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삼 '매춘'이라는 말 - 햅.님과 와라님의 대화와 관련해서...
2009.03.23 05:02
0. 햅.님과 와라님의 대화에 나도 댓글을 보태려다, 얘기가 길어지는 것 같아서 그리고 장자연이란 배우로 인한 사회적 사건이라는 범위로부터 다소 벗어난 듯해서 별도의 포스팅으로 트랙백을 겁니다. ^^
1. 창녀와 매춘부: 창녀, 매춘부, 성매매여성 등등과 관련하여 성노동자라는 지극히 논쟁적인 말도 있는데, 어쨌든 여기저기서 정치적 입장에 따라 제각기 취하는 용어들이 다양한 것 같아요. 창녀와 매춘부라는 말은 해당하는 여성의 성판매를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에 의거한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와라님 지적처럼 성적 지배라는 사회적 관계를 은폐하는 효과가 있지요. 창녀는 알다시피 영화 제목처럼 노는 계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잖아요.
2. 성매매: 최근 이 바닥(?)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성매매라는 용어도 마찬가지로 문제적인데(저도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판매와 성구매라는 양자적 관계 속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입니다. 자유롭게 성을 판매하는 여성, 자유롭게 성을 구매하는 남성. 뭔가 꺼림칙하지요. 자유주의적 이념 하에서 이런 용어는 당연히 등가적인 교환관계를 함의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이들의 관계는 전혀 등가적이지 않죠. 그래서 이 용어 역시 실재를 포착하는 데에는 현실적 한계가 자명합니다.
3. 성노동: 그래서 일각에서는 성노동이라는 용어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햅.님 말처럼 포주와의 관계까지도 고려하면 지극히 타당하다고도 할 수 있죠. 물론 이렇게 '노동'이라는 말을 쓸 때는 한 가지 중요한 맥락도 반드시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개념 자체가 가지는 함의 때문에 우리가 매춘/성매매/성노동 등이라 부르는 그 어떤 것이 합법의 영역으로 기입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동료가 논문에서 성노동자라는 개념을 썼을 때, 지도교수조차 동의하지 않았고 여러 토론회 자리에서도 그녀의 입장에선 짐짓 부당할 수도 있는 비판을 감수해야 했지요.
4. 젠더적 용어들: 성매매나 성노동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이 사회적 행위가 구조화되어 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성적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기능 요건이 되는 셈이죠. 나아가 어떤어떤 행위를 문제시하고자 만든 이런 용어들은 외려 성적 관계의 지배 양식을 구조화하는 데 기여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관념을 상상하는 순간 세상의 지도가 그려지게 되잖아요. 따라서 관점에 따라서는, 성매매/성노동이라는 개념 역시 젠더적 관계에 여전히 포획되어 있는 상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성적 지배의 체계에서 '남성의 역할', '여성의 역할' 같은 의미들이 통용되면 통용될수록 젠더적 위계는 고정적인 것으로 상상되기 마련이죠.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말입니다.
5. 전제조건: 그래서 대안적인 용어를 위한다면 한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합니다. 고정된 성역할(gender role)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성매매나 성노동과 같은 개념들이 다양한 성적 지향과 실천을 포괄할 수 있다면 탈-젠더의 가능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겠죠. 성역할의 고정성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성노동자/성판매자와 같은 '중립적이고 중성적인' 용어들이 비교적 적합해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용어들 역시 노동이라는 생산관계, 매매라는 교환관계라는 자본주의적 사회 관계에 포획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현실의 관계 속에서는 여전히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성애주의적 문제설정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저로서는 여전히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습니다. 좀 더 급진적인 생각을 해볼 수 있다면 어떨까요? 가부장주의적인 젠더관계를 넘어서면서도 자본주의적인 생산관계(혹은 합리주의적인 교환관계)를 넘어서는 어떤 것을 상상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용어의 선택이라는 것은 매우 정치적인 문제이기도 하잖아요.
