. 그치만 그만큼 나이가 들고 있다는 뜻일 거야, 그치?” 일동 침묵…. 그 누구도 모르지 않지만 그걸 꼭 그런 자리에서 그런 식으로 말을 꺼내서 분위기를 깨는 사람들이 있다. 눈치 없는 사람이다. 이 경우에서처럼 꼰대짓이란 논리가 맞더라도 태도가 조화롭지 않고 오히려 대화를 차단시켜버리는 것을 일컫는다. 마치 꼰대처럼 말이다.

 

꼰대짓이란 말은 그들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거부하기 위한 효과적인 발명품 같기도 하다. 이 한 마디로 어른 꼰대는 물론이고 분위기 깨는 모든 사람을 한방에 보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상대가 심적 동요와 수치심을 동시에 느끼게끔 말이다. ‘내가 꼰대짓한다고? 내가 꼰대라는 얘기야? 난 아직 어린데…. 그런데 내가 그렇게 꼰대 같단 말이야?’ 꼰대 담론이 세대나 연령의 범주를 초월한다는 건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선배가 잡는 똥군기라든가 친구가 ‘빠는’ 진지함이라든가, 불편한 모든 것이 꼰대짓이 된다.

 

그런 점에서 꼰대 담론이 꼰대짓으로까지 영역이 확대된 것은 필연적으로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게 한다. 꼰대짓은 비단 생물학적 어른으로서 꼰대만 하는 게 아니라, 그들 세대의 언어대로라면 ‘씹선비’나 ‘설명충’도 얼마든지 하고 있는 짓이기 때문이다. 근자에 식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스놉’ 같은 말이 떠오르는 게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꼰대 담론을 만들어내는 청(소)년들은 권위주의 문화로부터 연원하는 화법을 포함하여, 예전에는 없었던 과도한(?) 진지함마저도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일견 오늘날의 꼰대 담론은 물리적·상징적 폭력에 대한 거부이자 문화적 저항으로 나타나지만, 그 이면에선 커뮤니케이션의 특정 부분을 잘라내 버리는 효과를 동반하기도 한다.

 

다소 과격하긴 하지만, 이런 경향을 꼰대짓의 반대말로 ‘꼴통’짓이라 부르면 어떨까. 왜냐하면 분위기 해치는 화법을 비롯해 모든 진지함을 거부하는 동시에, 때로는 성찰의 길로 들어서게 할 수도 있는 조언이나 충고 같은 것도 추방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라면 쌍방향적인 커뮤니케이션이랄까, 서로 간에 공진화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이란 것이 들어설 가능성이 어렵지 않겠는가. 물론 괜한 오지랖을 비롯해 꼰대짓이 문제가 되는 건 ‘조언을 원치 않는 타인에게 자신의 조언을 휘두르거나,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 자신의 삶의 방식을 강요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조언과 충고를 해도 잘 해야 하는데 말이다. 한 번 더 말하지만, 어른이 된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미 어른인 사람도, 아직 어린 사람도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오늘날의 꼰대 담론은 시대에 뒤떨어진 문화 지체 현상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세대간 그리고 세대내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되고 있음을 알리는 징표이기도 하다. 기성세대는 달라진 세계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어렵고, 젊은 세대는 자유의 미명하에 불간섭주의에 빠져 서로를 ‘단속’하기에 바쁘다.[9] 어쩌면 여기서 우리는 꼰대든 꼴통이든 세대를 막론하고 저마다 ‘자기동일성’(self-identity)을 유지하는 데 여념이 없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동일성 없이 사회적 삶을 영위하는 건 당연히 어렵겠지만,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자기전화’(self-transformation)를 발목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을 품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젊은 세대는 어른들이 지체되고 있다 불평하고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이 지체되고 있다 훈계하지만, 어쩌면 진짜로 지체되고 있는 건 우리 자신이 아닐까.

Notes

  1. 「第三의 社會 ― (5) 完全乞食派」, <동아일보>, 1961년 2월 9일자.
  2. “이 「꼰대」라는 속어는 KBS 연속극 「수다스런 계절」에서 선생님을 낮추는 말로 사용된 후 급격히 어린이 사회에 유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國民校生의 俗語와 辱說」, <경향신문>, 1970년 11월 13일자.
  3. 「박원순 시장 “꼰대짓 하지 않았는지 반성합니다”」, <한겨레>, 2016년 2월 24일자.
  4. 엄기호,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따비, 2013.
  5. 직장에서 고학력 신세대들이 겪게 되는 다양한 주관적 경험들에 대해서는 이영롱, 『사표의 이유』, 서해문집, 2015 등을 일독해보는 것도 좋다.
  6. 졸저, 『덕후감』, 북인더갭, 2016.
  7. 오늘날 젊은 세대가 바라는 미래상 1순위가 경제성장도 민주화도 아닌 ‘붕괴와 새로운 시작’인 게 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부들부들 청년] “우리는 붕괴를 원한다”」, <경향신문>, 2016년 1월 1일자.
  8. 장강명, 『표백』, 한겨레출판, 2011.
  9. 단속의 다중적 의미에 대해선 엄기호, 『단속사회』, 창비, 2014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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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및 운영위원입니다. 주전공은 사회학을 하고 있고 최근에는 플랫폼 자본주의, 도시재생과 민주주의 등의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시간이 나는대로 연구소 홈페이지에 들러서 이용자 여러분들과 교감하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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