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연 [칼럼]황우석과 신우익주의-오마이뉴스
2006.02.25 21:59
황우석 팬덤은 어떻게 만들어 졌나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지난 1월 14일 광화문에는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실험 재연을 촉구하는 수천 명 지지자들의 촛불 시위가 열렸다. 한 손에는 희망을 상징하는 촛불을 받치고, 다른 한손으로는 애국을 표상하는 태극기를 흔들며 황우석 지지자들은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의 시발점이자, 탄핵 반대의 진원지인 광화문 거리를 황우석 재기를 염원하는 거리로 바꾸어버렸다. ‘사이언스’에 기고한 2편의 논문이 모두 조작되었고, 줄기세포 및 원천기술이 없다는 서울대 조사위원회의 최종 조사 발표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여전히 황우석 교수의 ‘전지구적인’ 원천기술과 ‘애국적인’ 고해성사를 굳게 신뢰하며, 한국 생명공학의 부활을 위해 고난과 핍박의 골고다 언덕 길을 걸어가는 그의 십자가를 기꺼이 함께 지려한다. 이들에게 MBC ‘피디수첩’은 예수를 무고하게 고발한 ‘유다’같았을 것이며, 서울대 조사위원회는 그를 못박게 한 ‘로마법정’같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만으로도 과학자로서의 신뢰가 소멸되었고, 국가적 영웅에서 검찰 조사를 기다리는 피의자로 전락할지 모르는 그에게 많은 대중들이 변함없는 지지를 보이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이러브황우석’ 다음까페에는 11만명의 회원이 건재하고 논문조작 사실이 밝혀진 이후에도 회원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방송과 언론이 어떤 사실을 보도하더라도 사태에 동요하지 않는 황우석 지지자들은 어떤 심념을 가지고 있을까? 한 과학자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일반화하기에는 황우석 지지자들의 행동은 정상적인 이성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정신 구조를 가지고 있어 보인다.
논문 조작 사태 이후 황우석을 공공연하게 옹호하는 지지자들은 외부 상황의 변화와 무관한 자신들만의 신념 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는 마치 대중 스타에 대한 팬들의 맹목적인 동일화 현상과 같은 우상화된 판타지를 연상케 한다. 스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오류에 대한 판단을 중지시키는 무조건적 관용, 자신의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집단심리의 동원와 같은 팬덤 현상들이 황우석 지지자들의 행동에서도 발견된다. 절대적인 신념체계를 가지고 있는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가 어떠한 반사회적 행동을 저질러도 기꺼이 그를 옹호하고, 그를 비난하는 여론들에 대응하는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다. 팬들에게 가치판단의 기준은 스타의 행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스타 그 자체에서 나온다. 팬들은 스타의 행동에 대해 가치판단을 유보하며, 오직 그의 활동 자체와 동일화하길 원한다. 그래서 일반인들에게는 아무리 사소한 것일 지라도 팬들에게는 소중한 것일 수 있으며, 윤리적으로 의문시되는 스타의 행동도 그들에게는 특별한 경험으로 치환된다. 스타가 유사종교적 지도자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는 것도, 그의 카리스마 때문만은 아닌, 팬들 스스로가 기꺼이 유사종교적 신도가 되길 자원하기 때문이다. 스타에 대한 절대적 판타지는 스타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팬들의 자발적인 동의와 동일화에서 나온다.
