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삼 <미녀들의 수다>, 항변 혹은 눈물
2008.11.14 01:19
8월 18일 <미녀들의 수다>에 대한 노트.
1. 이날 프로그램에서 호주(인)에 대한 한국인의 일반적인 인식으로 백호주의를 비롯한 인종차별의 문제가 얘기되었다. 이에 대해 호주 출신의 커스티가 말하길, 호주에서 인종주의는 백호주의 노선을 포기한 1970년대 이래로 이미 거의 없어졌다는 항변.
2. 여기서 징후적이게도 두 가지 쟁점이 돌출되었다. 첫째는 공식적인 인종주의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호주를 여행했던 사람들은 인종차별적 시선이나 언사에서 불쾌감을 느꼈다는 것. 둘째는, 커스티가 거기에 항변하면서 했던 이야기이기도 한데, 앵글로-색슨 호주인의 그런 반응은 일자리에 대한 위협과 더불어 사실상 영어 배우기에 관심이 없고 호주문화와 혼융하지 않으면서 별도의 자기 문화를 고수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감이라는 것.
3. 커스티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호주는 인종차별에서 자유로운 걸까. 그렇게 보긴 어렵다. 왜냐. 사실 일자리에 대한 위협과 문화적 동화의 거부라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포스트식민 상황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제노포비아(외국인혐오증)의 주요 자원이기 때문이다. 즉 인구 유지의 차원에서 생산/재생산과 관련된 이주 노동력은 포섭하되 지배문화를 위협하는 요소는 철저하게 배제한다는 논리가 너무나 자연스럽게도 강변되었던 것이다.
4. 그런 점에서 커스티의 항변이 가진 논리적 모순이라고 하는 것은 시쳇말로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는 논리와 동일하다. 즉, 맘에 안 드는 외국인을 혐오하기는 하지만 인종차별은 하지 않았다는 것.
5. 심지어 이런 논리는 최근 프랑스 국민전선의 극우 논리에서 드러났던 것처럼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다. 요는, 이주민의 문화구성체가 (프랑스적인) 지배문화에 의해 침식될 수 있으므로, 이주민들은 프랑스를 떠나라는 식의 논리이다. 오늘날 (발리바르의 개념으로 하자면) 신인종주의는 관용의 정치라는 탈을 쓴 채 인종주의/폭력/불평등의 은폐 전략을 수반한다고 할 수 있다.
6. 1차적으로는 (커스티의 언급처럼) 이주민은 받아들인다. 그러나 지배문화와 호응하지 않는다면 차별은 정당하다는 논리. 2차적으로는 (프랑스 국민전선의 논리처럼) 고유문화를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저들은 새로운 정착지에서 축출되어야 한다는 논리. 전자가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의 논리라고 한다면, 후자는 전체주의적 다문화주의의 논리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7. 그런데, 한국은 우습게도 묘하게도 복잡한 상황인 것 같다. <미수다>에서 에티오피아 출신 메자가 흘렸던 눈물의 의미를, 그리고 그 눈물이 미디어 담론에서 전유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해보자. 메자는 자신이 흑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국 사회에서 사회경제적으로 또 사회문화적으로 박탈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던 경험을 회고하면서 눈물을 쏟았다.
8. 이는 한국사회에서 관행화된 인종주의적 시선과 행위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한국 사회는 아직 멀었다(South Korea unlearned). 확실히 다문화주의가 필요한 것 같다.
9. 그런데 이 문제를 다뤘던 조선일보 사설을 잠시 살펴보자. 여기서 사설은 다문화주의 인식과 정책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너무나 옳은 말이다. 그런데 다음의 언설들을 보면서 이 논의가 가지는 함축적 의미에 대해 곱씹어보자.
