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잡을 수 없는 청년들

오늘날 정치는 매우 미묘한 말이 됐다. 정치의식, 정치행위, 제도정치, 일상정치 등등. 그러나 이 모든 말에 대한민국 청년세대를 적용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탈정치화’라는 말이 집약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이 복잡 미묘한 말들로부터 치외법권 지대에 살고 있는 존재들인 양 행동한다.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오늘날 청년의 정치적 무관심이 단순히 ‘의식 없음(coma)’에서 나오는 자연발로적 성향인지, 아니면 ‘무의식(unconsciousness)’의 심연에서 걸러 나오는 아주 극단적인 징후인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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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로 환원될 수 없는 정치적인 것. 청년들에게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이란 대체 무엇인가.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정치에 등을 지고 사는 모습이다. 10대 시절 가장 선호하는 직업은 연예인이 아니던가. 취생몽사(醉生夢死)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들은 꿈을 꾸며 산다. 정치의 바깥에서 사는 방식을 이미 어린 시절부터 몸소 실현한다. 20대 시절은 또 어떤가. 그들은 단지 안정적인 일자리 하나만 얻더라도 고마워한다. 벼랑에서 떨어질 공포와 경쟁의 쳇바퀴를 좇아야 하는 강박 속에서 정치는 뒤안길에 있다. 그들의 30대는 어떻게 되겠는가. 또 40대는. 그리고 50대, 그 이후에는…. 정치에 관한 한 그들의 자서전에는 온통 물음표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정치? 그게 뭐였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 무-의식, 즉 ‘의식 없음’이라고 판정 내리기에는 모호한 문제가 있다. 예컨대 그들 다수에게 공통된 反MB 정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작년 촛불정국에서 보여줬던 청년들의 정치 참여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요컨대 그들에게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이 없다고 단언하기에는 섣부른 감이 있다. 그런데도 사회구성원 대다수가 그들에게서 정치(politics)로부터의 이탈을 목도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되물을 수밖에 없다. ‘청년들에게 정치란 대체 무엇인가?’

청년 세대의 정치적 무관심이 나타나기 시작할 무렵(대략 1990년대 말), 몇몇 평자들은 이런 식으로 말했다. ‘그들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아무도 찍을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들을 대변해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의 무관심은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문제 삼는 지극히 급진적인 정치행위로 파악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촛불정국에서 직접 행동에 나선 청년들이 있었다면 그 역시도 현재의 정치인들을 통해 대리될 수 없는 어떤 욕구를 분출하기 위한 것일 터이다.

그렇다. 그들에게 정치는 없지만 정치적인 것은 마치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이 비(非)정치를 운운하더라도 정치적인 것 자체로부터 이탈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또한 정치적 무-의식(의식 없음)이 아니라 정치적 무의식(의식은 있지만 보이지 않음)이 중요하다. 그들은 정치를 외면하지만 끊임없이 정치적인 것을 구성해낸다. 심리학자가 아닌 나로서는 오늘날 청년들의 무의식을 낱낱이 해석해낼 재간이 없지만, 그 무의식이 변용된 실제 행위들(acts)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으며 또한 어떤 효과를 창출해내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요컨대, 청년세대는 ‘정치적인 것’을 어떻게 구성하고 있는가. 그것은 정치 자체에 어떤 영향을 가져오는가. 그리고 ‘가능성의 조건’이란 무엇인가.


정치적 쿨(cool)의 라이프스타일

그들이 때때로 대의민주주의를 거부하고 직접행동을 한다고 해서, 이것이 직접민주주의라는 언어와 직결된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직접민주주의라는 기표는 그들의 욕구를 채 담아내기에는 너무 모자란 것일 수 있다. 촛불정국 같은 경우는 우리에게 언어가 부족하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준 계기였다. 과잉 해석을 하는 사람은 거기서 직접민주주의라는 언어를 발견했고, 과소 해석을 하는 사람은 중간계급의 생명정치(bio-politics)라는 언어를 발견했다. 이 두 키워드는 의례적이고 축제적이었던 촛불이 꺼지고 일상생활로 귀환한 지금 순간에도 경합을 벌이고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소통 불가능한 MB정부를 비판하는 것과 신체를 보전․치장하는 것 사이에는 동요하는 청년세대의 모호함이 존재한다. 확실히 지금 우리는 그들을 특정한 말로 붙잡아둘 수가 없다.