황우석 지지자들에게 그는 누가 뭐래도, 영웅이고 스타이다. 불과 몇 달 전만해도 황우석은 ‘과학한류’를 선언한 글로벌 스타이자, ‘줄기세포 한류’의 창시자였다. 더욱이 ‘PD수첩’의 방영 이전까지 모든 방송과 언론 대부분이 ‘과학한류 부흥회’의 주관 방송·언론사를 또한 자임하였기에 황우석 팬덤은 광적인 편집증 증상을 증폭하는 데 주관적, 객관적 요건을 모두 갖춘 셈이었다. 세속적으로 말한다면 “줄기세포”라는 주말 드라마 주연의 ‘구라발’(?)이 좋고, 각종 매체들이 알아서 ‘뻐꾸기’(?)를 날려주는 데 시청율이 낮을 리 만무하고, 드라마 폐인들이 생기지 않을 리 없다. 변방의 한국을 일약 전지구적 최고의 생명공학 선진국으로 전환시킨 드라마의 극적인 시나리오는 아마도 KBS의 『이산가족찾기』 프로그램 이래 최고의 다큐멘타리 서사일 것이며, “과학은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이 기막힌 대사는 아마도 『모래시계』에서 최민수가 던진 마지막 대사 이후 최고의 드라마틱한 대사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극적인 황우석 팬덤은 기막힌 시나리오와 감동적인 대사의 결정체에서 탄생한 것이리라.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황우석 팬덤 현상의 밑바닥에 작동하고 있는 강력한 공통의 에너지는 무엇인가하는 질문이다. 사실과 진실을 초월하는 황우석 팬덤 현상을 보면, 적어도 이것이 단순히 문화적 취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황우석의 행동에 동의하는 굳건한 신념 체계에서 비롯되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황우석 팬덤 현상에는 그와 그의 지지자들 간에 서로 관통하는 정서적 공감대가 존재하며, 절대적 신념 체계를 구축하는 재료와 소스의 원천이 존재한다. 나는 황우석 팬덤의 재료가 ‘애국주의’라면, 소스는 유사종교적 집단신앙심이라고 말하고 싶다. 말하자면 황우석 팬덤 신화의 실체는 애국주의와 유사종교주의의 결합에서 비롯된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수많은 난치병 환자들의 순수한 희망을 변질시켜버릴 지도 모르겠다. 나의 불치병이 치료될 수 있다는 간절한 바램이 “PD수첩”과 “서울대 조사위원회”의 발표로 산산조각 나는 것을 난치병 환자들은 결코 원치 않았을 것이다. 황우석 교수에 대한 난치병 환자들의 절대적인 신뢰는 그들이 애국주의자여서가 아니라 자신의 신체적 치유에 대한 기대감이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황우석 교수의 사태는 이미 “환자- 의사”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를 넘어선 지 오래다. 난치병 환자들은 계속해서 제2의 허준으로 환생하고 우상화된 “국민적 의사” 황우석의 발언 속에서 치유의 확신을 갖게 된다. 말하자면 난치병 환자들을 믿게하는 신념은 질병의 시술이 아니라 치료를 특정한 상징적 예식으로 전환하려는 어느 국민적 의사의 수많은 애국적 이야기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문제는 난치병 치유에 대한 순수한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증폭시키는 어떤 이데올로기가 개입된다는 것이다. 통상 의사에 대한 환자의 판타지는 치료에 대한 기대와 함께 그 공포를 거세시킬 수 있는 일종의 마취효과를 통해 만들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애국주의”라는 마취제이다.
알다시피 잘나가던 그렇지 않던 황우석 교수의 언변에는 늘 조국과 국가가 있다. 줄기세포의 쾌거를 알리기 위해 2004년 2월 미국 방문 후 귀국 소감에서 그는 “미국의 심장부에서 생명공학의 고지 위에 태극기를 꽂고 돌아오는 길이다”라는 애국주의적인 발언을 직설적으로 던졌다. 2004년 9월 이종장기이식 연구를 위해 `무균돼지'를 기증해 준 김윤범 시카고대 의대 교수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문익점 할아버지의 심정과 같았다”는 특유의 애국적 언변이 많은 사람들을 감동하게 만들었다. 논문조작 파문 이후 그의 공식적인 기자회견 장에는 예의 “대한민국”, “우리 국가”, “우리 조국”이라는 수사들이 적절한 방어의 시기에 동원된다. 자신의 기술을 온전히 조국의 것으로 바치려했던 그의 발언은 남한에 살고 있는 많은 대중들에게 애국주의적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조국을 위해 일하는 황우석 교수는 과학자이기에 앞서 독립운동가이며, 학자이기에 앞서 탈식민주의 운동가이다. 사실과 진실과는 무관하게 발언되는 과학자의 애국적 발언들은 우리가 “평화의 댐 건설 국민 대성금 행사” 때나 “IMF 국난극복 금모으기운동” 때에서 보여주었던 국민의 애국주의적 단결에 호소한다. 근대화에 대한 지성적·기술적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변방의 국가에서 글로벌 시대로 웅비하는 한국의 위상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 황우석의 줄기세포 신화는 국익이라는 현실을 과대포장하기에 적절한 배경음악이 된다.
