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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비정규직 노동자의 평균임금을 말하는 88만원은 우리 시대 청년을 표상하는 말로 굳어졌다. ‘88만원 세대’가 굳이 그 즈음에 달하는 임금생활 청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폭넓은 의미에서 그러한 평균 임금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지금의 20대를 88만원 세대라 부르고자 한다.
이따금씩 나는 묻곤 한다. 그대는 88만원 세대인가. 그들은 대답하길 주저한다.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만 보면, 그렇긴 하지만 그러기 싫어하는 눈치기도 하다. 여기서 일종의 거리가 발생한다. 누구 하나 “그래, 내가 88만원 세대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주저주저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바로 여기서부터 88만원 세대가 탄생한다. 88만원 세대는 단순히 경제적 위기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88만원 세대는 그들 자신의 실천적 관행으로부터 완성된다. 그 시작은 바로 88만원 세대 되기를 온몸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88만원 세대 되기를 거부함으로써 그들 세대의 현실이 유지되는 역설, 88만원 세대가 아닌 것처럼 행동하기란 그래서 역설적이다.
그들은 일상적 실천을 통해서 88만원 세대임을 몸소 거부한다. 어떤 이는 88만원 ‘이상’을 꿈꾼다. 정규직이 되기를 희망하고 고임금 수령자가 되기를 희망한다. 또 어떤 이는 88만원 ‘바깥’을 꿈꾼다. 취업자가 되기를 꺼려하고 자유로운 영혼이 되기를 공상한다. 오늘날 청년의 대다수가 바로 이 양자택일의 선택지 하에 놓여 있다. 쳇바퀴의 안으로 들어와 1등 주자가 되거나 새장 밖으로 나가 바람의 아들딸이 되거나 말이다. 이는 애초에 질문이 두 가지였기 때문이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적응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정말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던진 질문이기에, 이것이 오늘날 문화적 환경에서 도출될 수 있는 가장 뻔한 질문일 수 있다는 의심은 추호도 없다.
이러한 자문자답(혹은 답이 이미 정해져 있는 질문)이야말로 88만원 세대가 생산되는 문화적 실천의 일차적인 메커니즘이다. 절망적 현실을 견뎌내면서 돌파하고자 하지 않는 이상, 88만원 세대는 계속된다. 이게 바로 ‘88만원 세대’의 첫 번째 정식이다. 88만원 세대는 끊임없이 부정되지만, 그에 아랑곳없이 끝까지 살아남아 유령처럼 오늘날 청년들의 발목을 붙잡는다.
생존을 위한 ‘자기계발’: 현실에 순응하는 개인 차원의 문화실천
생존과 적응에 관한 희망의 원칙을 쫓아가다 보면 하나의 통과 의례를 만나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지갑이나 서랍 속에 들어가는 첫 번째 자격증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이력서에 올라가는 토익 점수가 될 수도 있으며, 또 누군가에는 동아리 시절 고학년이 되면서 맞이하게 되는 임원 역할이 될 수도 있다. 어떤 것이 됐건 오늘날 청년이 88만원 세대로서 문화적 실천을 수행하는 생애 첫 번째 경험이라는 것만큼은 존재한다.
믿으면 무릎 꿇어 기도하게 되지만, 무릎 꿇어 기도하면 믿게 된다. 영화 <밀양>의 여주인공은 우연히 받게 된 목사의 안수기도로 인해 열렬한 신자가 된다. 그녀는 단지 눈만 감았을 뿐이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이뤄졌다. 그들에게는 단 한 번의 고비가 중요할 뿐이었던 것이다. 이 통과 의례를 거치면 그/그녀는 88만원 세대를 만드는 사회의 충실한 공모자가 된다. 모든 것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것을 ‘스펙 쌓기’라고 부른다. 기실 그/그녀 자신이 MS-Office의 달인이라거나 영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한다거나 동아리를 실제로 좌지우지했다든가 하는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단지 그런 덕목에 가까운 인간인 것처럼 ‘연기’만 하면 될 뿐이다. 돌이켜봤을 때, 현대문명에서 우리 자신이 단 한번이라도 연기하지 않는 순간이 있었던가. 그런 까닭에 ‘스펙 문화’는 단순히 시장 상황에서 기술적 숙련성이 있음을 증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요컨대 그것은 연기 자격증이며, 연기 점수며, 연기 경력이다. 시대의 원리를 형식적으로 수행(performance)하는 것이 중요할 뿐, 내용적으로 체화하는 것은 부차적이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자기를 계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가 됐다. 88만원 인생으로 몰아가는 세상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스펙과 경력 등으로 어필할 수 있는 자기계발(self-empowerment)이 최우선의 덕목인 것이다. 그런데 생존을 위해 시작한 자기계발이라 하더라도, 한번 이 굴레에 들어서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다. 마치 게임이나 도박이 첫 판에 껴드는 게 어려울 뿐 한번 시작하면 끝내기가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일단 첫 번째 의례가 마무리되면 몇 가지 관문들이 더 기다리고 있다. 자격증, 토익․토플 성적, 동아리 경험 등은 상대적으로 말랑말랑한 스펙이다. 학원을 다니거나 mp3를 구해 듣기 점수를 올리고 동아리에 가입하는 등의 실천은 별반 어려울 게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런 식의 자기 스펙이 평범하다고 깨닫는 순간, 바로 그때부터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된다. 이제는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외부 세계로 눈을 돌린다.