10. "선진국 사람들은 그들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한국 사람들이 동남아인이나 흑인들을 얕잡아보는 걸 보면서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외국 문화에 대한 개방성' 부문 평가에서 한국은 55개국 가운데 꼴찌." "자라나는 아이들마저 인종차별의 편견에 물들어서는 세계가 한 동네 한 식구마냥 섞여 살 미래 세계의 지도자로 커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이 문장들은 무언가 컴플렉스한 듯하지만, 분명하게도 가장 민족주의적이다.
11. 모순적이지 않은가.라몬 그로스포구엘 같은 경우, 세계화 정세와 관련하여 하위주체적 인식론(subaltern epistemology)의 중요성을 말한 바 있는데, (새삼스럽기는 하지만) 인종차별에 대한 미디어의 인식론적 출발점은 철저하게 지배문화 위주로 구축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2. 따라서, 어두운 전망. 인종주의 지형에서 한국사회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사회적 상호작용에서의 유색인종에 대한 사회문화적인 배타성으로 드러나고, 이차적으로는 그에 대한 대응담론이라고 해봤자 이주민들에 대한 포섭 전략은 민족적 중심성에 기반해 있다는 점이며, 마지막으로 이러한 흐름이 종국에는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나 전체주의적 다문화주의라는 뻔한 귀결로 치달을 것이 명약관화하다는 점이다. 물론 당장에는 (소수자적) 이주민들에 대한 기본권이라는 것이 급선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 블로그홈 대문에 올라간 기념으로 덧붙임.
- 어쨌든 커스티가 호주에 인종차별은 거의 사라졌다는 항변은 메자의 눈물 덕분에 나름대로 정당화된 분위기로 흘러버렸다는 사실도 빼먹을 수 없겠다.
- 커스티의 항변이 끝나자 거기에 대해 중국 출신의 은동령이 딴죽을 걸었다. 자기가 호주에 가봤더니 인종차별 분위기는 여전하다면서 말이다. 이런 반론을 통해서 다문화사회의 신인종주의에 대해 자칫 논의의 심도가 깊어질 수도 있는 흐름이었는데, (편집의 효과이기도 하겠지만) 갑자기 메자가 눈물로써 자신의 인종차별 경험을 증언하면서 그 흐름이 완전히 역전돼버렸다.
- 그게 어떤 역전이냐... 위의 첫 번째 캡처화면에서 울고 있는 메자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커스티에 주목해보자. 그 시선의 구도! 한국의 인종주의가 초점화됨으로써 호주의 인종주의는 면죄부를 얻는다. 즉, 한국의 저급한(?) 인종주의와는 마치 질적으로 전혀 다른 것처럼 포장됨으로써 인종주의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 같은 느낌을 부여받는다. 다문화주의를 가진 인종주의가 다문화주의 없는 인종주의를 통해서 도덕적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이다. 신인종주의의 구인종주의에 대한 도덕적 우위. 그리고 자기 동일성의 유지.
- 철저하게도 이것은 환상이다. 왜냐... 다문화주의는 휴머니즘을 자극하고 도덕적 가치체계를 동원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규범적 논리이기도 한데, 저러한 시선의 구도 속에서 강조되는 규범이란 피부색에 대한 말초적이고 즉각적인 차별 행위만을 억제할 뿐이다.
- 그러는 사이에 두 가지 문제가 은폐된다. 첫째, 서구 다문화주의 국가(의 변이태)들에서 심각하게 노출되고 있는 제노포비아나 관용의 정치가 정당화된다. 둘째, 사회담론의 문제설정 자체가 인종주의 틀 안에 정박됨으로써 현재 정세에서 정작 문제 삼아야 할 착취, 불평등, 불의 등등의 문제가 봉합되어버린다(덧붙이자면 필연적으로 인종적 위계를 따라 형성될 수밖에 없는 노동의 분할까지도). 요컨대, 다문화주의는 마치 인종주의가 없는 것처럼 상연되는 신인종주의/신자유주의 문화논리이다. 이것이 바로 다문화주의 판타지의 실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