더욱 공포스러운 것은 이러한 애국주의가 유사종교적 집단심리를 자극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통사고로 척수장애자로 살고 있는 어느 어린 소년 앞에서 “내가 너를 일으켜세우겠다”고 말한 것이나 역시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가수 강원래씨를 벌떡 일으켜 세우겠다는 발언은 과학자의 의학적 판단이기에 앞서 부흥회를 인도하는 부흥강사의 안수기도 같아 보인다. 황우석 교수의 유사종교적 발언은 그를 믿고 따르는 팬들에게 강력한 전인류적 교시로 들릴법하다. 어쩌면 이 지독한 애국주의는 “줄기세포”라는 현존하지 않은 판타지를 서둘러 실체화하려 했던 자작극의 원인이자 결과가 아닐까 싶다. 애국주의와 유사종교주의 집단심리의 결합, 이것이 바로 황우석 팬덤의 실체이다.
나는 지금 이 시점에서 황우석 팬덤이 그 목적과 이상에 대해 성찰의 기회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회에 “애국과 국익”과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우익주의의 등장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직면하게 될 것이다. 황우석 사태와 팬덤은 한국 사회 신우익주의 출현의 징후를 감지하게 만든다. 황우석을 지지하는 각종 집회와 인터넷 까페에는 애국주의적 표현들이 지배하고 있고, 광화문 촛불집회에는 태극기를 몸에 두른 시민들도 발견된다. 황우석 팬덤은 존재하지도 않은 줄기세포 기술 유추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기도 하고, 부시의 생명윤리 발언이나 외국 저널의 황우석 연구 검증 발언에 발끈하며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킨다. “황우석의 쾌거를 우리민족 모두의 승리”로 경축하고, “내 조국 대한민국의 과학자 황우석을 사랑한다”는 네티즌의 정서는 비단 몇몇 황우석 지지자들만의 심리는 아닐 것이다. 심지어 황우석 사태는 욱일승천하는 한국의 기개를 사전에 꺽으려는 미국의 공작에 따른 결과라는 음로론이 퍼기지도 한다.
이렇듯 이성을 마비시키고 민주주의적 절차와 과정보다는 집단이익의 결과만을 중시하는 현상들은 글로벌 시대 권역에서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신우익주의와 인터넷 민족주의의 폐해들로 읽을 법하다. 신우익주의는 냉전과 반공 이데올로기에 기초하는 전통적인 우익주의자들과는 다르게 철저하게 국익이라는 논리를 전면에 내세운다. 향후 수백조원이 예상되는 생명공학 자본의 축적, 세계 줄기세포 허브로서의 자긍심, 문화한류에 이어 과학한류로 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하는 한국에 대한 환상들이 신우익주의자들의 신념체계 속에 존재한다. 한류가 문화민족주의의 토대가 될 수 있다면, 줄기세포는 과학민족주의의 씨앗이다. 신우익주의는 생명윤리보다는 생명산업의 실익을, 진리보다는 국익을 우선한다는 점에서 이른바 OECD와 WTO 시대 이후의 새로운 국가주의를 대변한다. 인터넷 공간 역시 청년세대들에게 개인의 자유와 즐거움을 찾는 사적인 공간으로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 사건들에 대해서는 오프라인에서는 볼 수 없는 애국주의적인 반응들이 결집되는 민족적 공간으로 기능한다. 아이러브 황우석 까페에서 감지되는 애국적인 스타일과 황우석 팬덤들의 광화문 촛불시위를 보면서 2002년 월드컵의 열정, 미선이 효순이의 추모, 탄핵반대의 시민적 열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촛불시위가 방법과 수단만 차용된 채 국가와 조국을 우선하는 신우익주의로 퇴행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지금 황우석 팬덤은 미즈메디에 대한 실체 규명과 황우석 교수의 연구 재개를 촉구하고 있다. 그러한 요구들이 적어도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애국과 국익을 내세워 진실의 총체적 규명을 덮으려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민족, 애국, 국익의 절대 가치를 내세우며 진실을 왜곡하려는 집단파시즘을 경험한 바 있다. 파시즘의 심리적 기제는 바로 “정치의 종교화”이다. 