적어도 한 가지 예외적인 어휘가 있을 뿐인데, 그것은 바로 ‘쿨(cool)’이라는 말이다. 정치적 쿨함은 때때로 그 모든 동요를 일순간에 잠재운다. 일상에서 그들의 관심은 경제적으로 살아남고 다른 한편 문화적으로 소비 욕망을 채우는 데 쏠려 있다. 어떤 촉발적 계기가 있지 않는 이상, 생존과 과잉-소비를 양극단으로 삼는 스펙트럼 속에서 청년들은 쉽게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의 ‘촉’은 스펙과 엣지 같은 경제적 존재증명이나, 박재범이나 박지성 같은 대중적 유명인(celebrity) 담화에 집중되어 있다. 게다가 퇴행적으로는 허경영 신드롬까지, 탈정치적 라이프스타일의 저변은 매우 넓다. 물론 청년세대의 관심이 유명인에게 있다는 것 자체를 두고 폄훼할 의사는 전혀 없다. 셀러브리티 컬처는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 관리를 위해 애쓰는 모습도 개인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 격차사회 속에서 88만원짜리 현실이 코앞에 닥치니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그런 삶에 바깥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눈을 감는다. 그들은 단지 모르는 게 아니라 묻지 않는다.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때로 질문을 던지더라도 그 질문은 실재하는 존재조건 주변을 맴돌 뿐이다. 그래서 질문은 늘 징후적이다. ‘갑자기 신종플루가 왜 유행하고 이렇게들 난리들이지?’, ‘용산참사 상가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시끄럽지?’ 이해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가장 손쉬운 결론은 (음모론을 채택하거나 아니면) 질문을 스스로 봉합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대답은 늘 주변적이다. ‘손 씻고 다녀야겠군’, ‘어떤 신부가 드러누웠다지’ 질문과 대답 사이에 엄연히 조응관계가 성립하기는 하지만, 질문 자체가 세상의 조직 원리인 정치를 겉도는 것이라는 점에서 문답은 대체로 무용하다. 그저 세상에 대해 안 본 건 아니라는 알리바이만을 제공해줄 뿐이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정치라는 것은 아는 것 같지만 모르고, 모르는 것 같아서 궁금하지만 알 길이 없는 어떤 모호한 상태로 남는다.

‘쿨함’은 바로 여기서 그들이 이 간극을 정서적으로 견딜 수 있게끔 해주는 언어로 작용한다. 쿨하다는 것은 본래 흑인 노예들이 착취와 억압을 인지하고 견뎌내면서 노예가 아닌 인간으로서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태도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종종 ‘What's up?’(별 일 없지?)이라고 인사를 나누고, 불의로 가득한 현실에 대해 ‘I'm hip to that.’(내가 촉이 좀 있지)이라면서 대화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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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엣지있음, 시크함 등등, 너무나도 쿨(cool)한 태도를 통해 삶의 바깥이 존재할 것이란 가능성에 눈을 감는다.
오늘날 청년에게도 쿨-애티튜드(cool-attitude)는 자신의 실재 존재조건을 상상적으로 견뎌내는 마술적 언어와 제스처로 기능한다. 그것은 정치에 대한 이중적 좌절로부터 비롯하며, 동시에 망각을 통한 자기 치료 요법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정치로부터 배제되어 있고 또한 그것을 인식할 수 없는 현실을 말 그대로 쿨하게 넘겨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쿨함만이 그들의 만사형통을 지켜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핫’(hot)한 진지함은 일종의 세대적 금기로서 작용한다. 세대의 외부에서 정치적 무관심을 지적해오면 쿨하지 못한 ‘꼰대’의 잔소리로 취급하고, 세대의 내부에서 (가령 운동권 학생들이) 정치적 관심을 호소하면 쿨하지 목한 ‘또라이’의 ‘뻘짓’ 쯤으로 치부한다. 정치에 대한 뜨거운 열정은 그렇게 차단되고, 차가운 냉소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자신과 직접적으로 결부된 것(예컨대 미국산 쇠고기로 인한 신체적 안전의 위협)이 아니라면 모든 것은 냉소의 대상이 된다. 그렇기에 더 나은 삶을 위한 그들 각자의 분해 불가능한 욕구들은 연대성(solidarity)에 기반한 보편적인 언어로 진전하지 못한 채 일정한 자기 한계 속에서 소용돌이친다.