6. '매춘'의 모순: 그런 점에서 저는 '매춘'이라는 용어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춘은 앞서 말한 것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인 것처럼 상상시키는 효과를 가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젠더/생산/교환의 관계를 모두 넘어서는 위력 또한 잠재하고 있습니다. 청춘을 판다. 성역할의 문제인가요? 아니죠. 게다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나 합리주의적 교환관계로도 포착되지 않는 문제입니다. 물론 이러한 위력은 언제나 잠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매춘'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언제나-이미 현실적인 성적 지배의 맥락으로 과잉결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한계가 뻔하지만 동시에 잠재력도 무궁한 용어일 수 있습니다. 그 안에 숨은 모순 때문입니다. 이미 과잉결정되어 있지만 그 어느 것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모순입니다. 프랑스혁명의 자유-평등 이념이 자유주의 이념에 과잉결정되어 있으면서도 그 자체만으로 자유주의를 돌파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는 이념인 것과 마찬가지 맥락이죠.
7. 억압 이상의 어떤 것: 많은 경우 성판매/성노동을 구조적인 억압의 문제로 보지요. 맞습니다. 그러나 성판매/성노동 여성이 억압의 희생자이기만 한 거냐. 적지 않은 경우, 혹은 대다수의 경우 그런 건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가 착취 당하고 있다는 생각, 자기가 억압 당하고 있다는 생각. 그런 사회적 의식까지 도달하기란 쉽지 않지요. 그런데 우리가 당위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회적 의식이란 언제나 당연한 것일까요? 계급의식이니 하는 말들이 실재를 포괄할 수 있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죠. 우리가 노동 현장에서 노동 행위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가 뭡니까? 속류적인 생각에서는 노동자의식을 갖기 위해서라고 하지요. 그러나 즉자-대자적인 생각이란 것은 세계의식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보편적인 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여기서 노동이라는 것은 착취나 억압의 관계로 동일화되지 않는 새로운 인식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됩니다. 그 엄존하는 숱한 성적 억압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억압이라고 여길 수 있지 않는 데에는 뭔가 색다른 분석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8. 위험한 욕망: 매춘이라는 용어는 확실히 성적 지배나 성적 적대의 문제들로부터 자유롭기는 힘들지만, 고정적인 성역할을 상상하는 위험으로부터 구출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합니다. 우선 매춘은 일시적입니다. 자기 신체를 사회적 관계에 종속시키는 성판매나 성노동처럼 항상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신체의 일시적 기간(봄)을 파는 행위이고, 거기서 행위자는 능동적이기까지 합니다. 거기에는 어떤 위험한 욕망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죠. 매춘부나 양공주를 요녀, 마녀, 악녀로 둔갑시키는 사회적 담론들은 바로 이 위험한 욕망을 억압하고 은폐하는 장치일 따름입니다. 거기에는 사적 영역으로 국한되어 있는 사회적 생활양식을 돌파하고자 하는 에너지가 잠재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에너지라는 것은 체계적으로 왜곡되는 것이 현실이지만요. 만일 우리가 이것을 새롭게 의미화할 수 있다면, 그리고 보편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면 어떤 새로운 세계가 열리지 않을까요? 적어도 저는 그런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는 있습니다만.
9. '위험': 제가 위험하다는 표현을 쓴 데에는 응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일레인 킴이나 최정무가 '위험한 여성'이라는 표현을 썼을 때, 그리고 더 보태자면 발리바르가 '대중이 위험하다'고 의미했을 때와 마찬가지의 맥락입니다. 킴과 최가 말하는 위험은 그녀들의 욕망이 지배적인 사회체계 차원에서 보자면 위험하다는 의미이고, 그런 까닭에 억압 당하는 여성들의 처지가 위험해질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죠. 그런 이중성에 더하여, 발리바르가 대중을 두고 말한 위험에는 한 가지 맥락이 더 있습니다. 바로 대중 자신이 스스로의 발목을 붙잡게 되는 위험성이지요. 이것은 '위험'한 욕망을 가진 여성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사회적 생활양식을 돌파하고자 했던 어떤 욕망을 분출하다가 곧잘 그 귀결점이 체계의 또다른 양식들로 소급되는 그런 문제 말입니다. 예컨대 성적 억압을 벗어나고자 할 때, 쉬이 소비주의라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종속되는 경우가 그렇죠. 제가 이런 예를 들었다고 해서 여성이 소비에 빠져사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군, 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경제적 곤란을 벗어나고자 할 때, 쉬이 인격화된 사회적 책임자(예컨대 노무현이나 이명박)를 찾아내 단죄하려는 습성 역시 유사한 메커니즘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건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한계인데, 우리는 언제나 익숙한 어떤 것으로 회귀하게 되는 약함을 지니고 있죠.