최장집 교수가 황우석 사태를 유사파시즘으로 해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황우석 팬덤 현상에서 우려되는 바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가 지나가려는 길에 진달래 꽃을 뿌리고, 태극기를 흔들며 그의 부활을 염원하기 이전에 황우석 팬덤은 이제 스스로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를 깊이 성찰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지난 1월 14일 광화문에는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실험 재연을 촉구하는 수천 명 지지자들의 촛불 시위가 열렸다. 한 손에는 희망을 상징하는 촛불을 받치고, 다른 한손으로는 애국을 표상하는 태극기를 흔들며 황우석 지지자들은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의 시발점이자, 탄핵 반대의 진원지인 광화문 거리를 황우석 재기를 염원하는 거리로 바꾸어버렸다. ‘사이언스’에 기고한 2편의 논문이 모두 조작되었고, 줄기세포 및 원천기술이 없다는 서울대 조사위원회의 최종 조사 발표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여전히 황우석 교수의 ‘전지구적인’ 원천기술과 ‘애국적인’ 고해성사를 굳게 신뢰하며, 한국 생명공학의 부활을 위해 고난과 핍박의 골고다 언덕 길을 걸어가는 그의 십자가를 기꺼이 함께 지려한다. 이들에게 MBC ‘피디수첩’은 예수를 무고하게 고발한 ‘유다’같았을 것이며, 서울대 조사위원회는 그를 못박게 한 ‘로마법정’같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만으로도 과학자로서의 신뢰가 소멸되었고, 국가적 영웅에서 검찰 조사를 기다리는 피의자로 전락할지 모르는 그에게 많은 대중들이 변함없는 지지를 보이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이러브황우석’ 다음까페에는 11만명의 회원이 건재하고 논문조작 사실이 밝혀진 이후에도 회원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방송과 언론이 어떤 사실을 보도하더라도 사태에 동요하지 않는 황우석 지지자들은 어떤 심념을 가지고 있을까? 한 과학자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일반화하기에는 황우석 지지자들의 행동은 정상적인 이성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정신 구조를 가지고 있어 보인다.
논문 조작 사태 이후 황우석을 공공연하게 옹호하는 지지자들은 외부 상황의 변화와 무관한 자신들만의 신념 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는 마치 대중 스타에 대한 팬들의 맹목적인 동일화 현상과 같은 우상화된 판타지를 연상케 한다. 스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오류에 대한 판단을 중지시키는 무조건적 관용, 자신의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집단심리의 동원와 같은 팬덤 현상들이 황우석 지지자들의 행동에서도 발견된다. 절대적인 신념체계를 가지고 있는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가 어떠한 반사회적 행동을 저질러도 기꺼이 그를 옹호하고, 그를 비난하는 여론들에 대응하는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다. 팬들에게 가치판단의 기준은 스타의 행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스타 그 자체에서 나온다. 팬들은 스타의 행동에 대해 가치판단을 유보하며, 오직 그의 활동 자체와 동일화하길 원한다. 그래서 일반인들에게는 아무리 사소한 것일 지라도 팬들에게는 소중한 것일 수 있으며, 윤리적으로 의문시되는 스타의 행동도 그들에게는 특별한 경험으로 치환된다. 스타가 유사종교적 지도자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는 것도, 그의 카리스마 때문만은 아닌, 팬들 스스로가 기꺼이 유사종교적 신도가 되길 자원하기 때문이다. 스타에 대한 절대적 판타지는 스타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팬들의 자발적인 동의와 동일화에서 나온다.