그 결과란 결국 경제적 생존과 문화적 과잉에 대한 도착증일 수밖에 없다. 정치와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 영역에서 오늘날 청년은 누구보다도 뜨겁고 진지하다. 그들이 몰입하고 있는 경제나 문화의 영역에서 정치가 유령처럼 출몰할 때면 다만 냉소할 뿐이다. 경제적 열정과 문화적 열정이 강조되는 동안 정치적 냉소를 자기 규범으로 삼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날 청년세대의 라이프스타일이다.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안락-전체주의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것은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경제가 됐든 이데올로기가 됐든 그 모든 곳에 정치적인 것이 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정치로부터의 이탈이라 할지라도 정치적인 것은 끊임없이 출몰한다. 현실적으로 비정치적인 영역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상상에서는 그 모든 게 가능하다.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게 바로 오늘날 청년들이다. 정치적으로 쿨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불가능한 것을 상상적으로 가능하게끔 하는 것이며 또한 모든 곳에 침윤된 정치적인 것을 가급적 분리하고 배제해버리려는 문화적 실천인 셈이다.

그들에게 특정한 정치적 태도나 지향과 같은 것은 쿨하지 못한 것이며 (그들의 표현에 따른다면) 어떤 ‘편견’에 휩싸인 것이다. 실제로 다원주의와 상대주의라는 아주 고약한 것이 그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물론 이런 식의 대중주의적 규범들은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사회구조 속에서는 특정한 실효성을 가진다. 전체주의의 횡포에 즉각적으로 대항하고자 할 때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처럼 실용적인 것은 드물다.

자유의 혜택을 받고 자란 오늘날 청년세대에게 이데올로기에 의한 정치적 ‘편견’은 제일의 악덕으로 손꼽힌다. 이데올로기에 의한 개인적 자유의 위협이야말로 가장 경계할 만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청년들은 이데올로기의 외부에 서고자 하는 강박에 빠진다.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는 태도 같은 게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이것은 좌든 우든 정치적 편견에 빠져 어느 한 쪽에 치우치는 것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합리적 선택을 위협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나쁘다는 식의 태도다. 그런 까닭에, 어떤 식으로든 가치판단을 유보하는 것이야말로 이데올로기의 외부에 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제3자의 관점에서 말 그대로 이해관계에 휩쓸리지 않는 소위 객관적 입지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데올로기의 외부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영역이다. 상대주의라는 전략은 불가피하게도 사람들에게도 그런 희망을 품게 했다. 그것의 결과는? 당연히 정치로부터의 이탈이며 남의 일에는 쿨하게 일절 개입하지 않음이다. 모두가 황희 정승처럼 살려고 한다. 너도 옳고 너도 옳다는 식으로. 누구 하나 그르다는 이야기를 쉽게 하지 못한다. 오직 그르다고 판단한 것이야말로 가장 그른 판단으로 통용될 뿐이다.