10. 매춘의 위험성: 썰이 길어졌는데... 어쨌든 매춘이라는 말, 매춘부라는 형식 속에는 이러한 위험성이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어떤 문제의식인지는 잘 알지만, 우리가 어떤 도덕적 엄숙주의에 길들여져서 성매매 같은 표현을 썼을 때보다 정치적 파급효과가 훨씬 크다는 것이죠. 그 결과라는 것은 우리가 정세를 어떻게 판단하느냐, 그리고 거기에 어떻게 개입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새로운 지평이 개방되거나 아니면 파국으로 치닫거나 둘 중에 하나이겠죠. 만약 매춘이라는 말을 누구나가 공통적으로 쓴다면 말이에요. 반대로 성매매/성노동 등의 표현은 그 둘 간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성적 지배의 문제를 건드리는 데에는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 저의 조심스러운 판단입니다.
11. 위험한가요. 저의 이런 생각... 뭐, 어쨌든 아직 이렇다 할 정답은 없는 거 같네요. 어쨌든 우리 연구소에서도 페미니즘 문제에 대해 골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페미니즘 운동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이성(singularity, 독특성 혹은 단독성이라고도 번역하죠) 때문인데요. 보편적인 것의 구상이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1. 창녀와 매춘부: 창녀, 매춘부, 성매매여성 등등과 관련하여 성노동자라는 지극히 논쟁적인 말도 있는데, 어쨌든 여기저기서 정치적 입장에 따라 제각기 취하는 용어들이 다양한 것 같아요. 창녀와 매춘부라는 말은 해당하는 여성의 성판매를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에 의거한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와라님 지적처럼 성적 지배라는 사회적 관계를 은폐하는 효과가 있지요. 창녀는 알다시피 영화 제목처럼 노는 계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잖아요.2. 성매매: 최근 이 바닥(?)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성매매라는 용어도 마찬가지로 문제적인데(저도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판매와 성구매라는 양자적 관계 속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입니다. 자유롭게 성을 판매하는 여성, 자유롭게 성을 구매하는 남성. 뭔가 꺼림칙하지요. 자유주의적 이념 하에서 이런 용어는 당연히 등가적인 교환관계를 함의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이들의 관계는 전혀 등가적이지 않죠. 그래서 이 용어 역시 실재를 포착하는 데에는 현실적 한계가 자명합니다.
3. 성노동: 그래서 일각에서는 성노동이라는 용어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햅.님 말처럼 포주와의 관계까지도 고려하면 지극히 타당하다고도 할 수 있죠. 물론 이렇게 '노동'이라는 말을 쓸 때는 한 가지 중요한 맥락도 반드시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개념 자체가 가지는 함의 때문에 우리가 매춘/성매매/성노동 등이라 부르는 그 어떤 것이 합법의 영역으로 기입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동료가 논문에서 성노동자라는 개념을 썼을 때, 지도교수조차 동의하지 않았고 여러 토론회 자리에서도 그녀의 입장에선 짐짓 부당할 수도 있는 비판을 감수해야 했지요.
4. 젠더적 용어들: 성매매나 성노동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이 사회적 행위가 구조화되어 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성적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기능 요건이 되는 셈이죠. 나아가 어떤어떤 행위를 문제시하고자 만든 이런 용어들은 외려 성적 관계의 지배 양식을 구조화하는 데 기여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관념을 상상하는 순간 세상의 지도가 그려지게 되잖아요. 따라서 관점에 따라서는, 성매매/성노동이라는 개념 역시 젠더적 관계에 여전히 포획되어 있는 상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성적 지배의 체계에서 '남성의 역할', '여성의 역할' 같은 의미들이 통용되면 통용될수록 젠더적 위계는 고정적인 것으로 상상되기 마련이죠.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말입니다.
