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루카치를 만나다!

    문화이론을 정리해 나가는 여정 속에서 2차 문헌을 통해 소개된 이론가나 사상을 원전으로 확인하여 보다 심오한 의미와 논의를 쌓아가는 일은 연구자로서의 당연한 임무라 생각한다. 이론영역에 국한되기는 하지만, 17-18여년을 개인적으로 혹은 세미나를 통한 집단학습을 통해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는 멘토로서 본받을 사람도 있었지만 ‘세미나 날라리’도 많이 보았다. 이들과의 동행 속에서 ‘지적 성실함’이라는 공부하는 자세를 배우게 된 것은 또 다른 수확이었다. 일종의 근본주의라고나 할까! 이론의 원류를 찾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발견하고 확인하는 작업은 스스로에게 튼실한 이론적 기초를 다지게 했을 뿐 아니라, 지식시장에서 비교우위를 점하게 하는 경쟁력 있는 자원이기도 했다.

    맑스주의 문화이론을 공부하면서, 루카치의 이론을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루카치의 이론이라기보다는, 그에 대한 간략한 비평문을 이러저러한 문헌을 통해 접할 수 있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네오맑스주의자, 총체성과 이데올로기, 노동자계급의 의식적 투쟁에 대한 남다른 강조, 브레히트와의 미학 논쟁 등 그를 둘러싼 논의들을 2차 문헌을 통해 자주 접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 번도 루카치 이론을 정리해보겠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던 터라, 맑스주의 문화이론의 정리에 있어 언제나 이론적 공백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결국, 맑스주의 문화이론 세미나를 하면서 첫 번째 이론가로 루카치를 설정함에 따라 그 결함을 채울 수 있게 되었다.『역사와 계급의식』이라는 루카치의 대표 저작을 공부하게 된 것은 늦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정리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맑스주의 문화이론이라는 폴더에 또 하나의 자료가 덧붙여지면서 한층 업그레이드되었기 때문이다.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루카치가 다루고자 하는 핵심 논의는 역사의식 혹은 계급의식으로서의 노동자계급이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혁명적 특성을 부르주아계급 이데올로기와의 비교 속에서 규명하는 일이다. 이는 마치 맑스가 당대에 출현한 다종다양의 사회운동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정확히 반영할 수 있고 그들의 역사적 책무의 중핵이 어떤 조건 속에서 설정될 수 있는가를 밝히기 위해 치열한 이데올로기 논쟁을 벌인 결과 비견된다. 루카치 역시 당대에 출몰한 다양한 이데올로기들, 특히 노동자계급의 혁명의식을 표방한 속류 맑스주의나 수정주의 혹은 기회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일면적 계급의식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면서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의식을 변별해 내고자 한다.

    루카치에게 있어 계급의식이란 생산과정에서의 특정한 유형적 상항에 귀속되는 합리적으로 적합한 반응을 의미하며, 계급 구성원이 생각하는 관념의 단순 총합이 아닌 총체성으로서 그들의 역사적 실천을 이끄는 추동력이다. 지배계급의 무자비한 폭력 속에서 벌이는 계급간 생존투쟁이야말로 계급의식의 문제가 궁극적으로 결정적인 계기임을 드러낸다. 루카치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의식이 갖는 특이성을 총체성 속에서 찾는다. 이때 총체성은 개인의 심리적 상태나 일상생활 속에서 갖는 일차적 감각들이 아니다. 그것은 객관적인 경제적 총체성에 귀속되는 계급의식인 것이다. 총체성으로서의 역사인식을 통해 대중은 특정한 생활상황과 이 상황으로부터 생겨난 이해를 직접적 행동과 관련해서뿐 아니라 전사회의 구조와 관련해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인식이란 개별 의지들과 동기의 배후에 있는 원동력, 즉 역사적 변혁을 이끄는 실천의 원천을 규명하는 가운데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총체성에 대한 인식은 프롤레타리아트 해방투쟁이 더 이상 유토피아적이지 않고 객관적으로 가능하다는 점을 입증한다.

    총체성의 인식을 통해 역사적 사실들을 현실적으로 개념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 역사적 과정 속에서 그것들의 현실적 뜻과 그것들의 현실적 기능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제공된다. 또한 그것은 역사적 개별사건들의 단순한 기계적 합이 아니거니와 개별적인 역사적 사건들을 넘어서는 초월적 고찰원리, 따라서 독자적인 분과과학을 매개로 해서만 타당성을 얻을 수 있는 고찰원리도 아니다. 루카치에게 총체성의 인식은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역사적 힘이다. 루카치는 총체성 범주의 부재가 끼친 영향으로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서 행하는 기계의 기능을 기계 자체의 개체성의 영원한 핵심인 양, 또 분리될 수 없는 성분인양 날조하여 이러한 성질을 기계 자체에 부과하는 부르주아 경제학을 사례로 든다. 총체성으로서 역사 인식은 인간과 환경 간의 교류를 매개하면서 인간의 내적, 외적 생활을 규정하는 구조형식의 변화를 이끈다.