물론 매우 영리하고 비범한 일부 청년의 경우에는 정치적인 것에 외부가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파악하고 있다. 그들의 경우에는 불가피한 선택으로서 혹은 차선으로서 박쥐의 길을 택한다. 국면에 따라 이쪽을 편들었다가 저쪽을 편들기. 정답과 오답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은 알지만 그와 동시에 영원한 정답과 오답이 존재하지 않는 것 또한 일찌감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해, 불가피하게 어느 쪽을 택하든 간에 한쪽으로는 절대 치우치지 않는다는 논리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정치적 선택(이데올로기의 외부에 서기와 상황에 따라 편들기)은 근본적으로 전혀 다르지 않다. 기본적으로 둘 모두 상대주의라는 규범에 포로가 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그 사이에 그들은 자신이 합리적으로 선택한다고 믿는다. 개인의 자유란 기본적으로 선택의 자유가 아니던가. 거부하든 왕래하든 그들은 선택의 자유라는 능동적 위치를 점하고자 한다. 자신들이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이것이 특권적 위치를 향한 부단한 의지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요컨대 청년들은 자유라는 환상의 도피처에 서식하고 있다. 그들은 단지 이것 아니면 저것 중에서 택할 뿐이다. 자유라는 환상 속에서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주어진 선택지의 바깥을 선택하는 자유가 철저하게 차단된 채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애써 눈을 감는다(앞의 자유는 ‘나쁜’ 자유고 뒤의 자유는 ‘좋은’ 자유인 셈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덜 위험한 선택을 한다. 어떤 불안, 공포, 강박, 심지어는 희열 때문인지는 몰라도, 위험한 선택을 하지 않는 자유 속에 갇혀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정치로부터 이탈하는 경향은 결과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자기 존재의 안전과 안락을 끊임없이 추구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우리들의 불균등한 삶의 조건 자체는 유지․존속된다. 표면상 오늘날 청년들이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전체주의적 외부를 경계하고 차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들 자신이 착취, 불평등, 억압, 불의 등에 공모하는 안락-전체주의자라는 사실은 애써 망각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유사 이래로 이렇게 정치적인 세대는 없었다. 이것은 말장난이나 역설이 결코 아니다. 현실 그 자체다.


사회적 청년의 등장: 가능성 혹은 불가능성의 조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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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아를 찾고자 하는 노력은 ‘정치’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보다 교묘한 탈정치로의 가능성 역시 가지고 있다.
그럼,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마땅히 쿨한 것 따위는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사회적 관계에 눈을 돌려야 한다. 쿨하게 멀찌감치 세상과 거리를 두는 바람에, 사회적 모순과 위기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지 않은가. 그 사이에 월평균임금은 88만원으로 전락했고 입시전쟁이 끝난 후에도 입사전쟁, 승진전쟁이 청년을 가만 두지 않는다. 생존경쟁 속에 좋았던 사람 사이에 끈끈한 유대관계는 파탄 나고 이웃공동체는 존립마저 위협받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공세 속에 삶의 형식들 자체가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다행하게도 가능성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쿨한 것에 매료된 시절이 서서히 끝나가고 이제는 '세상에 쿨한 게 어떻게 가능하느냐'는 반문이 서서히 들리기 시작한다. 이것은 일종의 반성이고 성찰이다. 지난 몇 년 동안 경제적 생존과 문화적 과잉에 매몰된 사이에 우리들의 사회적 관계가 비참할 정도로 파괴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흐름들이 돌출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을 보호하는 데 안주하지 않고 사회를 보호하려는 적극적인 움직임이다.

그동안 ‘경제적인 것(the economic)’이 사회를 지배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모두가 경제적인 것에 몰두한 사이에 중간계급이 무산자로 몰락하고 무산자는 경제적 사망선고를 언도 받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런 가운데 과연 나 자신은 누구인지 그리고 관계란 무엇인지에 대해 묻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하여 일부 청년들은 본연의 자아와 관계를 재구축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전화시킨다. 아무리 쿨하려고 해도 쿨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자기 안에서 계속 말을 걸기 때문이다.