우리 사회는 지금 두 가지 인재를 요구한다. 창의적 인재와 사회적 인재. 그러므로 쇼는 계속 되어야 한다. 그들은 창의성과 사회성을 증명하는 서류를 발급받기 위해 불철주야로 고심한다. 요트 같이 서민으로서는 범접하기 어려운 자격증을 취득하는가 하면 자원봉사활동 등을 통해 사회성을 보증하는 경력증명서를 획득한다. ‘득템,’ 이것은 단순히 온라인 게임 용어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한글판 <위키 백과>에 88만원 세대 관련 용어로 ‘신자유주의’가 가장 윗줄에 수록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88만원 처지를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몸부림은 결국 철저한 신자유주의적 인간이 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종종 88만원 세대가 신자유주의적 사회 체제에 희생양처럼 여겨지곤 하지만, 정작 그들 자신이 신자유주의 체제에 가장 적극적인 공모자로 변모하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다. 그런고로, 바로 여기서 88만원 세대에 관한 두 번째 정식이 나온다. 그들은 ‘개인적인 것’(the individual)의 문화적 실천을 통해 신자유주의에 가담한다.
‘자아찾기’와 ‘이웃 돌보기’: 세대적 현실을 완성하는 사회적 문화실천
물론 모두가 개인적인 것에 몰입하고 자기계발에 열을 올리는 건 아니다. 이치상 모든 이가 취업에 목매달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모든 이가 욕망의 노예 신세로 전락하란 법도 없다. 시대가 쥐어짜는 아귀힘이 강할수록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거기서 빠져나오는 예외적 인간들이 존재한다. 아귀를 (자발적으로) 빠져나온 그/그녀는 어느 순간 성찰하기 시작한다. ‘이것 봐라? 현실에서 예외는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은가?’ 그리하여 그들은 88만원 세대의 바깥을 공상하고 탐색한다.
자기계발 문화가 무르익을수록 그에 대한 반발로서 성찰적 자아를 찾으려는 노력도 커진다. 자기계발이라는 게 애초에 자신의 본래 욕구였는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삶의 조건 속에 규정된 요구였는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구(need)와 남의 요구(demand) 사이의 격차를 조금이라도 눈여겨본 사람이라면 방황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그/그녀는 묻는다. 나의 욕구와 세상의 요구는 왜 근본적으로 불일치하는 것일까. 왜 나는 돈 버는 게 최고라는 부모의 요구에 시달리는 걸까. 왜 나는 그 요구를 듣기 싫은가. 왜 나는 (혹은 나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그들이 원하는 삶의 경로(life-course)에 매혹되는 걸까. 왜 나는 거기서 갈등하는가. … 왜 나는 그 어디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걸까.
그리하여 어느 순간 삶의 뻔한 경로를 이탈하는 것이 하나의 문화적 관행으로 자리 잡히고 있다. 산업화 물결 속에 태어났던 향정신성 청량음료 ‘박카스’가 “한 게임 더?”라고 종용하며 최후의 순간까지 고단한 노동력을 뽑아내던 시절은 이미 끝이 나고 있다. 대신 국토대장정이라는 명목으로 성인(聖人)의 고행 길을 연상케 하는 전국일주가 시작되고,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한편 박지성과 정대세의 만남을 통해 민족통일을 고민하는 풍경들이 재현되고 있다. 배낭여행과 어학연수가 지배적이던 해외여행에도 순교자의 성지 순례 같은 새로운 프로그램이 유행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상적 조건 너머로 어떤 실재를 향한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사유와 질문들, 그리고 연이은 수행들이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자기계발 문화와 근본적으로 단절하고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예컨대 ‘프랭클린 플래너’가 압축해놓고 있듯이 개인적인 문화실천을 종용하는 오늘날의 자기계발 문화는 자기 삶의 행복, 성취감, 가치, 사명 등 신체적․감정적․지적․영적 단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기계발의 문화적 실천에 대한 반발로부터 돌출된 자아찾기(self-exploration)의 열풍은 좀 더 개인적이지 않은 것 쪽의 방향으로 이끌리게 된다. 개인적이지 않은 좀 더 사회적인 것 쪽으로 말이다.