황우석 지지자들에게 그는 누가 뭐래도, 영웅이고 스타이다. 불과 몇 달 전만해도 황우석은 ‘과학한류’를 선언한 글로벌 스타이자, ‘줄기세포 한류’의 창시자였다. 더욱이 ‘PD수첩’의 방영 이전까지 모든 방송과 언론 대부분이 ‘과학한류 부흥회’의 주관 방송·언론사를 또한 자임하였기에 황우석 팬덤은 광적인 편집증 증상을 증폭하는 데 주관적, 객관적 요건을 모두 갖춘 셈이었다. 세속적으로 말한다면 “줄기세포”라는 주말 드라마 주연의 ‘구라발’(?)이 좋고, 각종 매체들이 알아서 ‘뻐꾸기’(?)를 날려주는 데 시청율이 낮을 리 만무하고, 드라마 폐인들이 생기지 않을 리 없다. 변방의 한국을 일약 전지구적 최고의 생명공학 선진국으로 전환시킨 드라마의 극적인 시나리오는 아마도 KBS의 『이산가족찾기』 프로그램 이래 최고의 다큐멘타리 서사일 것이며, “과학은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이 기막힌 대사는 아마도 『모래시계』에서 최민수가 던진 마지막 대사 이후 최고의 드라마틱한 대사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극적인 황우석 팬덤은 기막힌 시나리오와 감동적인 대사의 결정체에서 탄생한 것이리라.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황우석 팬덤 현상의 밑바닥에 작동하고 있는 강력한 공통의 에너지는 무엇인가하는 질문이다. 사실과 진실을 초월하는 황우석 팬덤 현상을 보면, 적어도 이것이 단순히 문화적 취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황우석의 행동에 동의하는 굳건한 신념 체계에서 비롯되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황우석 팬덤 현상에는 그와 그의 지지자들 간에 서로 관통하는 정서적 공감대가 존재하며, 절대적 신념 체계를 구축하는 재료와 소스의 원천이 존재한다. 나는 황우석 팬덤의 재료가 ‘애국주의’라면, 소스는 유사종교적 집단신앙심이라고 말하고 싶다. 말하자면 황우석 팬덤 신화의 실체는 애국주의와 유사종교주의의 결합에서 비롯된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수많은 난치병 환자들의 순수한 희망을 변질시켜버릴 지도 모르겠다. 나의 불치병이 치료될 수 있다는 간절한 바램이 “PD수첩”과 “서울대 조사위원회”의 발표로 산산조각 나는 것을 난치병 환자들은 결코 원치 않았을 것이다. 황우석 교수에 대한 난치병 환자들의 절대적인 신뢰는 그들이 애국주의자여서가 아니라 자신의 신체적 치유에 대한 기대감이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황우석 교수의 사태는 이미 “환자- 의사”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관계를 넘어선 지 오래다. 난치병 환자들은 계속해서 제2의 허준으로 환생하고 우상화된 “국민적 의사” 황우석의 발언 속에서 치유의 확신을 갖게 된다. 말하자면 난치병 환자들을 믿게하는 신념은 질병의 시술이 아니라 치료를 특정한 상징적 예식으로 전환하려는 어느 국민적 의사의 수많은 애국적 이야기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문제는 난치병 치유에 대한 순수한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증폭시키는 어떤 이데올로기가 개입된다는 것이다. 통상 의사에 대한 환자의 판타지는 치료에 대한 기대와 함께 그 공포를 거세시킬 수 있는 일종의 마취효과를 통해 만들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애국주의”라는 마취제이다.
알다시피 잘나가던 그렇지 않던 황우석 교수의 언변에는 늘 조국과 국가가 있다. 줄기세포의 쾌거를 알리기 위해 2004년 2월 미국 방문 후 귀국 소감에서 그는 “미국의 심장부에서 생명공학의 고지 위에 태극기를 꽂고 돌아오는 길이다”라는 애국주의적인 발언을 직설적으로 던졌다. 2004년 9월 이종장기이식 연구를 위해 `무균돼지'를 기증해 준 김윤범 시카고대 의대 교수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문익점 할아버지의 심정과 같았다”는 특유의 애국적 언변이 많은 사람들을 감동하게 만들었다. 논문조작 파문 이후 그의 공식적인 기자회견 장에는 예의 “대한민국”, “우리 국가”, “우리 조국”이라는 수사들이 적절한 방어의 시기에 동원된다. 자신의 기술을 온전히 조국의 것으로 바치려했던 그의 발언은 남한에 살고 있는 많은 대중들에게 애국주의적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조국을 위해 일하는 황우석 교수는 과학자이기에 앞서 독립운동가이며, 학자이기에 앞서 탈식민주의 운동가이다. 사실과 진실과는 무관하게 발언되는 과학자의 애국적 발언들은 우리가 “평화의 댐 건설 국민 대성금 행사” 때나 “IMF 국난극복 금모으기운동” 때에서 보여주었던 국민의 애국주의적 단결에 호소한다. 근대화에 대한 지성적·기술적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변방의 국가에서 글로벌 시대로 웅비하는 한국의 위상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 황우석의 줄기세포 신화는 국익이라는 현실을 과대포장하기에 적절한 배경음악이 된다.