5. 전제조건: 그래서 대안적인 용어를 위한다면 한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합니다. 고정된 성역할(gender role)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성매매나 성노동과 같은 개념들이 다양한 성적 지향과 실천을 포괄할 수 있다면 탈-젠더의 가능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겠죠. 성역할의 고정성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성노동자/성판매자와 같은 '중립적이고 중성적인' 용어들이 비교적 적합해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용어들 역시 노동이라는 생산관계, 매매라는 교환관계라는 자본주의적 사회 관계에 포획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현실의 관계 속에서는 여전히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성애주의적 문제설정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저로서는 여전히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습니다. 좀 더 급진적인 생각을 해볼 수 있다면 어떨까요? 가부장주의적인 젠더관계를 넘어서면서도 자본주의적인 생산관계(혹은 합리주의적인 교환관계)를 넘어서는 어떤 것을 상상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용어의 선택이라는 것은 매우 정치적인 문제이기도 하잖아요.
6. '매춘'의 모순: 그런 점에서 저는 '매춘'이라는 용어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춘은 앞서 말한 것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인 것처럼 상상시키는 효과를 가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젠더/생산/교환의 관계를 모두 넘어서는 위력 또한 잠재하고 있습니다. 청춘을 판다. 성역할의 문제인가요? 아니죠. 게다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나 합리주의적 교환관계로도 포착되지 않는 문제입니다. 물론 이러한 위력은 언제나 잠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매춘'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언제나-이미 현실적인 성적 지배의 맥락으로 과잉결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한계가 뻔하지만 동시에 잠재력도 무궁한 용어일 수 있습니다. 그 안에 숨은 모순 때문입니다. 이미 과잉결정되어 있지만 그 어느 것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모순입니다. 프랑스혁명의 자유-평등 이념이 자유주의 이념에 과잉결정되어 있으면서도 그 자체만으로 자유주의를 돌파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는 이념인 것과 마찬가지 맥락이죠.
7. 억압 이상의 어떤 것: 많은 경우 성판매/성노동을 구조적인 억압의 문제로 보지요. 맞습니다. 그러나 성판매/성노동 여성이 억압의 희생자이기만 한 거냐. 적지 않은 경우, 혹은 대다수의 경우 그런 건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가 착취 당하고 있다는 생각, 자기가 억압 당하고 있다는 생각. 그런 사회적 의식까지 도달하기란 쉽지 않지요. 그런데 우리가 당위적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회적 의식이란 언제나 당연한 것일까요? 계급의식이니 하는 말들이 실재를 포괄할 수 있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죠. 우리가 노동 현장에서 노동 행위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가 뭡니까? 속류적인 생각에서는 노동자의식을 갖기 위해서라고 하지요. 그러나 즉자-대자적인 생각이란 것은 세계의식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보편적인 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여기서 노동이라는 것은 착취나 억압의 관계로 동일화되지 않는 새로운 인식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됩니다. 그 엄존하는 숱한 성적 억압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억압이라고 여길 수 있지 않는 데에는 뭔가 색다른 분석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8. 위험한 욕망: 매춘이라는 용어는 확실히 성적 지배나 성적 적대의 문제들로부터 자유롭기는 힘들지만, 고정적인 성역할을 상상하는 위험으로부터 구출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합니다. 우선 매춘은 일시적입니다. 자기 신체를 사회적 관계에 종속시키는 성판매나 성노동처럼 항상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신체의 일시적 기간(봄)을 파는 행위이고, 거기서 행위자는 능동적이기까지 합니다. 거기에는 어떤 위험한 욕망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죠. 매춘부나 양공주를 요녀, 마녀, 악녀로 둔갑시키는 사회적 담론들은 바로 이 위험한 욕망을 억압하고 은폐하는 장치일 따름입니다. 거기에는 사적 영역으로 국한되어 있는 사회적 생활양식을 돌파하고자 하는 에너지가 잠재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에너지라는 것은 체계적으로 왜곡되는 것이 현실이지만요. 만일 우리가 이것을 새롭게 의미화할 수 있다면, 그리고 보편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면 어떤 새로운 세계가 열리지 않을까요? 적어도 저는 그런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는 있습니다만.