사회 전체적으로 보자면, 개인적인 것의 실천 와중에도, 세상이 정글처럼 무질서해질수록 사회를 보호하려는 노력은 그만큼 커진다. 그런 까닭에 사회를 보호하고자 하는 그/그녀에게 지도 바깥을 헤매는 탐험가(이자 자원활동가) 한비야나 부를 축적하는 데 연연치 않는 CEO 안철수 등은 시대의 표상이 된다. 이들은 자기 존재에 결코 머무르는 법이 없다. 딱한 처지의 타인을 도우면서 자기 의미를 찾고 개인적 성공을 사회에 환원하고자 노력한다. 이런 식으로 이들은 사회적 관계를 끌어안았을 때 오히려 가장 창의적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몸소 실현한다.
바야흐로 ‘사회적인 것’(the social)의 문화실천이 우리 사회에 중요한 풍경으로 부상하고 있다. 중고등학생들은 (입시 규율 때문에라도) ‘자발적으로’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심지어는 빠순이인 줄로만 알았던 팬덤들도 국내외의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자선바자회를 열면서 주변의 소외된 이웃을 돌보고 있다. 실제로 88만원 세대들의 이력은 이전 세대들에 비해 특이할 정도인데, 10대 시절부터 자원활동을 경험하면서 사회적인 것을 실천하는 주체성을 형성해왔다는 점 때문이다.
정치적 실천을 위한 길

우리는 사회적인 실천을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곤 한다. 게다가 요즘처럼 지배층이 사회(Society)를 파괴하는 시기에는 사회적 실천이 도덕적 정당성마저도 획득한다. 그러나 사회적 실천은 그 자체로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이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며 거부할 수 없는 이치다.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민간 차원의 사회적 실천이 급증한다는 것은 반대급부적으로 국가 차원의 사회안전망이 후퇴했다는 의미와 통한다. 88만원 세대가 자아찾기와 사회적 실천을 통해 ‘나는 이 세계의 현실과는 다른 사람이야’라고 상상하는 동안, 개인들을 나락으로 빠뜨리고 벼랑 끝으로 내모는 신자유주의적 시장주의 논리는 자기 생명을 연장한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에게 이는 얼마나 호재인가. 배제되고 곤궁해진 존재들을 스스로 치유하고 달래주고 있지 않은가. 바로 여기서 88만원 세대에 관한 세 번째 정식이 나온다. 88만원 세대는 ‘사회적인 것’의 문화적 실천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버전업에 가담한다.
그런 까닭에 자아찾기로부터 시작하는 사회적 실천은 자기계발로부터 시작하는 개인적 실천과 근본적으로 연속선상에 있다. 사회를 ‘복원’하고자 하는 실천이 역설적으로 88만원 세대를 존속시키는 또 다른 함정이라는 말이다. 자기계발의 실천이 생존이라는 명목으로 88만원 세대를 양산하는 사회체계에 가담하는 것이라면, 사회적 실천은 아무도 남을 돌보지 않는 신자유주의를 대신해 자발적으로 이웃을 돕고 봉사함으로써 현재의 사회체계를 보조한다. 그 사이에 남을 돌보지 않는 지배층은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리스크를 88만원 세대의 시대적 사명으로 떠넘긴다. 요컨대 사회적인 문화실천이 88만원 세대의 현실을 치유하는 데 상상적 도움이 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은 체계 자체를 표적으로 삼는 실재적 공략은 될 수 없다.
물론 우리는 저들과 달리 당연히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살아야 한다. 자기계발에 목매달고 사는 것보다는, 성찰을 통해 자아를 희구하고 불행한 이웃을 도움으로써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88만원 세대의 현실을 지양하는 데에는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사실 또한 명확하다.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비정규직과 저임금이라는 현실은 너무나 객관적이고 또한 규정적인 조건이다. 때문에 이러한 현실에 대한 공세, 즉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를 문제 삼고 불가능할 것 같은 기획(예컨대 체제 변혁 같은)을 결행하는 또 다른 정치가 요구될 따름이다.
그리하여 88만원 세대에게는 늘 물음표가 붙는다. 그들은 과연 얼마나 정치적인가. 가장 바람직한 응수는 그들 자신이 정치적 요구를 바꿔내는 것이다. 자기계발, 자아찾기, 사회복원 등 그 어떤 것도 아닌 다른 언어로, 그들 자신의 힘으로써 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간에 알려진 88만원 세대의 정치 성향은 전망을 불투명하게 만든다. 그들 자신이 직접 정치에 뛰어드는 수밖에는 없는데, 정작 그들은 정치를 반기지 않는다. 이 악무한의 역설을 어떻게 끝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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