    루카치는 직접성과 매개 범주의 변증법적 통일을 통해 총체성의 인식을 구체화한다. 즉, 직접성과 매개는 하나의 변증법적 과정에서의 계기이며, 직접성의 극복은 보다 높은 수준에서 대상들을 구체화하는 방향 속에서 매개들의 개념체계가 경험의 총체성으로 나타나게 된다. 단순한 직접성으로부터 거리를 멀리 할수록, 대상들의 연관들의 망이 넓힐수록 총체성은 충만해진다. 총체성의 인식은 주어진 대상들의 현존재의 직접성을 극복하는 데에서 그 극복의 장이 되고 통로가 되는 매개형식들의 대상 자체의 구조적 구축원리이자 그것들의 실재적 운동경향을 제시한다. 또한 부르주아 사회의 제반 대상들에 필연적으로 부과되는 내재적 뜻들이 객관적으로 출현할 수 있도록 하고 이를 프롤레타리아트 의식 속으로 배양될 수 있게 한다.

    루카치는 노동자계급의 역사인식을 특징화하기 위해 부르주아 사상을 비교분석한다. 그에게 있어 부르주아 사상은 역사과정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현재의 조직형태를 영원한 자연법칙으로 파악하는 것으로 비판된다. 부르주아 사상은 모든 뜻있는 것, 모든 목적 지향적인 것을 역사과정에서 제거하여 인간들 사이의 관계로 파악되어야 할 대상을 단순한 형식으로 파악한다. 루카치는 사물들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사회ㆍ경제적 생활을 사물화 된 대상성으로 파악하는 부르주아 사상에 대해, 자본을 사물이 아니라 매개된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로 파악하는 맑스를 대비시킨다.

    루카치는 자본주의에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순수한 계급이고 기타 계급(소부르주아, 농민)은 생산과정에서 그들의 상황으로부터 생기는 이해관계 때문에 계급의식의 발생이 방해받는다고 보았다. 부르주아지는 생산과정에서 생기는 이해관계를 통해 계급의식이 촉진된다. 하지만 자신 자신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모순에 빠지는데, 자본주의적 생산 질서의 객관적 한계는 단순히 의식에 의해 파악할 수 없는 위기를 객관적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독자적인 역사적 형태, 바로 프롤레타리아트를 생산하다는 사실로 인해 자기모순을 가속화시킨다. 또한 사유재산으로서의 자본의 기능과 자본의 객관적, 경제적 기능은 서로 해소할 수 없는 변증법적 모순상태에 빠뜨린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의 객관적 한계는 부르주아지의 계급의식을 한계 짓는다.

    한편, 루카치는 노동자계급의 역사인식의 발전을 변증법을 통해 규명한다. 그에게 있어 허위의식은 역사적 총체성의 계기로서, 그것이 작용하는 역사과정의 단계로서 설정된다. 허위의식은 주관적으로는 사회역사적 상황으로부터 정당화되는 것, 이해될 수 있고 이해되어야 하는 것으로서의 진실한 의식이면서, 객관적으로는 사회발전을 적절히 표현하지 않는 의식인 것이다. 하지만 허위의식은 왜곡된 의식이기 때문에 폐기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경제적 구조를 투사하고 있기에 변증법적 지양에 필수적인 하나의 단계로 보아야 한다.

    루카치는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전자본주의사회에서는 계급들 자체가 사적 유물론의 역사해석을 매개로 해서만, 직접적으로 주어진 역사적 현실로부터 나올 수 있었던 데 반해,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계급들이 직접적으로 역사적 현실이 된다. 특히 역사의 원동력으로서의 경제적 계급이해가 자본주의에 와서 적나라하게 나타남에 따라 全사회를 경제적으로 완전히 관통하는 최초의 생산 질서가 출현하게 되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의 배후에 있는 참된 원동력은 전자본주의사회에서는 결코 순수하게 의식될 수 없었지만,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경제적 계기가 의식의 배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속 자체 속에 존재하게 된다.