9. '위험': 제가 위험하다는 표현을 쓴 데에는 응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일레인 킴이나 최정무가 '위험한 여성'이라는 표현을 썼을 때, 그리고 더 보태자면 발리바르가 '대중이 위험하다'고 의미했을 때와 마찬가지의 맥락입니다. 킴과 최가 말하는 위험은 그녀들의 욕망이 지배적인 사회체계 차원에서 보자면 위험하다는 의미이고, 그런 까닭에 억압 당하는 여성들의 처지가 위험해질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죠. 그런 이중성에 더하여, 발리바르가 대중을 두고 말한 위험에는 한 가지 맥락이 더 있습니다. 바로 대중 자신이 스스로의 발목을 붙잡게 되는 위험성이지요. 이것은 '위험'한 욕망을 가진 여성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사회적 생활양식을 돌파하고자 했던 어떤 욕망을 분출하다가 곧잘 그 귀결점이 체계의 또다른 양식들로 소급되는 그런 문제 말입니다. 예컨대 성적 억압을 벗어나고자 할 때, 쉬이 소비주의라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종속되는 경우가 그렇죠. 제가 이런 예를 들었다고 해서 여성이 소비에 빠져사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군, 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경제적 곤란을 벗어나고자 할 때, 쉬이 인격화된 사회적 책임자(예컨대 노무현이나 이명박)를 찾아내 단죄하려는 습성 역시 유사한 메커니즘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건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한계인데, 우리는 언제나 익숙한 어떤 것으로 회귀하게 되는 약함을 지니고 있죠.
10. 매춘의 위험성: 썰이 길어졌는데... 어쨌든 매춘이라는 말, 매춘부라는 형식 속에는 이러한 위험성이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어떤 문제의식인지는 잘 알지만, 우리가 어떤 도덕적 엄숙주의에 길들여져서 성매매 같은 표현을 썼을 때보다 정치적 파급효과가 훨씬 크다는 것이죠. 그 결과라는 것은 우리가 정세를 어떻게 판단하느냐, 그리고 거기에 어떻게 개입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새로운 지평이 개방되거나 아니면 파국으로 치닫거나 둘 중에 하나이겠죠. 만약 매춘이라는 말을 누구나가 공통적으로 쓴다면 말이에요. 반대로 성매매/성노동 등의 표현은 그 둘 간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성적 지배의 문제를 건드리는 데에는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 저의 조심스러운 판단입니다.
11. 위험한가요. 저의 이런 생각... 뭐, 어쨌든 아직 이렇다 할 정답은 없는 거 같네요. 어쨌든 우리 연구소에서도 페미니즘 문제에 대해 골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페미니즘 운동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이성(singularity, 독특성 혹은 단독성이라고도 번역하죠) 때문인데요. 보편적인 것의 구상이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댓글 6개
-
근디 내 플필 사진 마음에 들지 않나요? 캬캬 =0=
-
윤삼
2009.03.23 17:51
1. 나야말로 갑자기 관심을 가질 만한 글을 던져준 것에 대해 즐겁고 흥미롭고
2. 저 시간에 안 자고 뭐했는지는 글을 보면 알 거고
3. 좋긴 한데, 매춘을 멋진 표현이라고만 생각하진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고
4. 언제나 관심은 그럭저럭인 상태이니 몸둘 바를 모를 정도로 너무 업되지 마시길. ^^/ -
문강
2009.03.23 16:06
윤삼,
글 재밌게 읽었슴다. 뭔가 문제의식에는 공감이 가는데, 조금 허탈한 느낌도 드는 것은 왜 일까요. 용어의 사용맥락과 용어가 가진 정치적 함의가 강조되면서(물론 그게 이 글의 목적이겠지만) 말 그대로 '실재'가 사라져버린 느낌이랄까. 특히 8번에서 '매춘'이 가진 한자 의미만을 가지고 그걸 "행위자"의 "능동성"과 "위험한 욕망"을 반영하는 "일시적"인 행위라고 말하는 대목은 정말 동의하기 힘들어집니다(그러니까 매춘이라는 용어가 아무리 "봄을 판다"는 낭만적인 의미를 어원으로 가지고 있다 해도, 그 용어가 쓰이는 현실적 맥락 중 어디에서 그 '낭만성'을 찾을 수(혹은 연관시킬 수라도) 있는지?). 매춘이 "사회적 생활양식"을 돌파하고자 하는 여성의 "욕망"이라는 표현은, '노숙자'보고 '노마드적 욕망'을 가졌다고 하는 거랑 뭐가 다른건지 모르겠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이 무책임하게 댓글을 다는 것 같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매춘과 성매매 혹은 성노동 (용어가 뭐가 되었든)을 "욕망"과 연계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가 안 가네요. 좀 구체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을른지?? (그건 그렇고, 김연구원 잘 지내지?^^) -
윤삼
2009.03.23 17:17
문강,
"~슴다"라는 표현 때문에 혹시 K연구원이나 긴호흡님이 댓글을 단 건가 했는데, 형이었구료. 허탈한 느낌이 들었다면 반쯤 의도가 먹힌 거겠네요. ^^ 그리고 사실 반감도 조금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그래서 초큼은 논쟁촉발적으로다가 끄적여봤어요. 물론 매춘을 가지고 낭만주의적으로다가 잘 해보자 이런 게 아니란 건 잘 경계하지 않았나 싶기도 한데...