그 고된 ‘박카스’ 국토대장정이 대학생들을 매료시켰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인기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들이 멤버들의 우정을 중요한 코드로 배치하고 있는 것 역시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청년들은 경제적 생존과 문화적 과잉을 강제하는 사회적 요구(need)와 자신들 본연의 욕구(demand)가 불일치하고 있음을 거의 감각적으로 간파(penetration)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MBTI 성격 검사가 유행하고 ‘내 마음 바로 알기’ 같은 교양과목이 인기를 얻는다. 도대체 사회란 무엇인가. 아이돌 팬클럽들이 바자회를 열고 자원봉사를 하는가 하면, <무릎 팍 도사>에는 사회에 헌신하고 환원하는 유명인들이 초대받는다.

청년들의 사회적 삶을 파국으로 몰아넣는 사회적 관행들에 대항하는 요소들이 도처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새로운 가능성의 조짐인 동시에 정치의 근본적 불가능성으로 치달을 또 다른 계기일 수 있다. 적어도 우리가 정치라는 것에 대해 고민한다면, 자아 성찰과 사회적 실천이 기본적으로 정치적 실천과 동의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곧장 알아챌 수 있다. 달리 말해 사회를 보호하고자 하는 개인적 노력과 사회적 움직임이 쿨한 청년들의 정치적 실천을 보증해 주지는 않는다.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다.

우선, 자아를 찾 으려 하고 관계를 희구하는 노력이 종래의 문제적인 라이프스타일과 전적으로 다르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컨대 오늘날 자아 찾기가 유행하는 것도 개인이 생존의 절박함 때문에 관계맺기의 새로운 규범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자원활동은 오늘날 그 패러다임이 볼런테인먼트(volunteer+entertainment)로 이동하여 개인들에게 자기만족적인 여흥을 제공하고, 동시에 그 자체가 취업과 승진에 필요한 ‘스펙’으로서 간주되기 때문에 각광 받는다. 그런 까닭에 이 새로운 물결은, 과거의 문화적 과잉에 경제적 생존이 접합된 방식으로 나타나는, 보다 교묘한 탈정치적 라이프스타일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식의 사회적 실천이 또 다른 환상을 선택한 결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누군가가 정치적인 것을 행함으로써 사회를 파괴했던 것에 대해 ‘성찰에 눈을 뜬’ 청년들은 과거사의 진상을 규명하지 않은 채 파탄난 개인과 파괴된 사회를 복구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가해자가 저지른 사회적 비용을 피해자가 전담하고 있는 형국이다. 나아가 문자 그대로 순수한 마음에 사회를 보호하고자 하는 이 새로운 물결이 종국에는 착취와 억압으로 얼룩진 사회적 모순과 적대 자체는 실질적으로 문제 삼지 않는다는 점에서 구조적인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보호의 움직임은 일견 탈정치화됐던 청년들이 정치적 실천을 행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실천 자체를 불가능하게 할 위험성도 수반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위험요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아를 되찾고 사회를 구조(rescue)하려는 이 아래로부터의 욕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지배적인 사회적 관계를 존속시키기 위해 적대의 위험성을 거세시키려 하는 위로부터의 요구에 이 욕구가 길들여지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우리는 청년 자신들의 움직임으로부터 배우고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진정한 자아란 무엇인가. 또 진정한 관계맺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경제적인 것을 압도해야지 하는 일이지 그에 압도당해서는 안 될 일이 아닌가. 또한 우리 자신을 규정하는 실재적 존재조건을 돌파해야 하는 일이지 그 한계 안에서 맴돌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정치적 청년이란 기획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중앙문화>(제58호, 2009년 겨울호) [10월 29일 작성] 김성윤/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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