    루카치는 혁명적 역사인식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진리란 승리를 가져오는 무기이며 그들만이 사회 본질에 대한 정확한 통찰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 역사의 추진력의 본질을 이루고 중심적으로 행동하면서 사회발전의 중심에 선다. 이때 사회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적 성숙도, 곧 계급의식에 달려 있다. 이와 같은 주장의 근거로서 루카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갖는 존재론적 우월성을 다음과 같이 논의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를 중심으로부터, 연관되어 있는 전체로서 관찰할 수 있으며 따라서 현실을 변혁하면서 중심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점, 그들의 계급의식에서는 이론과 실천이 일치된다는 점, 그 결과 그들은 의식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적인 요인으로서 역사발전을 위해 투입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존재론적 우월성은 계급사회 일반을 폐지하지 않고서는 계급으로서의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는 최후의 역사적 존재이며, 따라서 사회의 본질을 폭로한다는 것 자체가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통일임에 있다. 문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성숙하고 자신의 계급상황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그 과정 속에서 수많은 고통을 견디어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사회변혁을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역할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루카치에게 있어 변화에 대한 당위론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즉, 존재의 불변적 형식으로서의 자연기계론을 고수한다거나 존재와 당위를 엄격한 이원론으로 분리시킨다거나 존재와 당위의 대립을 부정하지 못할 경직성으로서 수긍하는 일은 비판된다. 이와 더불어 현존 역사의 모순을 회피하는 탈출구로서 무한 누진적 논리를 전개하여 모순의 지양을 불가능하게 한 부르주아 사상과 존재와 당위 사이에 단순히 가상적, 외적 결합이 지니는 비합리성과 사실성을 방임함으로써 역사의 현실적 주체인 발생과 소멸을 규명 못한 헤겔도 비판된다.

    루카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이 현실적으로 분열되어 있음을 지적하면서 그 극복방안을 모색한다. 그는 이러한 분열의 원인으로 제 관계의 자본주의적 사물화를 자연적 환경으로 수용하고 사회를 총체성이 아니라 상호 독립적인 사물들 및 힘들의 분리된 경험 속에서 인식하는 데서 찾는다. 특히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분리는 시급히 해결해야 될 과제가 된다.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 속에는 직접적 이해관계와 궁극목표와의 변증법적 모순, 개별적인 계기와 전체와의 변증법적 모순이 문제가 된다. 비판이 총체성을 목표로 하지 않을 때에는 소부루브주아 근성에 굴복하게 된다. 이에 루카치는 모든 경제투쟁은 본질상 정치투쟁으로 전화되어야 하고, 노동자계급의 궁극적 해방을 위한, 곧 임금제도의 궁극적 폐지를 위한 하나의 지렛대로 써야만 한다는 맑스의 논의를 끌어들인다. 그런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에 맞서서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계급이 되지 않으면 않된다.

    루카치는 독일 비판철학을 통해 부르주아 사상의 사물화 된 의식구조를 입증한다. 이를 통해 그는 현실에서 발견되는 사유형식, 행위형식에 대해 단지 그 가능성 조건만 지적하는데 그친 인식론적 문제설정을 극복하고, 사물화 된 주체의 분열상, 그 주체에 마주하는 객관의 경직성과 불투명성을 타파한다. 이 속에서 루카치는 헤겔의 변증법을 통해 주체의 통일성을 구상한다. 헤겔은 정신과 물질, 영혼과 육체, 믿음과 오성, 자유와 필연의 형식 아래에서 이성과 감성과 같은 제반 대립들이 교양의 과정에서 절대적 주관성과 절대적 객관성이라는 대립의 형식으로 이행되고 이러한 고정불변의 대립을 지양하고자 했다. 또한 헤겔은 변증법적 과정이 경직된 형식들의 대립의 해소가 본질적으로 주체와 객체 사이에서 이루어진다는, 즉 진리가 단순히 실체로서만이 아니라 또한 주체로서 파악될 때, 주체가 동시에 변증법적 과정의 산출자이자 그 소산일 때, 따라서 주체 스스로 창조한 세계 속에서 이 세계의 의식적 형태로서의 주체가 운동하면서 동시에 이 세계가 주체에게 완전한 객관성으로 다가올 때, 주체와 객체, 사유와 존재, 자유와 필연들의 대립이 지양될 수 있음을 주장했다.

    한편, 루카치는 독일 비판철학의 역사 개념을 비판한다. 그는 한편으로 독일 비판철학이 역사 개념을 통해 철학적 토대를 이루게 될 사물들의 질서와 결합을 다루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발생과 역사의 결합에서 찾아지는 논리적 필연성이 충분하게 논의되지는 못했음을 비판한다. 즉, 역사적 생성에 관한 인식의 한계 혹은 역사를 인간 이성의 지양될 수 없는 영원한 한계로 설정한 태도 속에서 역사를 법칙체계의 형식 안에서만 파악하여 형식내용들을 불변적인 것으로 정의하려는 태도를 비판한다. 더 나아가 루카치는 헤겔의 역사 개념을 비판한다. 그는 발생을 자기 변화하는 내용들 자체의 논리적 토대로서 보고, 생성을 역사 속에서, 역사적 생성 속에서, 질적인 새로움의 끊임없는 성립 속에서 인식한 헤겔의 공로를 인정한다. 헤겔에게 있어 역사적 생성은 계기들의 자립성을 지양, 즉 자립적 계기를 현상의 질적 특성 및 새로움에 기초해 인식하도록 인도하고 단순한 구체적 일회성에 붙박이는 것을 막게 해준다. 또한 역사적 생성은 개념파악의 방법적 위상격인 내용의 역사적 세계의 구체적 총체성 또는 구체적, 총체적인 역사과정 자체를 이해하게 해준다.