형이 "매춘이 "사회적 생활양식"을 돌파하고자 하는 여성의 "욕망"이라는 표현"이라고 듣고 그렇게 재-표현하면 전형적인 조선일보식 인용기법이라고 생각해요. ㅋㅋㅋ 깍쟁이~. 형의 댓글을 보고 욕망이란 표현이 좀 과한 게 아니었나 생각해보기도 하다가, 제가 욕망이란 말을 아주 제한적인 용법으로 쓰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선 '아주 초큼만' 과하다고 판단하게 되었어요. ^^ 왜냐면 매춘/성매매/성노동이라는 표현을 쓸 때 우리는 해당 여성들을 피해자로 간주하고 논의를 전개하는 데 익숙해져 있느데, 그런 사이에 (의도한 건 아니겠습니다만) 해당 여성이 가지는 구체적인 생애주기와 경로 등은 대체로 무시되고는 하지요. 그런 차원에서 욕망이라는 말은 '아주 초큼만' 과했고, 문제의식은 정당하다고 봐요.
제가 욕망이라고 얘기했던 건 노마디즘 등에서 말하는 욕망과는 좀 다르지 않나 싶은데요. 에컨대 노마드적 욕망은 들뢰즈가 푸코를 비판/보론하면서 얘기했듯이 종종 쾌락과 동시적으로/자동적으로 결합하잖아요. 그래서 거기에는 정치의 계기가 없다고들 비판도 많이 하구요. 그런데 제가 언급했던 '욕망'은 체계적으로 왜곡되고 다른 장치들에 의해 과잉결정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면 필연적으로 우리는 가상적 조건 하에서밖에는 살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욕망'이 대체 어떤 것인지 우리 자신은 알 수가 없죠. 오직 사후적으로만, 소급적으로만 넌지시 인지될 뿐인 거구요. 그래서 욕망이란 표현은 조금은 제한적으로 이해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물론 결코 완전하게 환원될 수 없고 완전하게 상징화될 수 없어서 어떤 잉여의 형태로 우리에게 왜상화되거나 비가시화될 수밖에 없다는 전제는 남겨두야겠지만요.
(문강도 객원블로거로 참여하는 게 어떨지... 팀블로거들끼리는 어느 정도 얘기는 해둔 상태이기도 하죠. 참, 책 나왔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구입해서 보도록 할게요. 나중에 귀국하면 사인이라도 좀 해주시고. ^^/) -
잘 지내요? 자주 오셔서 흔적 좀 남기고 그러시오~~~!! ㅎㅎ
연구소에 놀러오삼... ㅋㅋ







2. 대체 저 시간까지 안자고 뭐한겨?
3. '봄을 판다'라는 멋진 표현의 쓰임이 참 안타깝다는 생각과 포주(김씨나 이씨나)와의 관계에서 감정적으로 사용했음을 알려주고 싶고
4. 친절하고 세밀하게 관심을 가져주셔서 몸둘바를 모르겠음 ㅋㅋ 여기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군' 이라는 생각에 초큼은 달콤한 기분을 만끽했음 ㅋㅋ
XOX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