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덤은 팬덤일 뿐, 오버하지 말자
- 김나영을 러시아로 보낸 팬들 그리고 거기에 찬사를 보내는 사회


1. 장원삼의 삼성 이적과 축구대표팀의 월드컵 예선에 관련한 스포츠뉴스 와중에, 또 하나의 소식이 들려왔다. 국내 피겨스케이팅 유망주 김나영 선수가 러시아 그랑프리 대회에 출전하게 됐다는 것. 그것도 ‘팬들이 끊어준 티켓’을 가지고 말이다.

2. <디씨인사이드>(이하 디씨)의 누리꾼들이 또 한 번 일을 쳤다. 이들은 ‘피겨스케이팅 갤러리’(이하 피갤)라는 게시판을 본거지로 삼아 선수 가족, 대한빙상연맹(이하 빙연), 러시아빙상연맹 등을 바쁘게 오가면서 자칫 대회에 참가하지 못할 뻔했던 김나영 선수가 출전하는 데 기여했다고 한다.
대회 엔트리 마감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촌각을 다퉜던 이들의 행보는 가히 극적이라 할 정도였다
. 그렇지만 정작 선수의 대회출전을 추진해야 할 빙연은 무성의한 자세로 일관했다는 것이 누리꾼들의 주장이다. 빙연에 ‘집요하게’ 문의를 타전했던 피갤 누리꾼들은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고, 심지어는 욕을 들었다고까지 증언하고 있다. 이들은 빙연을 ‘빙엿’이라고 비꼬아 말할 정도로 이를 갈고 있다.
결국 열성 누리꾼들 몇몇이 러시아연맹과 직접 접촉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과정은 (촉박했던 시간문제를 제외한다면) 의외로 매우 순조로운 것이었다. 그렇게 대회 참가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하자, 빙연 역시 일을 서두르게 되었다. 이윽고 러시아로부터 대회 초청장이 도착, 김나영 선수는 러시아 그랑프리의 공식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적어도 누리꾼들의 주장에 의하자면, 선수의 대회 출전에 복지부동으로 일관했던 빙연이라는 거대한 벽에 ‘맞서고 힘을 모아’ 쾌거를 이룩한 것이다.

3. 약한 자들이 모여서 강하게만 보이는 권력에 도전하는 이야기는 그것이 성공했든 성공하지 못했든 언제나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그들이 함께 모여서 열과 성을 다해 움직였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흡사 한편의 쿨한 드라마와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특히 관료화된 지배질서를 보고 있노라면 거기에 반기를 드는 대중들의 결행은 이를 데 없이 아름답다. 관료사회란 어떻던가. 관행이라는 미명 하에 스스로 움직일 의사가 전혀 없으며, 대중들의 참여를 귀찮아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입막아버리기 일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거대한 벽”을 넘어서려고 하는 시도! 그들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상관없이, 거기서 일종의 집합적인 동류의식을 형성하고 소통과 행동을 조직했다는 사실에 주목해보자. 적어도 누리꾼들이 자신이 소망하고자 하는 바를 위해 스스로의 실천을 조직하는 모습은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온갖 장해를 견디고 뚫어내면서 목표를 성취하는 이야기만큼 감동적인 이야기가 어디 그렇게 흔하겠는가.

12155436265_61000080.jpg4. 이런 사건을 두고 우리 중 누군가는 ‘건전한 팬덤’ 내지는 ‘집단지성’과 같은 수식어를 붙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팬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의 문화적 의미들을 생산하는 현상, 그것을 두고 우리는 팬덤이라고 한다. 스포츠산업의 세계에서 팬들이 자신의 열광을 더욱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그 통로를 제약하는 산업적 체계에 도전까지 한다면 우리는 이를 두고 ‘건전한 팬덤’이라 칭해도 무방할 것이다.
또, 여러 개체가 집합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함으로써 집단 내의 가장 우수한 개체보다도 뛰어난 성취를 이뤄내는 것, 그것을 두고 우리는 집단지성이라고 한다. 실제로 이들은 외국어 능력을 통해 러시아연맹과 접촉하는 자, 빙연에 문의(혹은 항의)전화를 시도하는 자, 선수 가족과 연락을 취하는 자 등으로 스스로 역할을 분담했다. 그 누군가에 의해서도 조종당하지도 않는 자기-조직화! 그 어떤 주어진 방식에도 순응하지 않음으로써 그 누구보다도 창조적인 결과를 이끌어 냈으니 이를 두고 소박하게나마 ‘집단지성’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5.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감이 교차하는 것은 왜일까. 김나영 선수를 출전시키는 데는 일조했지만 정작 그 모든 공은 손도 안대고 코를 푼 빙연한테로 넘어갔으니까? 이 모든 사실관계를 정작 빙연은 부정하고 있으니까? 게다가 1~2만명 규모로 치러진 국제 예선의 결승전을 2천5백명 규모의 국내 빙상장에서 개최하고도 자기 잘했다고 버티는 빙연이니까? 그래서 이런저런 이유로 디씨 누리꾼들의 집단지성이 아직도 넘어야 할 벽이 크니까?
그러나, 나의 관심은 거기에 없다. 먼저 오해가 없도록 하자. 나는 디씨 피갤 누리꾼들의 팬덤과 집단행동 자체를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현대 민주주의사회를 구성하는 살아 있는 대중이라면 응당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그들의 에너지를 존중하는 마음이 매우 크다. 다만 그 에너지의 원천과 표현방식에 대해서만큼은 의구심을 갖고 있다.