    이론과 실천, 자유와 필연, 주체와 객체, 사유와 존재의 통일이란 사실상 사고규정의 발생과 현실생성의 역사가 통일되는 지점에서 충만해진다. 역사의 주체로서의 인간 행위는 곧바로 현실적인 역사가 된다는 뜻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루카치는 역사의 주체를 세계정신으로 설정하고 오직 인식활동 속에서만 절대적 진리를 지닐 수 있다고 본 헤겔을 비판한다. 결국 헤겔에게 역사는 절대정신에 이르는 전 체계 중에서 단순히 한 계기로 한정되고 변증법적 방법에 생명을 주는 역사 개념이 갖는 본래적 특성이 희석됨에 따라 이성과 역사의 연관은 우연적이 되고, 절대정신과 역사의 관계는 불명확하게 된다.

    루카치는 독일 비판철학의 방향전환을 전진시키는 일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넘겨진다고 본다. 그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 인식이란 사회발전의 목표에 대한 의식적 실현이며 사회의 본질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라 규정한다. 이로부터 사회와 역사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특수한 태도, 곧 그로부터 사회역사적 발전과정의 주객동일자로서의 본질을 규명할 수 있게 된다. 이에 대해 루카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지금까지의 모든 세계질서의 해소를 선언한다면 이는 오직 자신 고유의 현존재의 비밀을 발언하는 것일 뿐이라는 맑스의 언명과 연결시킨다. 루카치는 사회적 존재의 객관적 현실성은 그 직접성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게나 부르주아지에게나 똑같다고 본다. 다만 특수한 매개범주들이 똑같은 경제과정에서의 두 계급의 서로 다른 위치로 말미암아 근본적으로 차이가 날 뿐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 인식 속에서 한편으로 인간 현존재를 구성하는 범주들 전체가 인간 현존재 자체의 규정들로 현상하며, 다른 한편으로 범주들 전체의 순서, 연관, 결합이 역사과정 자체의 계기들로서 곧 현재의 구조적 성격으로 제시된다. 이 속에서 철학의 임무는 경험의 직접성 초월하는 것인데, 이때 경험의 대상들은 총체성의 계기들로서, 곧 역사적으로 자기 변화하는 전체사회의 계기들로 파악되는 한에서만 의미가 있게 된다. 경험의 단순한 직접성을 극복하는 방법적 지렛대로서의 매개범주는 대상들의 고유한 객관적인, 대상적인 구조를 드러낸다.

    루카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양질 전화와 관련하여 현존재의 직접성이 어떤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총체성의 인식으로 전화되는가를 규명한다. 처음에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적 사건의 순수한, 단순한 객체로 출현하지만, 이후 자신의 현존재의 직접성을 뛰어 넘는다. 즉,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전인격에 대항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노동력을 객관화시키며 노동력을 자기에게 속한 상품으로 판매하도록 강요받지만, 이러한 상황이 복잡다기한 매개들의 결과임이 밝혀지고 스스로도 직접성이 전제하는 모든 것들을 의식하게 되면서 비로소 상품구조의 물신적 형식을 타파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계급으로서의 자기 고유의 현존재를 출현시키기 위해서는 현존재가 갖는 허위의 현상형식들을 지양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요컨대, 루카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현존재의 직접성을 매개를 통한 변증법적 과정 속에서 총체성의 인식으로 나아간다고 본다. 이러한 루카치의 논의는 총체성이나 거대담론을 거부하는 각종의 포스트담론과 대척점에 놓인다. 하지만 루카치의 논의를 단지 거대담론의 하나로 분류하거나 비판하는 일은 섣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사회적 모순의 양태는 다양할지라도 그 숨겨진 실체는 보다 거대하고 일관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신자유주의를 표방한 다양한 양태들(규제완화, 사회복지의 축소, 노동 유연화, 가수요 창출)은 잉여가치 창출을 위한 자본의 운동이라는 실체로서 분석 가능하다. 따라서 루카치의 총체성 개념은 근대적 사유의 유령일 수 있지만, 탈근대적 사유를 통해 새롭게 구성되어야 할 개념이기도 하다. 특히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개념과 존재가 해체되고 새롭게 구성되는 상황에서, 변화의 핵심 고리를 찾아내는 일은 여전히 유효한 지적 과제라 하겠다. 아무튼, 풍문으로만 접했던 루카치를 직접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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