더욱 공포스러운 것은 이러한 애국주의가 유사종교적 집단심리를 자극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통사고로 척수장애자로 살고 있는 어느 어린 소년 앞에서 “내가 너를 일으켜세우겠다”고 말한 것이나 역시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가수 강원래씨를 벌떡 일으켜 세우겠다는 발언은 과학자의 의학적 판단이기에 앞서 부흥회를 인도하는 부흥강사의 안수기도 같아 보인다. 황우석 교수의 유사종교적 발언은 그를 믿고 따르는 팬들에게 강력한 전인류적 교시로 들릴법하다. 어쩌면 이 지독한 애국주의는 “줄기세포”라는 현존하지 않은 판타지를 서둘러 실체화하려 했던 자작극의 원인이자 결과가 아닐까 싶다. 애국주의와 유사종교주의 집단심리의 결합, 이것이 바로 황우석 팬덤의 실체이다.
나는 지금 이 시점에서 황우석 팬덤이 그 목적과 이상에 대해 성찰의 기회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회에 “애국과 국익”과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우익주의의 등장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직면하게 될 것이다. 황우석 사태와 팬덤은 한국 사회 신우익주의 출현의 징후를 감지하게 만든다. 황우석을 지지하는 각종 집회와 인터넷 까페에는 애국주의적 표현들이 지배하고 있고, 광화문 촛불집회에는 태극기를 몸에 두른 시민들도 발견된다. 황우석 팬덤은 존재하지도 않은 줄기세포 기술 유추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기도 하고, 부시의 생명윤리 발언이나 외국 저널의 황우석 연구 검증 발언에 발끈하며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킨다. “황우석의 쾌거를 우리민족 모두의 승리”로 경축하고, “내 조국 대한민국의 과학자 황우석을 사랑한다”는 네티즌의 정서는 비단 몇몇 황우석 지지자들만의 심리는 아닐 것이다. 심지어 황우석 사태는 욱일승천하는 한국의 기개를 사전에 꺽으려는 미국의 공작에 따른 결과라는 음로론이 퍼기지도 한다.
이렇듯 이성을 마비시키고 민주주의적 절차와 과정보다는 집단이익의 결과만을 중시하는 현상들은 글로벌 시대 권역에서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신우익주의와 인터넷 민족주의의 폐해들로 읽을 법하다. 신우익주의는 냉전과 반공 이데올로기에 기초하는 전통적인 우익주의자들과는 다르게 철저하게 국익이라는 논리를 전면에 내세운다. 향후 수백조원이 예상되는 생명공학 자본의 축적, 세계 줄기세포 허브로서의 자긍심, 문화한류에 이어 과학한류로 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하는 한국에 대한 환상들이 신우익주의자들의 신념체계 속에 존재한다. 한류가 문화민족주의의 토대가 될 수 있다면, 줄기세포는 과학민족주의의 씨앗이다. 신우익주의는 생명윤리보다는 생명산업의 실익을, 진리보다는 국익을 우선한다는 점에서 이른바 OECD와 WTO 시대 이후의 새로운 국가주의를 대변한다. 인터넷 공간 역시 청년세대들에게 개인의 자유와 즐거움을 찾는 사적인 공간으로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 사건들에 대해서는 오프라인에서는 볼 수 없는 애국주의적인 반응들이 결집되는 민족적 공간으로 기능한다. 아이러브 황우석 까페에서 감지되는 애국적인 스타일과 황우석 팬덤들의 광화문 촛불시위를 보면서 2002년 월드컵의 열정, 미선이 효순이의 추모, 탄핵반대의 시민적 열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촛불시위가 방법과 수단만 차용된 채 국가와 조국을 우선하는 신우익주의로 퇴행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지금 황우석 팬덤은 미즈메디에 대한 실체 규명과 황우석 교수의 연구 재개를 촉구하고 있다. 그러한 요구들이 적어도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애국과 국익을 내세워 진실의 총체적 규명을 덮으려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민족, 애국, 국익의 절대 가치를 내세우며 진실을 왜곡하려는 집단파시즘을 경험한 바 있다. 파시즘의 심리적 기제는 바로 “정치의 종교화”이다. 최장집 교수가 황우석 사태를 유사파시즘으로 해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황우석 팬덤 현상에서 우려되는 바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가 지나가려는 길에 진달래 꽃을 뿌리고, 태극기를 흔들며 그의 부활을 염원하기 이전에 황우석 팬덤은 이제 스스로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를 깊이 성찰할 때가 아닌가 싶다.