6. 김나영 선수의 러시아대회 출전이 성사되고 피갤의 게시물이 주목을 받자, 이웃동네 ‘진중권 갤러리’의 어느 이용자가 피갤에 놀러와 이런 글을 남겼다.
“니들 참 대단하구나. 그런데 이런 힘 있으면 선수들 빙판장 좀 갈아주지 않겠냐? 집단 항의를 하든 건물을 불태우든 한 번 해 봐...... (중략) 여기에 대한 니들 감정은 어떠냐? 꽤 쌓였을 거 같은데.. 우린 수 틀리면 정부랑도 맞짱뜨는데 니들은 배짱이 없나보다 했는데, 오늘 보니까 손발은 빠른 거 같구나. 뭐 어떻게 안 되겠냐? 하긴 우리 같이 피겨 잘 모르는 사람들 보다는 니들 속이 더 쓰리겠지만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글에 대한 반응들(댓글들)이다. 일차적으로 피갤 이용자들은 이 구경꾼의 글에 대해 자신들의 노력에 흠을 내려 하는 건 아닐까 의심해본다. 그 의심은 곧 풀린다. 그리고는 그의 의견에 동조해 빙연을 명백히 권력집단으로 규정하는 한편, 그에 대한 도전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 일인지를 토로하고 있다. 그들 중 일부는 그런 사고와 행동 속에서 자신들에게 “진짜 사회의식”이 있음을 스스로 증언하기도 한다.

7. 이것이 바로 팬덤을 둘러싸고 있는 경계선이다. 그들이 의미 있는 실천을 해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실천이 정말 그들의 삶의 조건들을 바꿔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간혹 ‘사회의식’ 같은 말이 튀어나오기는 하지만, 그들에게 ‘사회’란 대체 뭘 의미하는 것일까. 실제로 피갤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들에게 어떤 공통된 “사회”의식이 있다는 것을 찾기란 매우 어렵다. 다만 피겨 선수, 빙연, 그리고 자기자신들로 이뤄진 관계망을 제외하곤 말이다. 그들은 단지 (김연아 임팩트로 비롯된 피겨스케이팅 붐을 타고 형성된 아주 일시적일 것으로만 전망되는) 순수한 피겨스케이팅 팬일 뿐이고, 그 순수한 에너지를 주체 못하는 열혈 누리꾼들일 뿐이다.

NISI20080720_0007426523_web.jpg8. 혹자는 그들이 이번 일로 축적하게 된 경험이라는 것에 주목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제도에 대한 민주적 참여와 간섭의 경험은 그들의 정치의식과 사회의식에 있어서 중요한 자원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 경험이라는 것의 맥락은 다분히 이중적이다. 분명 피갤 팬덤 각 개인에게는 소중한 문화적 경험이 될 테지만, 그 경험은 그들이 그토록 깨고 싶어 하던 사회 체계를 확대재생산하는 데 기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들이 ‘진짜 사회의식’ 운운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빙엿’이 제대로 된 ‘빙연’이 되기를 바라는 것뿐이고 달리 말해 합리적인 스포츠산업이 정착하기를 바랄 따름이다.
그들은 어느 경계선 이상으로 탈주할 의사가 전혀 없는 듯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피겨스케이팅 붐에 단지 잠깐 열의가 타오르고 있을 뿐인 능동적인 소비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솔직히 나로서는 ‘능동적인’에 따옴표를 찍어야 할지, ‘소비자’에 따옴표를 찍어야 할지 도무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그렇다. 그들이 집단지성이든 팬덤이든 어떤 의미를 생산하든지간에, 그들은 단지 팬일 뿐이다. 나는 그들이 만들어낸 드라마에 기쁘기 그지없지만, 한편으로는 그 드라마가 우리들 사이에서 소통되는 방식에 문제의식을 느낀다. 그들이 가진 에너지를 무한존중하지만, 그 에너지가 결국에는 체계가 쳐놓은 사용한도 안에 갇혀버리는 것이 안타깝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체계를 재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9. 어느 스포츠뉴스에선 김나영 선수의 러시아 그랑프리 대회 출전을 두고 팬들이 만들어낸 작품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다. 이런 의미화 전략에 반기를 들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우리 사회의 지배질서라는 것이 적어도 두 가지 기로에서 균열하고 있는 형국에 대해서는 지적하고 싶다. 하나는 대중들이 자기표현을 하지 못하도록 막으려 하는 억압적이고 퇴행적인 ‘명바긔’스러운 전략이고, 다른 하나는 대중들에게 자기표현을 독려하면서 그들의 참여를 통해 지배질서를 유지하려고 하는 전략이다.
피갤을 포함하여 오늘날의 팬덤이 바로 그 경계에 있을 뿐이라면, 그들이 만들어낸 한 편의 쿨한 드라마에 대해선 딱 반쯤만 좋아하도록 하자. 우리가 순간적으로, 마술적으로, 상징적으로 해방됐다고 느끼는 순간, ‘진짜 사회’는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그들이 자기들의 세계 바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말이다.

<미디어스> 11월 20일 기고
  1. [2009/11/08] “기자? 나도 하겠네” 기자에 반역하는 대중들 by 김성윤 (4342)
  2. [2010/04/03] ‘삼촌’이라는 특이한 발명품 *3 by 김성윤 (6672)
  3. [2010/03/09] 2PM 팬덤의 이른바 '광기'에 대한 옹호 *2 by 김성윤 (7079)
  4. [2009/09/18] 새로운 팬덤 문화를 위하여 / 미디어스 by 권경우 (1723)
  5. [2009/03/31] 촛불, 그 빛은 어떤 빛이었나요? *3 by 윤삼 (9025)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